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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특별함을 좇는 초판사냥꾼

우또라 2016. 2. 20. 14:56

특별함을 좇는 초판사냥꾼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ㆍ서점가 이례적 복각 열풍 왜?

오래전 절판된 책이 말쑥한 장정과 선명한 인쇄로 복간됐을 때  허탈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겉은 깨끗해졌지만  첫 출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모두 말소됐기 때문이다.책의 내용만이 아니라 책의 물성(物性)까지도 사랑하는  애서가들이 초판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은 최근 나온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 복간본(왼쪽)과  1977년 출간된 김승옥 산문집  <뜬 세상에 살기에> 초판.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오래전 절판된 책이 말쑥한 장정과 선명한 인쇄로 복간됐을 때 허탈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겉은 깨끗해졌지만 첫 출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모두 말소됐기 때문이다.책의 내용만이 아니라 책의 물성(物性)까지도 사랑하는 애서가들이 초판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은 최근 나온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 복간본(왼쪽)과 1977년 출간된 김승옥 산문집 <뜬 세상에 살기에> 초판.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최근 서점가에서 초판 복각본(復刻本·원형 그대로 살려낸 인쇄물)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1인 출판사 소와다리가 초판본의 활자와 장정, 세로쓰기까지 고스란히 복원해 지난해 11월 출간한 <초판본 진달래꽃>은 한 달 만에 인터넷 서점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같은 출판사가 이달 초 펴낸 윤동주의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출간되자마자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7위에 올랐다. 이달 말 출간 예정인 백석의 <초판본 사슴>은 예약판매만으로 알라딘 종합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다.

초판 복각 자체가 드문 일은 아니다. 연구나 박물관 전시를 위한 고서 또는 근대문학 초판본 복각은 꾸준히 이뤄졌다. 최근 10년 사이에만 해도 근대소설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재)아단문고가 2007년 복각본 고전총서 10권을 발행했고, 2011년에는 출판사 열화당이 ‘열화당 한국근현대서적 복각총서’ 시리즈를 펴낸 바 있다. 소와다리 출판사의 초판 복각본은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초판 수집가들이 말하는 초판의 매력은 무엇일까.

서울 은평구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윤성근씨(42)는 “오리지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라고 말했다. 윤씨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앨리스’)를 수집한다. 대학 시절 <앨리스>를 원서로 읽고 그 풍부한 상상력에 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10개 언어로 된 300여권을 소장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갖고 보는 것은 판본에 따라 다른 삽화들이다. 윤씨가 소장한 책 중 가장 오래된 책은 1901년 미국에서 출간된 것으로, 삽화가 피터 뉴웰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초판이다. 윤씨는 2007년 무렵 미국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를 통해 240만원에 이 책을 구했다.

출판사 소와다리의<br />윤동주 시집 초판 복간본(인스타그램 사진)

출판사 소와다리의 윤동주 시집 초판 복간본(인스타그램 사진)

한국 작가의 초판 가운데는 김승옥 산문집 <뜬 세상에 살기에>가 각별하다. 1977년 12월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책으로, 문학평론가 김현, 김치수, 염무웅 등과 함께 동인지 ‘산문시대’를 펴내던 시절, 결혼생활 등을 다룬 산문과 1977년 숙명여대 강의 등이 실렸다. 김승옥의 책 가운데 산문집은 이 책과 2004년 출간된 <내가 만난 하나님>이 전부다. 윤씨는 녹번동에 살던 원래 소장자가 재개발로 이사하면서 내놓은 책더미 속에서 이 책 초판본을 발견했다.

<뜬 세상에 살기에>에는 윤씨가 10여년 동안 헌책방을 하면서도 구하지 못했던 책의 사진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산문시대’ 창간호가 바로 그것이다. ‘산문시대’ 창간호는 당시 대부분 20대였던 동인들이 거의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윤씨는 “당시 20대였던 이 한국문학 천재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책인데,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lt;이상한 나라의 앨리스&gt;<br />피터 뉴웰 삽화본 1901년 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피터 뉴웰 삽화본 1901년 초판

경북 상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박균호씨(48)는 ‘특별한 만족감’이 초판본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소장한 초판본 가운데 그가 큰 애착을 느끼는 책들 중 하나는 1967년 언론인 예용해씨가 쓴 <인간문화재>다. ‘인간문화재’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저자 예용해씨가 전국의 판소리 명창 등 전통문화 장인들을 만나면서 2년간 연재한 신문기사를 모은 책이다. 1997년 한 출판사가 <예용해 전집>을 내면서 복간됐으나 초판의 완성도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다. <인간문화재> 초판은 1963년 어문각에서 출간할 당시 가격이 2만원으로,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50만원이 넘는 고가의 책이었다. 박씨는 “초판은 복간본에 비해 크기도 크고 표지 장정에 삼베를 쓰는 등 복간본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며 “원래 중판을 갖고 있었는데 어렵게 초판을 구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경매에서 1억3500만원에<br />낙찰된 김소월 시집 초판

지난해 경매에서 1억3500만원에 낙찰된 김소월 시집 초판

아동문학가 이오덕, 권정생이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초판본도 박씨가 아끼는 책이다. 이 책은 2003년 11월 한길사에서 출간됐다. 출간 후 10여일 동안 초판 3000부 가운데 1200부가 서점에 깔렸다. 그러나 그해 8월에 작고한 이오덕이 생전에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출판사가 책을 긴급히 회수해 희귀본이 됐다.

동일한 초판이라도 보존 상태가 좋을수록 가치가 높다. 그러나 때로는 ‘불량품’이 ‘정품’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1995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김태형 시인의 시집 <로큰롤 헤븐>이 그런 경우다. 이 시집 초판본 가운데 일부는 인쇄가 잘못된 채 세상에 나왔다. 시 제목과 쪽수만 있어야 할 목차 부분에 엉뚱한 활자들이 겹쳐져 인쇄됐다. <로큰롤 헤븐> 초판이 보통 1만원에 팔리는 반면, 이 ‘오류본’은 3만원에 팔린다. 초판의 제작상 오류가 오히려 책의 시장 가치를 끌어올리는 요소가 되는 현상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장서 수집가 톰 라비는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에서 “실수는 수집광들에게 또 다른 굉장한 아이템이다. 책 속의 오류는 그 책의 가치를 높인다. 게다가 묘하게도 더 심각한 실수일수록 책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고 썼다.

‘풀빛판화시선’으로 출간됐던 김정환 시집<br />&lt;해방서시&gt; 1985년 초판 내부

‘풀빛판화시선’으로 출간됐던 김정환 시집 <해방서시> 1985년 초판 내부

전성기 시절 강력한 개성으로 필명을 날렸던 생존 작가들의 경우 해당 작가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에 따라 책의 가치가 달라진다. 김지하 시인의 <황토> 초판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0만원 선에 팔렸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 고초를 겪었던 시인이 박근혜 정권을 지지하면서 요즘은 1만~2만원에 팔린다. 과거 5만원이었던 <타는 목마름으로> 초판 가격도 요즘은 1만원대로 떨어졌다.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 초판도 시인이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의 정체성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가치가 하락했다.

인쇄 오류 때문에 희귀본이 된 김태형 시집<br />&lt;로큰롤 헤븐&gt;(민음사) 1995년 초판

인쇄 오류 때문에 희귀본이 된 김태형 시집 <로큰롤 헤븐>(민음사) 1995년 초판

일반인들이 쉽게 넘보기 힘든 초판들도 있다. 주로 한국전쟁 이전에 출간돼 ‘고서’로 분류되는 책들이다. 소량만 인쇄된 데다 전쟁 중 많은 책들이 소실 또는 유실돼 더욱 희귀해진 이 고서들은 평범한 애서가들이 접근할 수 없는 천문학적 가격에 거래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서점인 서울 인사동 화봉문고의 경매 브로슈어를 보면, 이상이 장정을 해 그 시대 책 같지 않게 현대적인 멋을 풍기는 김기림 시집 <기상도>(1935)는 평가액이 2000만원이다. 1941년 출간된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 초판은 평가액이 5000만원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은 지난해 12월19일 화봉문고 현장경매에서 1억3500만원에 낙찰돼 화제가 됐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수집가는 아니다. 제아무리 열정적인 수집가라 하더라도 고가의 희귀 초판본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초판 복각본은 일반 독자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원본의 진본성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초판 복각본이 일으키는 열풍은 최근 몇 년 새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 잡은 책의 개념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보고 만지고 느끼는 일종의 문화상품으로서의 책이 소구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 공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서 ‘초판본’을 검색하면 1900여개의 게시물이 검색되는데, 대부분 소와다리 출판사의 초판 복각본 사진들이다.

최근에는 동일한 콘셉트의 다른 출판사 상품도 등장했다. 한 출판사는 “김구 탄생 140주년, 광복 71주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어야 할 책”이라며 <백범일지> 초판 복각본을 예약판매하고 있다. 당시 우표와 엽서 등 부가상품을 패키지식으로 파는 것까지 소와다리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과 동일해 ‘베끼기’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지만, 컬러링북이나 필사(筆寫) 책이 그랬듯이 비슷한 책들의 출간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 시내 한 헌책방 서가에 1980~1990년대에 출간된 문학·사회과학 서적들의 초판이 나란히 꽂혀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서울 시내 한 헌책방 서가에 1980~1990년대에 출간된 문학·사회과학 서적들의 초판이 나란히 꽂혀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근대 시인 시집 초판 구매자 60% 이상이 20대…오래된 아름다움을 찾는 독자들 호응 놀라워”


김동근 소와다리 대표(40)는 초판에 대한 일정한 수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에서 출간된 지 10~20년 된 헌책을 수집하면서 알게 됐다. 그는 “초판에 가치를 부여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수요는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소와다리는 2012년 설립된 후 한동안 외국어 학습자들을 겨냥해 외국 고전들의 영한대역본을 펴내던 출판사였다. 그러나 영한대역본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줄었다. 그 대안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간실격>, <피터 래빗> 등 외국 작품들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살린 번역판을 2년 가까이 내다 새롭게 시도한 것이 한국 근대 시인 초판 복각이다.

김 대표는 초판 복각본이 성공한 이유로 “독자들에게는 책의 표지나 종이 자체를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며 “초판 복각본은 디자인이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예뻐 보인다”고 말했다. 초판이 나오던 무렵의 시대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패키지’ 아이템도 주효했다. <진달래꽃>을 사면 경성우편국 속달인이 찍힌 봉투와 명동 풍경 엽서, 대한제국 시절 우표를 함께 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윤동주의 육필 원고철과 사진, 판결 관련 서류가 함께 들어 있다.

소와다리가 펴낸 근대 시인 초판 복각본을 구매하는 독자의 60% 이상이 20대다. 그 가운데 70% 이상이 여성이다. 시에 대한 20대 여성들의 수요가 더 높은 것이다. 최근에는 이상, 이육사, 한용운, 김영랑 등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봤던 시인들의 시집을 내달라는 요청이 많다.


소와다리는 근대 소설 초판 복각도 시도할 예정이다. 김 대표는 “주요 근대 작가들의 대표 작품을 단편 선집 형태로 내려고 한다”며 “최초 발표 지면이 잡지인 경우가 많아 해당 잡지 디자인을 그 당시 광고까지 살려 복각하려 한다”고 말했다. 시집 초판에 대한 열광이 소설 초판으로까지 번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평이한 어휘와 영롱한 시정이라는 측면에서 현대시들과 차별화되는 매력을 지닌 근대시와 달리 근대소설의 경우 소설 문법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현대소설과 격차가 있다. 김소월, 윤동주, 백석 등 ‘민족 시인’의 후광을 두른 스타들이 포진한 근대시에 비해 근대소설 분야에서 그들과 겨룰 만한 스타를 찾기 어렵다는 것도 단점이다.



출처 : 창작21
글쓴이 : 우또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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