[스크랩] 살아있는 역사, 진행 중인 역사(일본군‘성노예’피해자 증언 및 전시회)
나눔의 집 / 일본군'위안부'역사관 / 국제평화인권센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65번지 / 전화 031-768-0064 (대표 송월주 / 원장 원행)
시행일자 : 2016. 3. 31일(목)
수 신 : 각 후원자 및 언론사
발 신 : 나눔의 집 / 일본군‘위안부’역사관 / 국제평화인권센터
제목 : 살아있는 역사, 진행 중인 역사(일본군‘성노예’피해자 증언 및 전시회)
2016년 <일본군‘성노예’피해자> 부산 증언회 및 그림 특별전
(피해자 증언, 그림 전시회, 인권센터건립모금)
1. 부산 범어사 증언 투어 일정 : 2016년 4월 3일부터 5일까지
<행사진행순서>
○ 주 최 : 나눔의 집
○ 주 관 : 대한불교조계종 안국선원
○ 협 찬 : BBS부산불교방송
○ 전시일정 : 2016년 4월 3일(일) ~ 4월 5일(화) 10시~17시
○ 전시장소 : 안국선원교육관
○ 증언일시 : 2016년 4월 3일(일) 오전11시
○ 증언장소 : 안국선원교육관(부산시 연제구 교대로 16번길 27/051-717-3100)
○ 행사주요내용
- 위안부 할머니 증언
- 그림 특별전
- 인권센터건립모금
2. 참가자-전체 9명
나눔의 집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 할머니 3명
호련스님, 원종선 간호사, 김효정 간사, 케어자 등 4명
3. 전시그림 목록(작가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님들)
|
작가명 |
작품명(소장 : 나눔의 집 일본군위안부‘역사관) |
1 |
김순덕 |
만남 |
2 |
강일출 |
태워지는 처녀들 |
3 |
김순덕 |
못다핀 꽃 |
4 |
강덕경 |
라바울 위안소 |
5 |
강덕경 |
빼앗긴 순정 |
6 |
김순덕 |
끌려감 |
7 |
강덕경 |
상처 |
8 |
강덕경 |
책임자를 처벌하라 |
9 |
강덕경 |
마쓰시로 위안소 |
10 |
강덕경 |
눈내리는 풍경 |
11 |
이용녀 |
끌려가는 조선 처녀들 |
12 |
김순덕 |
그때 그곳에서 |
13 |
김복동 |
젊은날은 어디가고, 뒤돌아보니 어느덧 백발이로세 |
14 |
김복동 |
일본은 범하지 마라, 독도는 우리 땅 |
15 |
김복동 |
14세 소녀시, 끌려가는날 |
16 |
김순덕 |
씨앗공출 |
17 |
배춘희 |
중국에서 |
<< 살아있는 역사, 진행 중인 역사-일본군‘성노예’피해자 문제>>
대일 항쟁기 피해자 <일본군‘성노예’피해자>들이 공동 생활하는 <나눔의 집(이사장 송월주, 원장 원행)>과 부산 범어사(주지 수불)는 공동으로 피해자 <증언회>, 피해자들이 직접 그린 그림 <전시회>를 진행 합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일본군‘성노예’피해자> 문제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이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인도에 반한 죄라는 것을 알릴 계획입니다.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문제는 우리민족의 아픔이자, 여성들의 수난사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지지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못다핀 꽃>들이 모여 평화를 노래하는 나눔의 집
일본군'성노예'문제는 1991년 8월 14일,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군'성노예'할머니들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피해자의 여생을 돌볼 공동삶터가 필요하였다. <나눔의 집>은 일본군‘성노예’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던 1990년 초, 당시 생계조차 어려웠던 피해자 할머니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자는 취지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아 1992년 10월 서울 서교동에서 전셋집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나눔의 집은 일본군‘성노예’피해자 10분의 할머니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일본군‘성노예’만행의 진상규명과 공식사죄, 명예회복을 위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또한<나눔의 집>에서는 1998년 역사교육의 장이 될 세계최초인권테마박물관인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으며, 전시 여성폭력에 관한 실태조사 및 연구와 역사관 전시 홍보, 교육, 여성의 인권향상 및 인간의 권익보호 조성을 목적으로 NGO단체 <국제평화인권센터>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눔의 집 초기, 대다수의 할머니들은 한글이름도 쓰지 못하는 아픔>
초기 7명의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할머니들이 일제 강점기와 그 후 어려운 생활로 인하여 한글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당신들의 이름조차 쓰기 힘들었다. 이에 나눔의 집에서는 자원봉사자를 모집, 한글수업과 그림수업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성노예’피해자들 사회적 차별과 냉대속에서도 인권회복을 위해 지금까지 활동>
일본군‘성노예’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할머님들은 피해 당사자로 직접적인 활동을 하신다. 대표적인 활동이 <증언>과<수요집회>이다. 증언회는 1991년 8월 14일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를 다니면서 활동을 하신다. 수요집회는 1992년 2월 1일부터 2016년 현재까지 매주 수요일 마다, 12시부터 서울에 있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눈이오나 비가 오나 계속 한다. 수요집회는 2016년 3월 23일 현재, 1223차입니다.
<그림 그리기 작업은 상처받은 이의 마음을 드러내고 치유하는 작업>
일본군'성노예'피해자 할머니들의 그림은 2차 대전 당시의 전쟁피해자로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그림을 통해 직접 드러낸 유일한 그림 작품이다. 할머니들의 그림은 어떤 예술 작품성을 따지기 이전에 인간의 본질적인 개념이 앞선다. 인간의 삶이 예술성보다 높게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더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그림들은 기본요소위에 소재가 특이하기 때문에 고발성 민중미술 범주에서 예술적 가치를 갖는 것이다.
할머니들의 그림은, 분류한다면, 몇 가지 주제로 나뉠 수 있다. 어린 시절 순수하기만 했던 고향시절에 대한 기억(순수), 전쟁 후 귀국했으나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맺힌 삶(상처, 한), '위안부'증언 후 소외된 삶을 극복하고 전쟁범죄를 고발하면서 일본정부의 사죄, 배상을 촉구하는 의지와 바램이 담긴 내용(바램),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승화하는 삶(또 다른 순수)등이다.
<강일출 할머님 그림은 영화 귀향을 제작>
그림수업은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화가 이경신(李京信)씨가 담당하여 93년 초봄부터, 매주 한차례씩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그림수업은 할머니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시작되었으나 수업이 진행되면서 50여 년 동안 가슴을 짓눌렸던 피해의식과 분노를 풀어내는 마음치료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즉, 초기에는 습작, 모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심리적 불안감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추상적인 표현 거쳐, 역사의 증언자로서 사실적인 표현에까지 이르렀다. 1995년 12월 나눔의 집이 서울 혜화동 전셋집에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으로 옮기면서 그림그리기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으나 몇몇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개인적으로 그림그리기 작업이 진행되었다. 2002년 7월 18일, 강일출 할머님은 당신이 위안소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경험과 살아남은 기억으로 <태워지는 처녀들>을 그렸고, 조정레 감독이 영화<귀향>을 탄생시켰다.
4. 나눔의 집 현황
<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던 90년 초, 당시 생계조차 어려웠던 일제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자는 취지로 불교계와 온 국민의 성금을 모아 1992년 10월 서울 서교동에서 전셋집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12월 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로 이주 정착을 했고, 현재 나눔의 집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일제하 일본군‘위안부’만행의 진상규명과 공식사죄, 명예회복을 위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또한<나눔의 집>에서는 1998년 역사교육의 장이 될 세계최초인권테마박물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으며, 전시 여성폭력에 관한 실태조사 및 연구와 역사관 전시 홍보, 교육, 여성의 인권향상 및 인간의 권익보호 조성을 목적으로 NGO단체 <국제평화인권센터>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이력>>
강일출
192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43년 16살 때 집에 순사가 찾아와서 보국대를 뽑는다며 끌고 갔다. 중국 심양을 거쳐 장춘, 목단강 ‘위안소’에서 일본군 ‘위안부’피해를 당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아 부대 밖으로 이송되어 불에 태워지려다 조선 독립군들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해방군의 간호사로, 퇴직후에는 중국 길림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중국인과 결혼하여 중국 길림시에서 살았다.
2000년 영구 귀국하여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의 일상생활
● 나눔의 집 할머니들 중 막내이며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농사일이며 수요시위, 증언에도 누구보다도 늘 열심이다.
박옥선
1924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1941년 18살 때, 중국에는 돈도 많고 공장에 사람도 많이 구한다며, 친구가 함께 바느질 공장에 가자고 말했다. 집에서 허락을 안 해 줄 것 같아 친구와 함께 밤에 몰래 나와 기차를 탔다. 같은 또래의 여자 20명과 도착한 곳은 중국 헤이룽장성 목릉 부근의 ‘위안소’였다. 그곳에서 4년 동안 일본군‘위안부’피해를 당했고 부대가 폭격을 맞은 후 산 속을 헤매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 후 조선인 남자와 결혼해서, 중국 헤이룽장 성에 살았다. 2001년 영구 귀국하여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의 일상생활
● 평소에는 수줍고 조용한 성격의 할머니지만, 노래시간에는 점잔 빼지 않고 고운 목소리를 뽐낸다. 노래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배인 너울너울 춤사위도 수준급이다.
이옥선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었다. 1940년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말에 울산에 있는 여관에서 일했다. 1942년 조선인 한명과 일본인 한명에게 중국 연길로 끌려갔다. 그 후 3년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당했다. 해방 후 조선인 남자와 결혼 해서 중국 팔도진(八道鎭)에 정착했다. 하지만 남편이 전쟁으로 군입대를 하는 바람에 헤어졌고, 재가하여 아들 내외와 중국 연길에서 살았다. 2000년 영구 귀국하여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의 일상생활
● 항상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하며, 책이건 수요시위 선언문이건 뭐든 열심히 읽는 열혈 인권 활동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