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문창길 시평

우또라 2005. 5. 16. 09:53

서울신학대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메꽃이 남겨놓은 유산(遺産)

- 문창길의 시집을 읽고



송용구(시인. 고려대 연구교수)




절망에 빠져있는 자에게서 감정의 풍부함을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생존권의 박탈을 경험하는 사람은 감정의 고갈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내면의 감정이 메마르게 되면 곧 자연과 사람 간의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감정의 결핍을 경험하는 사람은 자연의 친구로서 살아갈 수 없고, 자연과의 단절을 경험하는 사람은 감정의 황폐함에 직면해야 한다. 감정을 낳아주는 원천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싸아하게 다가오는 해풍들이/ 우매한 시간들을 밀쳐낸다/ 입안 가득 채워진 비린내가/ 짓무른 도시의 하수처럼 쏟아진다/ 해 늦은 금빛 포구엔/ 어느 새 물비늘이 반짝거리고/ 돌아 온 몇 척의 고깃배들이/ 해진 그물을 부려 놓을 때/ 뜨거운 삶의 욕망처럼 달구어진/ 쇠말뚝에 굵은 닻줄을 감는/ 나이 든 어부들의 무거운 어깨가/ 뭍바람에 출렁인다
- 문창길의 「방어진 포구에서」

‘어부들’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 ‘반짝거리는 물비늘’앞에서도 그들의 눈망울은 아름다운 빛을 보지 못한다. ‘짓무른 도시의 하수’같은 절망이 그들의 영혼과 바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있다. 바다와 함께 살면서도 바다의 푸르름을 느끼지 못하는 삶의 아이러니여! ‘우매한 시간’에 비유될만한 희비극(喜悲劇)의 상황을 연출해낸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시인은 차가운 눈빛을 쏟아붓고 있다.

발뿌리에서 그녀의 세상은 넓다 언덕을 넘는 바람이 그녀와 함께 옷을 벗는다 메마른 핏줄을 따라 칼칼한 목구멍을 삼키는 그녀 시든 꽃술을 감추는 혓잎 끝으로 연분홍 시절을 뒤척이며 무심한 꽃대궁을 키운다.
- 문창길의 「메꽃」

한 사람의 인권을 억압하는 자본과 권력의 횡포는 성(性)에 대한 착취의 양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메꽃’은 남성들의 성욕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린 ‘꽃님이’의 ‘슬픈 자화상’이다. 또한 메꽃은 ‘꽃님이’가 갈망하는 ‘아름다운 삶’을 암시함으로써 의미의 이중주(二重奏)를 울려준다. ‘메꽃’ 속에 함축된 두 가지 얼굴의 극단적 대립이 오히려 슬픔과 연민의 빛을 더욱 붉게 자극하고 있다. ‘들개미’에 의해 소중한 여성성(女性性)을 유린당하는 ‘꽃님이’도 여느 사람들과 동등한 인격의 존엄성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향유할 권리와 행복을 꿈꿀 자격이 있는 우리의 누이이자 자매이다. 그러나 ‘꽃님이’는 자본의 저울대 위에 올려져 ‘살맛’의 가치를 측정당한 후, 물신(物神)의 노예들에 의해 ‘속살’을 자본으로 환전(換錢) 당한다. 분홍빛이 넘쳐나는 ‘메꽃’밭에서 산노을로 갈래머리를 발갛게 물들이며 소꿉친구들과 함께 수다스런 이야기의 가락에 젖어들던 ‘꽃님이’. 유난히도 눈이 크고 맑았던 그 소녀는 소중한 분신(分身)이었던 ‘메꽃’밭으로부터 멀어져 자본의 사슬에 묶인 마리오넷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가장 행복했었던 유년의 꽃밭을 뒤돌아보며 ‘메꽃’의 끝자락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의 붉은 빛을 모아 그리움의 ‘분홍옷’을 지어 입으리라. 꽃그늘에 앉아 새들의 노랫소리로 마지막 소절을 갈무리하던 어린 ‘꽃님이’의 입술이 그 옛날의 동요를 소중한 유산(遺産)처럼 안겨줄 날을 기다리면서 …. (송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