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

창작21-철원생명문학축전 오마이뉴스 보도기사

우또라 2006. 11. 2. 15:58
녹슨 철마 위에 어른거리는 이태준의 그림자
4일, 철원에서 '상허 이태준 선생 추모 문학제'
텍스트만보기   이종찬(lsr) 기자   
▲ 1990년대 초, 녹슨 철마에서(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시인 이소리, 이원규, 박상률 그리고 독자들, 오른쪽 끝 시인 정원도)
ⓒ 이종찬
"예전에는 나에게도
패랭이꽃 피는
고향이 있었더니라.

고추잠자리 날아다니는
마당가에서
맨발의 누이는 줄넘기를 하고,

명주실같이 여윈 어머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더니라.

씨 익은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그 집,

나에게도 고향은 있었더니라
전쟁의 불길이 그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기까지는!"

-민영, '고향' 모두


▲ 지금으로부터 3년 앞에 세워진 상허 이태준 문학비
ⓒ 창작21
'엉겅퀴꽃'의 시인 민영(1934∼) 선생의 탯줄이 묻힌 구철원에 간 그때가 언제였던가. 1990년대 초, 그해 가을에도 70∼80여 명의 시인과 작가들이 분단문학의 현장을 찾는다는 이름을 내걸고 구철원에 갔었다. 그리고 총탄자국이 수없이 새겨진 노동당사에 우두커니 앉아서, 혹은 녹슨 기찻길 위에 스러져가는 녹슨 철마를 타고 하루속히 남북통일이 되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로부터 또다시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때 새파랗게 젊었던 시인 작가들도 어느덧 사십대 중반 혹은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중에는 이미 세상을 달리한 이름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남북통일의 그날은 멀기만 하다. 아, 남과 북이 서로 가슴을 활짝 열고 가을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하나로 뭉쳐지는 통일한국의 그날은 언제쯤일까.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 탁월한 단편소설을 남긴 상허 이태준(李泰俊, 1904.1.7∼?)도 남북분단의 희생양이었다. 상허 선생은 1930년대 한국문단에서 '조선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릴 정도로 가장 빛나는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때 선생이 펴낸 <문장>은 한국문학을 승화시키는 주춧돌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월북함으로써 자신에게 불행의 씨앗을 뿌렸다.

조국 광복 뒤 월북한 상허 선생은 북한에서도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북한 안에서도 권력투쟁이 일어나 선생은 그만 '부르주아적 소시민 문학의 분파주의'라는 굴레를 덮어쓴 채 숙청당하고 말았다. 그때가 1955년이다. 그 뒤부터 상허 이태준 선생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까지 살다가 죽었는지 모른다. 만약 선생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백두 살이 아니겠는가.

▲ 한국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는 노동당사
ⓒ 창작21
"철원은 한국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으며, 노동당사, 백마고지, 월정리역 등 전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또한 철원출신 소설가이며, 해금작가인 상허 이태준 문학비가 대마리 평화박물관 옆에 세워져 있어 문학기행이나 통일기행의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로도 유명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제4회 DMZ 평화마을을 찾아가는 생명문학축전과 상허 이태준 문학제를 열고자 합니다."

핵무기 실험을 했던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선언하면서 그동안 남북을 맴도는 차갑고 무거운 바람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가운데 남북의 화해와 통일, 한민족과 지구촌의 영원한 평화를 바라는 시인 작가들이 분단의 상처가 깊이 패여 있는 구철원 일대를 돌면서 생명문학축전과 이태준 문학제를 연다.

오는 4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동안 상허 이태준 문학비(강원 철원군 대마리) 앞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창작21작가회'가 주최하고, 강원민예총과 상허 이태준을 생각하는 모임, 춘천민예총, 철원예총, 창작21동인 등이 주관한다. 후원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무총리 산하 복권위원회.

계획된 일정을 살펴보면, 4일 오전 9시 30분 대한극장(충무로역 1번 출구) 앞에서 전세버스로 출발하며, 오전 11시 30분 철원 승일교에 도착, 철원지역 농민들과 대화를 나눈다. 낮 12시 궁예도성에 도착하고, 이어 오후 1시 30분 한국전쟁의 상처가 깊숙이 패여 있는 백마고지에 도착해 '육필 통일시 및 기원문 쓰기' 행사를 펼친 뒤 본 행사 장소인 상허 이태준 문학비 앞에 모인다.

▲ 노동당사에 앉아 분단의 비극을 되새기다
ⓒ 이종찬
오후 2시30분 문창길(창작21 대표) 시인의 사회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모두 2부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다. 제1부는 상허 이태준 선생에 대한 추모, 묵념, 헌화, 헌주, 헌시로 이어지는 추모제다. 상허 이태준 선생 추모제에는 민영(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시인과 강원 민예총 최옥영 지회장의 인사말, 지역 문화예술계 대표들의 추모사가 잇따라 낭독할 예정이다.

민예총 춘천지부 민성숙 부지부장의 사회로 열리는 제2부는 계간 <창작21> 기획위원인 문순희가 나와 상허 이태준 선생의 약력 및 활동소개를 할 계획이다. 이어 춘천민예총 회원인 박계순(소설가)의 살풀이 무용, 소설가 차인숙의 이태준 단편소설 '고향' 낭독, 수원 대연유치원생 현다혜의 북녘 어린이에게 보내는 동시 '친구야 어딨니' 낭독, 국창전수자 심인식의 시창공연 등이 준비돼 있다.

"친구야
너, 지금 어딨니
엄마가 그러시는데
너는 눈이 사슴처럼 맑은 아이라고 했어
엄마가 그러시는데
너는 마음이 손난로처럼 따뜻한 아이라고 했어
이곳에 오면 너를 만날수 있을거라 했는데
너는 아직 저 강 건너에 있다는구나
우리, 언제면 만날 수 있을까
보고 싶어
친구야 " .-'친구야 어딨니' 모두


시낭독에는 시인 이기형, 정대구, 송용구, 이화국, 김운향, 최자웅, 문창길, 권영순, 이주섭, 김형효, 석화, 심의표, 지영희, 이승호, 조길성 등이 나올 예정이다. 끝으로 참가문화예술인 모두가 다 함께 모여 찰조망 너머 북녘땅을 바라보며 통일시 및 기원문을 읽는 순서로 행사를 마칠 예정이다.

▲ 철마는 달리고 싶다
ⓒ 창작21
이번 행사를 주최하는 문창길 시인은 "최근 금강산에서 남북 단일 문학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이는 우리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 계기가 된 것"이라며 "이는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는 인간적이고 생명사상이 존중되는 아름다운 문학, 한민족문학이 창작자들에 의해 자유롭게 발표되고, 활자화 되는 시대가 열린 매우 긍정적인 징후"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내 담임반 아이었다. 나를 잘 따르면서도 무언가를 자꾸 숨기고 싶어하던 아이다, 돌덩이를 삼킨 듯 입이 무거운 아이,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는 그의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빨갱이 자손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는 듯 그의 입은 늘 그렇게 굳게 닫혀져 있었다

중3이 되던 해 3월, 그 아이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나는 그를 찾아 그 아이 또래들과 마구 헤매 다녔다.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홀 할머니는 눈물만 자꾸 흘렸다. “그 애, 늘 지 애비어미 없는 걸 그렇게 한탄하더니만---” 무성한 말들만 가지를 뻗어 나갔다.

파출소에 신고를 하던 날 그 아이는 바닷가에서 더 멀리 떨어진 포구 쪽에서 발견되었다
이른 봄날 아침, 하늘은 먹칠을 한 듯 까만 구름 떼를 몰고 왔다
그 아이 이름은 거기 그렇게 묻혀 갔다
그리고 다시 그 고장은 침묵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비밀을 가슴속에 묻은 채

-이영춘, '그때 그 아이' 몇 토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