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기의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7. 클라우스 만
▲ 1949년 자살하기 직전, 생의 마지막 사진 | ||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후인 1933년 3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해 5월 초 분서대상 블랙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나치의
제국에 머물러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두말없이 망명을 떠났다.
망명을 떠나는 이유는 제3제국(나치)을 만천하에 경고하고, 이 정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제국에서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은 독일정신의
위대한 전통을 해외에서 생생하게 보전하고 창조적인 글들의 기고를 통해
독일정신의 위대한 전통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클라우스 만(Klaus Mann:1906~1949)을 생각하면 이러저러한 그림들이 한꺼번에 겹쳐 떠오른다. 우선 독일작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망명 작가다. 그에겐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토마스 만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다. 클라우스 만은 토마스 만의 여섯 자녀 중 둘째고, 아들로는 첫째 아들이다. 하인리히 만이 클라우스 만의 큰 아버지다. 클라우스 만은 이처럼 독일의 저명한 작가집안의 2세다.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가정은 단순히 문필만으로 명성을 날린 집안이 아니다. 소박한 글쟁이들이 아니었다. 문학을 뛰어넘어 20세기 독일의 시대사와 문화사를 대표하는 가족이었다.
토마스 만이나 하인리히 만은 긴 설명할 필요도 없이 20세기 독일문학의 거장이다. 토마스 만의 첫째 딸 에리카 만(1905~1969)은 배우이자 카바레티스트였고, 작가였다. 셋째 골로 만(1909~1994)은 역사학자로 슈투트가르트대 정치학 교수를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 저명한 시사평론가로 이름을 날렸고,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기민당)이나 빌리 브란트 수상(사민당)과 교류했다. 빌리 브란트의 참모로 일했고, 동방정책을 후원했다. 넷째 모니카 만 (1910~1992)은 여류 작가였고, 다섯째 엘리자베트 만(1918~2002)은 해양법 전문가이자 생태학자였다. 막내 미하엘 만(1919~1977)은 음악가이자 독문학자다. 캘리포니아대(UC 버클리) 독문학 교수를 역임했다.
언젠가 영국 외교관 해롤드 니콜슨은 하인리히 만, 토마스 만 가정을 ‘amazing family’라고 표현했다. ‘놀라운 가족’! 그랬다, 만 가족은 천부적인 재능과 소질, 모순과 엉클어짐이 뒤섞인 사람들이었다. 천부적인 재능과 소질을 지닌 이 가족의 일원들이 태생적으로 모순덩어리고 엉클어진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들을 이렇게 몰고 간 것은, 20세기 독일역사가, 20세기 문화사가 모순되고 엉클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기건 간에 명문가 집안은―진정한 의미의 명문가―나라나 시대의 흥망성쇠와 함께 부침하게 마련이다. 시대의 참담함을 막아내지 못하면 목숨을 걸고 시대와 나라를 지켰다. 그렇지 못하면 망명의 길을 떠났다. 야합하지 않고 시대에 편승하지 않았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진정한 의미의 명문가를 기억해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들은 역사와 현실을 진지하게 대했고, 시대와 나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보다도 대의를 중요시했고, 타협보다는 시대의 소리를 거역하지 않으려 노력한 사람들이다.
클라우스 만은 토마스 만의 귀한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내로라하는 명문가 출신에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분이었다. 뮌헨대 수학 교수의 외동딸로 태어나 부유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뮌헨대에서 수학한 최초의 여자 대학생으로 북독일의 명문가 출신 토마스 만과 결혼했다. 친정은 450평이 넘는 건물에 작업하는 서가 이외에 도서실과 음악실을 따로 갖추고 있었을 정도였고, 독일제국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 등 뮌헨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교제를 하는 장소였다. 토마스 만은 독일 시민계급의 몰락과 예술가의 탄생을 그린 소설 『부덴브로크家의 사람들』(1901)로 이미 정평이 나있는 저명작가였다. 약관 25세에 내놓은 작품이었고, 후일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는 북독일 뤼벡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상인에다 한자도시 뤼벡시의 시의원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부유하고 저명한 명문가 집안이었다.
아버지 토마스 만과의 갈등
토마스 만은 아들 클라우스 만이 태어날 때부터 기대가 대단했다. 태어난 바로 다음 날 ‘아주 교양 있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1년 전 클라우스 만의 누나인 첫째가 태어나자 토마스 만은 딸이 태어나서 너무 실망이라며 그의 형 하인리히 만에게 “시적감흥이 풍부한 아들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들이라면 내 대신 더 발전시키고, 새로운 조건에서 다시 시작할 텐데” 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드디어 둘째인 클라우스 만이 태어나자 토마스 만은 자기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쏟아 부어 대문호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기가 부족했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아들을 통해 완성하려고 했었다. 문학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다. 토마스 만은 20세기의 괴테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고, 어느 정도 꿈을 이룬 사람이었다.
클라우스 만은 명문가 집안의 자제답게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였다. 다량의 작품을 썼고 다방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예술적으로는 변화무쌍했고 쉬질 않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깨부쉈다. 평생 동안 너무나 거대한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거리를 둔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는 반대감정이 병존했고, 두 개의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소유했다. 즉 ‘양가성(ambivalence)’의 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클라우스 만은 자기의 출신자체가 인생의 가장 쓰디쓴 문제점이라고 규정지어 생각했다. 작품을 발표해도 다른 사람들은 유명한 아버지와 비교해 말들을 했다. 그저 저명한 작가의 아들이었다. 저명한 작가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아무 선입견 없이 자기의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가 없었다. 클라우스 만은 아버지와 거의 반대로 행동했고 반대로 작품을 썼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양가성의 법칙이 작용했다. 집에서 ‘마술사’라고 불리던 아버지 토마스 만은 후일 큰아들 클라우스 만이 죽자 “진심으로 아들 세대에서는 재능 있는 작가, 아마도 최고로 재능 있는 작가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어머니와 누님 에리카 만과는 평생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24년 18세에 익명으로 첫 작품을 주간지에 발표한 후 계속해서 수많은 작품을 썼다. 희곡도 쓰고 소설도 썼다. ‘한 청소년의 모험 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경건한 춤』 (1925)은 독일문학 최초의 동성애소설이다. 바이마르공화국시절 동성애는 위법이었지만 클라우스 만은 작품을 통해 본인의 동성애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클라우스 만은 어려서부터 동성애자였다. 드러내놓고 동성애를 발휘했고,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옮겨 다니며 동성애를 즐겼다.
이 소설이 발표되자 아버지는 「부부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동성애는 ‘불합리’이자 ‘저주’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1933년에도 클라우스 만은 본인의 작품을 읽으며 ‘정말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정’에 황홀해했다. 나치에게 동성애자는 인간쓰레기였다.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대등하다’는 운동은 1897년 베를린의 의사인 마그누스 히르쉬펠트(1868~1935)에 의해 창립된 ‘학문적-인간적 위원회’에서 유래한다. 1919년 히르쉬펠트는 이 위원회를 노골적으로 ‘성(Sex)과학’연구소로 개명했다. 히르쉬펠트는 동성애는 비행도 병도 아니고, 전적으로 性의 자연스러운 변이이자 인간 실존의 한 가능성이라고 강조했다.
1925년 같은 해 희곡 『안야와 에스터』를 창작해 함부르크 무대에 올렸다. 약혼녀 파멜라와 함께, 그리고 누나 에리카 만과 누나의 약혼자 구스타프 그륀트겐스가 무대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아이들’이 만든 작품으로 유명세를 날렸다. 토마스 만이나 프랑크 베데킨트는 저명 작가였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만은 사실상 바이마르공화국시절 문단의 아웃사이더였다. 작품의 주제들이 그 시대에는 금기시되는 것들이었고, 고작해야 저명한 작가의 아들 정도로만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명을 떠난 후 클라우스 만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나치에 대항해 투쟁하는 작가로 변모했다. 반 나치운동의 선봉에 섰고, 나치신봉자들을 공격했다. 클라우스 만은 1927년에 이미 “논쟁할 필요 없이 나는 히틀러를 반대한다, 처음부터, 무조건, 이러저러한 어떠한 조건 없이”라고 밝힌 바 있다. 1930년 히틀러 일당이 선거에서 부상하기 시작하자 “어제까지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자들이 제국의회 선거의 결과를 환기시켰다”라고 강조한 바 있었다. 클라우스 만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반 나치주의자였다.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후인 1933년 3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해 5월 초 분서대상 블랙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나치의 제국에 머물러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두말없이 망명을 떠났다. 망명을 떠나는 이유는 제3제국(나치)을 만천하에 경고하고, 이 정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제국에서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은 독일정신의 위대한 전통을 해외에서 생생하게 보전하고 창조적인 글들의 기고를 통해 독일정신의 위대한 전통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망명 초반기의 본거지는 암스테르담이었다. 1년 중 대략 5개월 정도 암스테르담에 머물고, 나머지는 파리와 취리히에 체류했다. 취리히는 이 도시에서 멀지않은 퀴스나하트에 부모님이 망명해 머물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프랑스 리비에라,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 런던, 스페인 마요르카 섬 등지를 쏘다녔다. 클라우스 만은 세계 곳곳을 사랑했다. 특히 파리와 뉴욕을 사랑했다. 그 도시 속으로 스스로 도피했다. 완전히 신경과민적으로 존재의 기쁨을 느꼈고, 은밀히 죽음의 욕망에 빠져들었다. 조숙했고 미완성이었다. 도피적이었고 한곳에 빠져들었다. 영리했고 놀기 좋아했다.
잡지 <모음> 통해 블로흐, 브레히트, 아인슈타인 등과 교유
암스테르담에서 프릿츠 란츠호프와 함께 퀘리도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망명 문예 월간지 <모음>을 발간했다. 네덜란드 사회민주주의자인 에마누엘 퀘리도(1871~943)가 세운 퀘리도 망명출판사는 하인리히 만, 리온 포이히트방어, 안나 제거스, 알프레트 되블린, 아르놀트 츠바이크, 에른스트 톨러, 요셉 로트 등 주요 망명 작가들의 작품을 출간했다. <모음>은 문화비판과 정치적 논설을 위시해 소설, 자서전, 시 등을 실었다. 클라우스 만은 이 잡지에서 ‘재앙의 의지 대신에 인간존엄의 미래에 대한 의지’를, ‘야만의 의지 대신에 정신의 의지’를, ‘진실이 아니고, 경련을 일으켜 마비되고 음흉한 중세’를 다룬다고 선언했다. 앙드레 지드, 하인리히 만, 올더스 헉슬리 등의 후원금으로 발행됐다.
잡지 발간을 통해 공산주의자인 요하네스 R. 베혀, 알프레트 칸토르비치, 보수주의자인 요셉 로트,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른스트 블로흐, 베르톨트 브레히트, 무정부주의 성향의 발터 뫼링, 시민 자유주의자인 헤르만 케스텐, 사회주의자인 자인 에른스트 톨러,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를 사귀게 됐다. 그 외에도 앨버트 아인슈타인, 레오 트로츠키, 어네스트 헤밍웨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이 잡지에 기고했다. 1933년 9월부터 발행된 이 잡지는 자금부족으로 총 24호를 마지막으로 1935년 8월 폐간됐다.
클라우스 만은 1936년 퀘리도 출판사를 통해 소설 『메피스토』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를 주제로 한 『비창 교향곡』, 망명객을 소재로 한 『화산』과 더불어 클라우스 만의 3대 소설작품에 속한다. 『메피스토』는 주인공으로 내세운 헨드릭 회프겐이 1926년부터 1936년까지 나치제국에서 출세하는 과정과 주변 인물들을 그린 소설인데 이 주인공은 한때 클라우스 만의 매형이었던 배우 구스타프 그륀트겐스의 삶의 궤적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에리카 만은 1926년 구스타프 그륀트겐스와 결혼했고, 1929년 이혼했다. 그륀트겐스는 1932년 파우스트의 메피스토 역할을 처음으로 했고, 나치집권이후 독일에 남아 1933년 헤르만 괴링에 의해 프로이센 국립극장 예술 지도자로 임명됐다. 헤르만 괴링(1893~1946)은 나치 독일의 지도급 정치가로 1935년부터는 독일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륀트겐스는 1934년 프로이센 국립극장 극장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에는 국가 평의회 위원이 됐고, 1935년부터 1945년 기간에는 프로이센 국립극장 총 극장장을 담당했다.
클라우스 만은 이 작품을 통해 출세만을 위해,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만 싶은, 권력을 거머쥐고 싶은 한 배우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헨드릭 회프겐은 권력 지향적이고,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근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 결과 베를린 국립극장의 극장장에 임명된다. 이 작품을 보며 누구나 실화소설임을 절감한다. 구스타프 그륀트겐스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클라우스 만은 실화소설임을 강력히 부인한다. 자기의 작품은 어느 한 특정인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출세지상주의자들을 반대’하고, ‘정신을 팔아먹고 배반하는 독일 지식인을 반대’하기 위해 썼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식인들은 재능을 지녔기 때문에 보통사람들보다 두 배로 일을 더 사악하게 만든다는 것이 클라우스 만이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단순히 어느 한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상장적인 타입이라는 것이다. 클라우스 만은 『메피스토』를 집필하면서 큰 아버지 하인리히 만의 작품 『충복』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충복』의 작중인물 디더리히 헤스링을 헨드릭 회프겐으로 다시 내세운 것이다. 클라우스 만은 큰아버지 하인리히 만을 존경했다. 나치 지식인이 된 시인 고트프리트 벤을 비판했고, 앙드레 지드를 지식인의 전형으로 모셨다. 그리고 1943년 『앙드레 지드와 현대사유의 위기』를 출간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지식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누구나 다 수용한 줄 알았다. 그렇게 세상이 잘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30년 후 서독의 회프겐과 그륀트겐스들은 이 작품을 스캔들로 삼았다. 법에 저촉된다며 1971년 이 작품을 금지시켰다. 그륀트겐스를 모욕했고, 경멸했고, 비방했다는 것이 첫 번째 내용이었다. 그리고 1933년 이후 독일의 극장에 관한 사실을 망명객 입장에서 잘못 봤다는 것이 두 번째 내용이었다. 이것이 재건된 독일의 정신이었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프랑스 칸느에서 사망
클라우스 만은 다른 망명객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계속했다. 1943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FBI에 감시를 당했지만 미군으로 참전해 1945년 5월 미군 지프차를 타고 고향 뮌헨에 진격해 부모님과 같이 살던 옛집을 방문했다. 그러한 다음 타향이 된 독일을, 로마를, 암스테르담을, 뉴욕을, 캘리포니아를,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안주할 곳이 없었고, 안주하지 못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았고, 책이 출판되지 않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 자살을 시도했다. 클라우스 만은 평생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하지만 세계시민이길 갈망하는 한편 쉬지 않고 글을 썼다. 그는 쉬는 사람이 아니었다. 1949년 5월 21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프랑스 칸느에서 사망했다. 소설 『The Last Day』를 쓰기 위해 온 곳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 에리카 만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강연 여행 중이었다. 1949년 5월 24일 칸느에서 장례식이 거행될 때 가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막내 미하엘 만이 참석해 큰 형을 배웅했다. 그리고 장지 앞에서 베네데토 마르첼로의 첼로 소나타를 연주했다. 조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하인리히 만은 “이 세기가 그를 죽였다”고 했다. 아버지 토마스 만은 “그는 분명히 자기 손으로 죽었고, 시적으로 말하기 위해 시대의 희생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대단한 희생을 치렀다”고 했다. 클라우스 만은 죽기 전날 어머니와 누나 에리카 만에게 “돈이 곤궁하고, 며칠간 비가내리는 울적한 날씨이고, 6월 말쯤 오스트리아에서 뵐 수 있는지를 묻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클라우스 만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토마스 만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젊은 나이에 프랑스 칸느에서 곤궁하고 비참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뒤엉킨 그림을 정리하라고 한다면, 클라우스 만은 독일의 망명 작가, 망명지식인이다. 그리고 어디에고 안주하지 못하고 세계시민이기를, 인간 본성의 길을 갈망한 재능이 풍부한 한 인간이었다. 클라우스 만의 작품은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한참만에야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는 오늘날 대표적인 망명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서장원 독문학자
교수신문 editor@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