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자유경제원의 문학계 공격, 왜
정원식 기자
ㆍ시인 김수영에 좌편향 덧칠…진짜 타깃은? 문학교과서 국정화 겨냥하나
“건국 대통령은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이며, 그의 주도로 이뤄진 1948년 건국이란 것도 결별해야 할 ‘썩어진 어제’일뿐이라는 일면적 인식을 이 작품은 양보하지 않고 강요한다.”
지난 4월14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한 한 언론인이 김수영(1921~1968)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두고 내린 평가다. 이날 발제를 맡은 보수성향 인터넷 매체 미디어펜의 조우석 주필은 “이 작품은 자유당 시절과 우남 이승만에 대한 가장 지독하고 격렬한 정치적 공격”이라며 “이 시가 등장한 이후 대통령의 사진을 화장실 용도나 개굴창에 내다버리고, 동상을 허물어버리는 행위야말로 되찾은 시민적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인증이 되어버렸다.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지난해 정부 여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적극 옹호했던 자유경제원이 최근 시인 김수영을 공격하고 나섰다. 자유경제원은 이날 1차 세미나를 시작으로 지난 13일 종합토론까지 석 달간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김수영 비판 연속 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실관계 왜곡한 김수영 비판
일부 참석자들은 김수영의 시적 성취를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예컨대 3차 세미나(5월23일) 발제를 맡은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김수영의 시 가운데 초현실주의 계통이 아닌 시들은) 다 못 쓴 시들이다. 김수영은 참여시라는 것을 써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시도 써본 적이 없다”며 “언어 감각이 탁월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게 시다. 그런데 김수영은 언어 감각은 고사하고 한국어 자체가 안 되는 인물이다. 본인도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수영 비판’이라는 세미나의 공식 명칭과 달리, 참석자들의 실제 공격 대상은 김수영이 아니라 진보진영 평론가들이다. 참석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김수영은 과대평가된 시인이다. 김수영을 신화로 만든 것은 백낙청, 염무웅 등 민중·민족문학 진영 평론가들이다. 김수영 신화는 민중·민족문학 평론가들이 문화계를 장악하기 위해 서정주를 표적 살해하고 김수영을 띄워준 결과다.’
문학계는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세미나 참석자들은 민중·민족문학 진영 평론가들이 김수영 신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문학계는 김수영 사후 김수영 재평가의 기초를 놓은 것은 백낙청-염무웅의 창작과비평이 아니라 자유주의 성향 문인들이 모였던 민음사라고 본다.
생전의 김수영은 합동시집을 낸 적은 있지만 단독시집은 1959년 <달나라의 장난>이 유일하다. 신생 출판사였던 민음사는 앞서 ‘세계시인총서’로 성공을 거둔 후 1974년 ‘오늘의 시인총서’ 제1권으로 김수영의 시를 모은 시선집 <거대한 뿌리>를 출간했다. <거대한 뿌리>는 3년 동안 3만부가 팔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도 모두 민음사에서 나왔다. 민음사는 <거대한 뿌리> 판매수익을 바탕으로 1981년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모은 <김수영 전집1>과 <김수영 전집2>를, 1983년 김수영에 대한 평론을 모은 전집 별권 <김수영의 문학>을 출간했는데, 시인 평론가 23명의 글을 모은 <김수영의 문학>은 본격적인 비평적 평가의 시발점이 됐다. 1970년대 말 유족의 제안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한 것도 민음사다.
김수영 재평가에 참여한 비평가들도 창작과비평 진영의 백낙청 염무웅뿐만 아니라 민음사 문학지 ‘세계의문학’에 참여하고 있던 김우창, 유종호, 문학과지성 진영의 김현, 김주연 등 자유주의 성향 비평가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이시영 시인은 “1970~1980년대 김수영의 재평가는 한국문학 전체가 동참해 이루어진 것이지 특정 목적을 가진 특정인들만의 독점적 해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재평가의 방향 또한 참여파 시인으로의 자리매김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평론가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중·민족문학 진영에서 김수영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없는 것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창비는 민중·민족문학적 관점에서 그를 재평가했고 문학과지성은 김수영 시의 모던함과 언어의 참신성을 재평가했다”고 말했다. 김수영 시의 영향을 받은 후배 시인들의 스펙트럼도 민중·민족문학 계열의 시인들만이 아니라 문지 계열의 이성복, 황지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황규관 시인은 “특히 젊은 황지우의 시들은 김수영의 ‘적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좌파’ ‘종북’ 색깔론, 역사학계 공격 논리와 판박이
자유경제원 세미나 참석자들이 김수영을 매개로 문학계를 공격한 방식은 지난해 정부, 여당, 뉴라이트 학자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역사학계를 공격한 방식과 유사하다.
국정화 옹호 세력은 검정 역사교과서가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김수영 비판’ 세미나 참석자들은 ‘좌파문학 진영이 친일·독재 부역 혐의를 걸어 자유주의 문단의 거장 미당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김수영을 올려놓았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정부, 여당, 뉴라이트 학자 등 국정화 옹호 세력이 현행 검정 역사교과서를 ‘좌편향’ 교과서로 단정짓고 국정화에 반대하는 학계와 시민사회를 ‘종북’으로 몰아붙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색깔론이 등장했다. 조우석 주필은 1차 세미나 발제에서 “좌파는 100여년 근현대문학사를 자기네들의 뜻대로 전면 재구성해 놓기에 이르렀다”며 “좌편향 문학은 그(김수영)를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처지를 괴로워했던 민중시인’으로 둔갑시킨 뒤 그런 김수영을 본떠 대한민국을 향해 분노하고 욕을 하라고 부추긴다”고 말했다. 2차 세미나 토론에서는 “문단 헤게모니를 장악한 창비 계열 백낙청의 유일적 지도체계” “가히 한국문단의 최고존엄” 등 북한 체제를 연상시키는 표현을 사용해 창비 진영의 리더 백낙청 교수에게 ‘종북세력 수장’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자유경제원이 왜 이 시점에서 문학계를 공격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는 2차 발제에서 “2010년대의 김수영 열풍”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왜 김수영이 다시 2016년 한복판에 다시 나타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2010년 이후 한국문학계나 한국 사회에서 김수영의 시가 집중적인 학술적 관심 또는 대중의 이목을 모은 사건은 없었다. 학계에서 단기간에 김수영을 집중조명했던 것은 김수영 30주기였던 1998년이다. 최초의 김수영 평전이 나온 것은 2001년이다. 최근 문학계를 뒤흔든 사건으로는 지난해 소설가 신경숙씨의 표절 논란에서 촉발된 문학권력 논쟁을 들 수 있는데, 당시 시인 김수영이 거론된 적은 없다. 이씨는 2012년 출간된 철학자 강신주씨의 <김수영을 위하여>가 시인 김수영을 21세기에 다시 불러냈다고 주장하지만, 강씨의 책 가운데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 보다 광범위한 대중적 파급력을 지녔던 책은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을 묶은 <감정수업>이다. 이 때문에 문학계는 자유경제원의 김수영 비판을 ‘난데없는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자유경제원 관계자는 세미나 취지를 묻는 질문에 “홈페이지의 세미나 공고문을 참고하라”고만 말했다. 공고문은 “언제부터인가 김수영의 사회참여시는 대중의 분노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었다. 김수영 가짜 신화가 만들어진 배경, 문단권력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히고 있다.
■문학교과서도 국정화하려고 하나
‘김수영 비판’ 세미나를 두고 문단 일각에서는 자유경제원이 역사교과서에 이어 문학 교과서 내용도 뉴라이트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의도가 드러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 점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지난해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토론회다. 자유경제원은 지난해 ‘교과서 속 문학작품이 수상하다’(2월), ‘교과서 심층분석 제1차: 사회문화/문학/시험문제 어떻게 편향되어 있나’(5월), ‘문학 교사용 참고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등 관련 토론회를 열었다.
조형곤 21C미래교육연합 대표는 지난해 2월 토론회에서 “중·고등학교 국어와 문학 교과서에도 이승만은 없다. 물론 국어나 문학 과목에 이승만을 싣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동시대 인물 야당 정치인이나 김구가 역사과목이 아닌 국어 과목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된다”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교육자의 시각이 민중사관에 입각하여 좌편향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토론문에서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조국광복의 열망이 담겨 있는 시’라고 보는 것은 민중문학적 관점에 의한 왜곡된 해석이며, “이는 필경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는 지난해 12월 토론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식민사관보다 더 나쁜 자학사관이 우리 교육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렇게 부정과 자학만 강조하니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불행할 수밖에 없다”며 몇 가지 유형의 작품들을 교과서 수록에서 가능한 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층간 차별과 반감을 강조하는 작품’ ‘경쟁사회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 ‘분단 현실과 공산주의자들을 왜곡하는 작품’ ‘약자는 법을 어겨도 상관없다는 내용을 담은 작품’ ‘공교육을 비판하는 작품’ 등이 그것들이다. 예컨대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경쟁은 나쁜 것이고 불필요한 것이라는 논리가 이 소설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주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것이다. 전희경 전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은 지난해 10월 “경제·문학·윤리·사회 교과서들 역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기적의 힘에 대한 내용은 없고, 학생들에게 불평과 남 탓, 패배감을 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자유경제원은 검정 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세미나와 토론회를 10월 한 달 동안에만 7차례 여는 등 국정화 전선의 전면에 나섰다. 방송 토론회에서 거침없는 언변으로 ‘보수의 여전사’로 불린 전희경 전 사무총장은 지난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로 국회에 입성했다. 자유경제원은 행정·연구인력이 10여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2014년 현 현진권 원장 취임 이후 각종 이슈에 기민하고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뒤에는 전경련의 자금 지원이 있다. 자유경제원은 1996년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부설기관으로 출발해 1997년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분리됐으나 여전히 전경련 산하기관이나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홍종학 전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월 자유경제원이 2012~2015년 사이에 매년 평균 20억원의 외부 지원금을 받았다는 자료를 공개하며 “외부 지원금은 전경련에서 나온 돈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홍 전 의원은 전화통화에서 “자유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장경쟁을 저해하는 재벌을 옹호하는, 재벌과 보수이념의 선전도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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