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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태준의 삶과 가족사

우또라 2008. 10. 28. 16:26

월북작가 李泰俊의 ‘통곡의 가족사’

김홍균 월간중앙 기자(redkim@joongang.co.kr)


지난해말 남쪽에 정착한 뒤 제2의 작가생활을 시작한 북한의 여류시인 최진이(41)씨. 그는 북한의 작가동맹 중앙위어회 소속 작가로 활동하다 탈북후 한국에 정착한 첫 케이스다.
그는 1998년 7월 탈북한 뒤 중국을 거쳐 99년 11월말 한국에 왔다. 1998년 3월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추방당한 그는 평양을 떠나기 직전 42년 전 숙청당해 평양에서 추방당한 한 작가와 대면하게 된다. 동료 작가가 '작별선물'로 빌려준 한 '비밀일기'에서다. 그 비밀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대학시절 조선문학사 강의때 들었던 "반동작가" 이태준이었다.
"누구에게 보이지 말 것! 큰 화근이 될 수 있음!" 두 권으로 나뉘 일기의 첫장 아랫부분에서는 붉게 밑줄이 그어진 색연필 글씨가 너무나 선명했다.
"진실하다면 가장 진실한 사람에게, 강하다면 가장 의지 강한 사람에게, 선량하다면 이 세상 가장 선량한 사람에게 이 글을 보여드리고 싶다."
두번째장 첫머리에 쓰여진 이 글귀를 그는 읽고 또 읽어 보았다. 이 글은 마치 그에게 어떤 의무를 다해 달라고 하는 말로 들렸다. 밤새도록 일기를 읽어가면서 그는 이 일기가 이태준 선생의 막내딸 이소현(李小賢·1940년생)여사와 맏딸 이소명(李小明·1931년생)여사에 의해 쓰여진 것도 알게 됐다.
군데군데 이태중 선생이 장남 유백(有白·1932년생)등 자식들과 주고받은 편지글들이 들어 있고, 일기의 맨 끝장에는 이택준가의 빛 바랜 가족사진 열여섯장이 그 어떤 역사적 증거물처럼 빼곡이 붙어 있었다.

#1957년 평양

“선생님, 세상엔 망치 든 아버지, 호미 든 아버지도 많은데 나한텐 왜 하필 붓을 든 아버지가 차례졌을가요?”
박팔양(월북시인으로 당시 김일성대 어문학부 교수, 1967년 주체사상 강화기때 숙청)은 유진(有進·이태준의 차남)의 손을 꼭 잡는다.
“아버지 탓하면 못쓴다. 너희 아버지는 보기 드문 재능을 지닌 분이야.”
다음날 이태준의 아들 유진이 한 이 말은 대학 교원촌에 자자하게 퍼진다. 어문학부 선생들은 듣는 사람마다 신통한 문장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것이다.
오누이는 바늘방석에 않은 것 같은 기분으로 강의에 참가한다. 어느 순간에 자기들을 부를지 모른다. 내일이라도 “동무들은 출학(出學)이오”하면 끝장이다. 끝내 그 일이 다가온다. 소남(小楠·이태준의 차녀)이 점심식사를 하고 식당에서 나오는데 (학과)‘소대장’이 찾는다. 대학 교무부에서 부른다고 했다. 소대장은 소남을 교무부까지 데려다 준다. (동생) 유진은 벌써 거기에 와 있다. 교무부장이 오누이에게 입을 열었다.
“동무들은 오늘부터 출학입니다. 퇴거수속을 해 가지고 부모님들에게 돌아가시오.”

#1981년 남포

남포시 건설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각도에서 온 청년 건설자들은 지정된 구역에 천막을 전개하고 건설사업에 착수한다. 도별 경쟁이 붙는다. 치열한 돌격전이다. 땀흘리며 한껏 일하고 식사시간이 되여 천막식당으로 돌아오면 밀가루밥과 따끈한 국이 차려진다. 시큼한 남내를 풍기며 돌격대원들은 저마다 밥을 달게 먹는다. 소현은 자기도 집을 받아 살림하면 이런 가루밥을 실컷 해먹으리라 끼니때마다 다짐했다.
소현은 소련 영화 “공산당원”을 생각해 낸다. 산전막에서 식사하는 사람들 틈에서 들려오는 의미심장한 독백이다.
“사람들이여, 이들을 무심히 보지 마시라. 이런 무명의 인간들에 의해 쏘련 공산주의의 위대한 역사는 시작되였거니.”
소현은 말을 바꿔서 부르짖었다.
“사람들이여, 이 돌격대원들을 무심히 보지 마시라. 가루밥도 이렇듯 달게 먹는 수수한 건설자들에 의해 남포시 건설의 첫 역사가 시작되였거니.”
그는 중간총화에서 혁신자 2등상을 받는다. 큼직한 포장 꾸레미를 받아든 소현의 두볼에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면서 엄마를 부르고 또 부른다.

숙청후 황해도 해주로 추방

'한국 단편의 완성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혔던 이태준의 만년(晩年)의 행적이 안개 속에서 걸어나왔다.
이소현·이소명 두 딸의 일기장을 토대로 한 최진이씨의 증언에 의해서다.
일기에는 이태준의 숙청후 만년 행적들과 두차례에 걸친 ‘평양 추방’으로 인해 벌어졌던 이태준가(家)의 파란만장한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선 일기를 통해 이태준이 1956년 숙청후 황해도 해주로 추방당한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이태준은 숙청과 함께 함경북도로 쫓겨나 함흥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막내딸 소현은 부친에게 주어졌던 혁명화(노동개조) 사업은 황해도일보사 인쇄공장 노동자였다고 적고 있다.
이태준은 또 해주 거주 시절인 1964년부터 중앙당 101호창작실(대남물의 글을 전문으로 취급)로부터 소설 창작을 요구받아 글을 쓰다, 추방 10년만인 1967년 평양으로 다시 복귀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이는 이태준이 숙청 이후 한때 대남 심리전소설을 쓰는 101호창작실의 ‘비밀작가’로 활동했다는 증언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일기는 또 이태준이 1974년경 재차 사상투쟁을 겪은 뒤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됐으며, 그곳에서 뇌혈전으로 쓰러진 부인(李順玉)이 숨을 거둔 뒤 얼마 안있어 없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 일기 내용은 특히 이태준의 사망 연대와 관련해 그동안 제기됐던 1960년대 후반 사망설을 뒤집는 것이어서 특히 주목된다.
최진이씨가 기억을 더듬어 복기(復棋)한 소현·소명 자매의 일기장을 토대로 불행했던 한 지식인의 말로(末路)와 그의 가족사를 하나씩 들추어 보자.

물고기들이 "자유만세!"하고 춤추더구나

이태준의 막내딸 소현은 이태준이 평양에서 추방당해 해주로 내려갈 때 따라간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는 이태준이 평양에서 사상투쟁 무대에 섰을 때부터 어두웠던 해주 시절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목격자중 한사람이다. 일기 내용 가운데 이태준의 자유주의자적 체취를 느끼게 하는 일화는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

평양에서 내려와 벌써 오랫동안 낚시질을 못갔다. 혁명화 내려왔다는 사람이 한가하게 낚시질 다니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이다. 사람들 눈에 띄우면 당장 소문나고 딱지가 더 붙는다. 이태준은 몸살을 앓는다. 부인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새벽식사를 하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태준의 부인은 토요일 저녁부터 밤새 고기 미끼를 만들고 남편의 낚시질 도구를 갖추어 준다. 이태준은 안해가 차려준 조반상을 물리고 휴식일 새벽 네시에 집을 떠난다.
이태준은 날이 새까매져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가방 안에서 손바닥만한 붕어 열댓 마리가 펄쩍펄쩍 뛰고 있다.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소현이가 아버지에게 묻는다.
“이 물고기들이 ‘자유주의자 이태준 이놈!’하고 아버지에게 욕하지 않던가요?”
아버지가 막내딸 귀에 대고 속삭인다.
“물고기들이 가방 안에서 ‘자유 만세!’하고 춤추더구나.”
아버지와 막내딸은 서로 마주보며 티없이 웃는다. 저녁상을 마주한 이태준이 상기된 얼굴로 부인에게 말한다.
“여보, 내 오늘 낚시질하면서 장편소설 제목을 끝내 찾아냈고, ‘혈난’(血亂) 어때? 피의 쟁난이란 말이요, 멋있지?”
온 가족은 아버지의 발견을 적극 지지한다. (이하 본문 가운데 고딕체는 일기를 최진이씨가 재구성한 것)

이태준의 낚시 취미는 월북 전부터 주변 문인들 사이에 소문이 날 정도였고 고향 철원에 있는 ‘선비소’는 이태준이 가장 즐겨 찾았던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태준이 해주 시절에도 낚시를 즐겼던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숙청후 해주로 혁명화를 나와서도 줄곧 소설 작품 구상에 골몰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낚시뿐만 아니라 식도락가적 취향도 글에서 등장한다.

이태준 가정은 늘 금전이 결핍된다. 부인은 부식물 살 돈만 관할한다. 나머지는 이태준이 맡아서 전부 사들인다. 옷장·이불장·식장·집 식구들의 신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분석 선택한다. 이태준은 돈 쓰기를 좋아한다.
또한 음식범절이 까다로와 어떤 음식은 몇도의 열에서 몇분 끓여야 제맛이 나고, 어떤 고기에는 무슨 조미료를 써야 한다는 식이다. 부인은 이런 남편에게 때때로 짜증을 낸다.

일기 내용 중에는 서울시절 이태준가의 일화들도 들어있다. 서울 성북동 시절, 아버지 이태준이 김홍도의 그림 ‘갈과 게’를 구입해와 딸들과 게의 숫자를 헤아려 보기도 했고, 어느날은 병풍, 또 어느날은 왕가에서 쓰던 장롱을 사와 식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던 추억담이 그려져 있다.
이태준은 소중하게 여기던 이들 국보적 문화재들을 나중에 조선미술박물관에 모두 기증했다고 한다.

사상투쟁회의 앞두고 自殺 준비

이태준은 해주로 내려온 직후에도 사상투쟁회의를 거친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그는 도당 지도원으로부터 “남조선에서 간첩 임무를 받고 온 사실을 자기비판때 실토하라”는 추궁을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태준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 없다”고 반박한다. 지도원은 이것이 “조직의 지시”라며 “선생이 우기면 범죄가 더 커질 것”이라고 위협을 가한다. 이태준은 이때 “만약 간첩 임무로 낙착된다면 온 가족이 멸살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번민한다.
이태준이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상투쟁 과정에서 극단적인 결과를 예상하고 자살을 준비한 것과 자식들로부터 편지를 통해 사상성 있는 작품을 쓰라는 독촉을 듣는 대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회의장에서 자신에게 가해질 인신공격, 인신모해, 각종 초언사들… 사상투쟁의 날이 닥쳐온다. 이태준은 집을 나서기에 앞서 팔목 안에 손칼을 집어넣는다. 만일 최하급 인격조차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박해가 가해지면 정맥을 끊고 자살할 결심이다.
그러나 사상투쟁은 생각했던 것보다 극단적이지 않았다. 이태준은 사상투쟁후 별다른 일없이 인쇄공장에 출근한다. 집에 퇴근해 오면 밤마다 글을 썼다. 아들딸들에게서 편지가 연속 날아온다. 이 시대 사람들의 투쟁 모습이 눈에 안 보이는가고 그것을 글로 쓰라는 호소이다.
당초 이태준이 사상투쟁 무대에 오른 것은 그가 정치성 없는 글을 쓴다는 이유였다. 김일성 형상소설을 안쓴다는 것이었다. 과제와 함께 시간도 줬으나 이태준은 번번이 공탕을 친다.
그런 이태준이 하루는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는다.
“나는 작가적 양심과 타협히지 못하겠다. 김일성 소설을 정말 못쓴다. 김일성과 체험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그의 글을 쓴다는 말이냐? 작가가 체험 안하고 쓴 글은 글이 아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를 향해 “이 시대 사람들의 투쟁 모습이 눈에 안보이는가고 그것을 글로 쓰라”고 호소편지를 연달아 보냈던 것이었다.
소현은 아버지가 쓰는 새 작품 내용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는 맏오빠 유백에게 편지로 알려준다. 자기 의견도 엿준다(여쭌다). 유백은 그에 대해 신랄한 분석을 가해온다. 소현은 아버지가 큰오빠 의견을 소화하여 수정한 내용을 편지로 연락한다. 유백은 다시금 냉정한 입장에서 작품을 검토할 것을 요구해 온다.
아버지 이태준의 소설 창작은 가족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현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편지가 누군가에 의해 검열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서둘러 편지 교환을 제지시킨다. 어머니는 평양으로 달려가 자식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편지를 쓰지 못하게 했다.

#유백이

소현과 소명은 일기에서 이태준의 5남매가 겪었던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최진이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정리해 옮긴다.

유백은 아버지 사건으로 군에서 제대했지만 전쟁시기 쌓은 공로가 참작돼 동생들에 이어 김일성종합대에 입학한다. 수학학부에서 공부했던 그는 아버지의 자질을 그대로 이어받아 소설 창작에도 소질을 나타낸다.
유백의 소설 작품들을 읽은 친구들은 그것을 대학 편집부에 투고해 보라고 격려한다. 이에 유백은 힘을 얻어 원고를 편집부로 발송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또 한번의 대난이 일어난다.
그 글을 읽은 편집부는 북조선에서 이렇게 글 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태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원고 발송자가 이태준의 맏아들임을 알게 된 편집부는 이태준이 아들 이름까지 걸어가며 ‘오그랑수’를 쓴다고 단정한다.
그뒤 이태준에게 또 한번의 사상투쟁의 뭇매가 가해졌다.
유백은 김일성대를 졸업한 뒤 한동안 대학출판사(김일성대)에 근무하다가 아버지가 재차 추방된 뒤로는 지방대학 교원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그는 지방대학에서도 일약 ‘천재’로 명성을 떨친다. 그가 쓰는 교수안, 논문들은 일반 교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했다. 주변에서 그에게 결혼을 권하지만 유백은 그때마다 거절한다.
독신으로 생활하던 그는 아버지 이태준과 동시에 자기가 살던 곳에서 없어진다.

#소현이

부모를 따라 해주로 가 중학을 졸업한 소현은 그후 상하수도사업소 노동자로 배속된다. 이태준은 2남3녀 자식 중에서도 유별나게 막내딸 소현을 사랑했던 것 같다.

해주 혁명화 내려갔을 때 일이다. 하루는 자동차를 타고 물동을 운반해 가는 중인데 이태준은 막내딸 소현이 상하수도 사업소 노동자들과 함께 ‘삐또’구멍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가랑비 내리는 속에 장화를 신은 막내딸은 사업소 사람들과 하수도를 쳐내고 있는 중이다.
이태준은 가슴이 쓰려온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여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는다. 두 언니, 두 오빠는 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는데 몸이 제일 쇠약한 막내딸 소현이만 중학교 졸업한 지 수년째 되오도록 상하수도 관리소에서 일하고 있다.

1967년 이태준은 평양으로 복귀했을 때, 소현을 김일성대에 입학시키려고 동분서주했다.
이태준은 평양으로 올라오자 우선 딸부터 대학에 보내고 싶었다. 중앙당에서는 이태준의 제기를 받자 그의 막내딸 소현을 소원대로 김일성대 외문학부에서 공부하게 해준다. 소현은 대학 전기간 공부를 뛰어나게 한다. 소설가 박태원(이태준과 함께 9인회에서 활동했던 작가)은 소현의 번역 실력을 인정해 대학졸업후 그를 번역작가로 추천한다. 소현은 일찍부터 작가생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
그는 다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평양신문사 기자로 취직한다. 신문기자 시절 소현은 대학 동창과 결혼한다. 결혼한 신부는 얼굴에 웃음꽃을 함뿍 피우고 이방저방 달아 다닌다. 첫날 입은 옷을 입은 채 집 안팎을 들락날락한다.
이태준이 어이가 없어 소리친다.
“남의 딸들은 시집가는 날 울고불고 한다는데 넌 좋아서 신바람이 났구나!”
막내딸이 야무지게 대꾸한다.
“신바람나지 안구요. 이 좋은 날 왜 울고불고 해요?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날인데.”
이태준도 허허 웃고 만다.
소현의 남편은 외교부에서 일하는 준수하고 름름한 젊은이다. 이태준은 이런 사위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소현의 앞날에 어두운 먹구름과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다.
이태준 일가에 다시 침울한 기운이 감돈다. 일이 심상치 않다. 또 사상투쟁회의가 열리고 이태준이 다시 걸려든다. 그는 재차 평양에서 추방된다. 이번엔 심심산골이다(강원도). 이사짐 쌀 맥도 없고 밥먹을 기분도 안난다.
막내사위가 고급술 한 병과 명곡 음반을 가지고 이태준가를 찾아온다. 이런 때일수록 기분을 밝게 가져야 한다며 음악도 틀어 놓고 소현에게 안주감도 갖추게 하여 장인에게 술대접을 한다. (중략)
이태준 부부는 곧 평양을 떠난다. 이태준의 막내딸 이소현 부부도 지방으로 다시 추방된다. 소현의 남편은 외교부에서 해임되었다.

최진이씨는 이태준이 평양에서 재차 추방당한 때가 1974년이었다고 설명했다. 김일성대를 나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소현에게 닥친 불행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소현은 당시 남편과 평양에서 평북도로 추방되어 농장원 생활을 해야만 했다.
소현과 남편은 그곳에서도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마주앉아 늦게까지 공부했다. 그의 집 서재에는 외국어로 된 책이 넘쳐났다. 그들에게 재산은 오로지 책뿐이다.
동네사람들은 그들 집을 가리켜 ‘대학생집’이라고 불렀다. 남편은 터밭에 남새를 심어 가꾼다. 부지런히 거름주고 김을 매준다. 그의 터밭은 그 종 수나 관리에서 동네에서 으뜸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터밭 옆을 오갈 때마다 “역시 대학생이 다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2년후 소현의 남편은 더 먼 곳으로 혁명화를 간다. 이때 맏시누이에게서 소현 앞으로 편지가 날라온다. 이혼해 달라는 것이다. 이혼을 안하면 자기는 군관인 남편과도 갈라져야 한다. 자기집 세 아들은 어머니 없는 아들이 된다고 했다. 설복과 강박·위협·애원… (중략)
소현은 결국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신청서를 낸다. 남편과 함께 재판장에 불려가 이혼 동의에 꺼림없이 “예”하고 대답한다. 그는 “아들(임당)은 어떻게 하겠는가”는 재판장의 질문에도 “남편에게 주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들 또한 어머니와 있으면 전망이 꽉 막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막내딸 소현은 두돌 갓 지난 아들과 함께 남편을 빼앗기다시피 이혼을 하게 된다.
소현은 몇달후 더 깊은 산골마을인 임산사업소로 실려간다. 그곳에는 소현의 둘째오빠 유진의 가족이 이미 들어와 있다. 유진은 그곳에서 작업반장, 형님은 유치원 교양원을 맡고 있었다.

#유진이

어려서부터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유진은 천성이 밝고 명랑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이태준이 숙청당한 1956년 김일성대에 재학중이었다. 어문학부를 다니던 유진은 대학 때는 가수로도 활동했다. 음색이 독특하고 기름져 대학서클 공연에서 그의 독창은 대인기였다고 한다. 지금의 아내는 대학시절 그에게 반해 맨몸으로 집을 나와 결혼한 동창생이다.

소현은 노동자합숙소에서 합숙생활을 한다. 그는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하는 오빠네가 부러웠다. 유치원에서 노는 조카를 볼 때마다 임당이 생각으로 몸서리친다. 임당이 아빠로부터 일곱번째 편지가 온다. 또 다시 6개월짜리 혁명화 간다고 한다. 임당이는 엄마 찾느라 밤마다 잠을 못이룬다고 마감에 썼다.
그뒤로 얼마 후 소현은 오랫만에 편지 한통을 받았는데 남편이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혈압이 쫙 오르며 그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이혼후 불면증으로 잠을 못 이루었지만 그런대로 참고 일을 나가 땅을 파왔지만, 이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 오빠가 작업 인원을 점검하다 소현이 안보이자 합숙소로 찾아온다. 소현의 양쪽 눈귀에 투명한 눈물방울이 가랑가랑 맺혀 있다. 오빠는 불덩이인 누이동생의 이마를 짚어 보고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준다.
“소현아, 우린 지금 혁명화 기간이야, 아파도 남들처럼 누워 있으면 안돼.”
그런 소현이 임산사업소를 비우고 40일 동안 건설노력동원을 다녀오자 오빠 가족은 사업소를 떠나고 없다. 소현은 그 뒤로 남포시 건설을 지원, 무려 8년 동안이나 건설지원 돌격대대원으로 활동한다.

소현은 북한이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초 ‘서해갑문’(이전에는 남포갑문으로 불렸다) 건설과 함께 벌어졌던 남포시 건설사업에 돌격대로 선발돼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자랑하는 서해갑문은 1986년 완공되고 소현이 그 건설에 참가한 남포항은 1987년 개항한다.

사라진 소현의 남편

소현의 남포시 건설 돌격대 생활은 8년으로 끝났다. 그는 돌격대 생활을 마치고 다시 임산사업소로 돌아온다.
그에게 어느날은 매파 군이 찾아온다. 60리 떨어진 곳에 노총각이 하나 살고 있는데 선보지 않겠는가는 것이다. 소현은 결국 재혼을 결심한다. 남자 집을 다녀온 소현은 맏언니 소명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언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 찾아갔을 때의 집안 정경과 사람들을 생각하면 되요.”
소현은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소현은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개변시켜간다. 농장일도 이악하게 나가고 집에 오면 염소 기르고 닭치고 돼지 키우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결혼 11년만에 성칼 있는 시어머니가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3∼4년간은 소현이 대소변을 받아냈다. 소현은 남편과 꿀벌도 친다. 살림살이가 부쩍부쩍 는다.

나중에 소현은 맏언니에게 집에 한번 오라고 편지를 보낸다. 소명은 기차를 몇번 갈아타고 버스를 내려서도 60리 길을 걸어 평북도 천마군 신시리에 살고있는 동생을 찾아왔다.
맏언니 소명의 눈에 안겨온 소현은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다심한 여인이었다. 예민하고 감석이고 생기발랄하던 어릴 적 모습은 흔적조차 없다. 밤에는 끙끙 신음소리를 내가며 앓지만, 새벽이면 어느새 일어나 일감을 쥐고 맵돈다.
남편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팽이처럼 돌아가는 안해에게 “맹꽁이 같은 것”하며 핀잔조로 말한다. 남편은 이런 소현을 위해 구렁이를 잡아다 약을 쭤줄 정도로 맘 좋은 사람이다. 남편은 소명에게 “저런 보배덩이가 어데 숨어 있다 나한테 나타났는지 모르겠다”며 싱글싱글 웃는다.
하루는 소현이 언니 앞에 크지 않는 나무함을 하나 내놓았다. 빨간 좋이로 이쁘게 바른 것이다. “언니 이젠 이걸 언니가 건사해 줘, 아이들 아버지가 치웠으면 해.”

나무함 속에는 소현의 일기장, 소현의 결혼식 사진, 첫남편과 임당과 소현이 찍은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태준의 맏딸이 소현의 일기장을 보관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소현은 상념에 잠겨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언니에게 이렇게 말을 이었다.

“언니, 임당이 아빠 그이가 나 일하는 작업소에 한번 왔댔대요. 내가 여기 시집온 지 6개월 후에 말예요. 적위대복 입고 팔에 당 마크를 단 사람이 안경 끼고 와서 이소현이 찾더래요. 반년 전에 시집갔다 하니까 얼마나 멀리 갔는가 묻더래요. 60리 더 가야 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 한참 서서 하늘만 자꾸 쳐다보더래요.
언젠가 TV에 남조선 청년학생 시위투쟁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이가 언뜻 보이지 않겠어요. 난 막 달려가고 싶었어요. 그이는 조국통일 위한 성전에 지금도 잘 싸우고 계실 거예요. 통일 되면 그이는 꼭 날 찾아올 거예요.”
“그래도 너는 일 없다. 그이를 만날 희망이라도 있잖니!”
소명은 자기 남편을 그려 본다. 그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다. 소현이와 같은 꿈을 품을 수 조차 없다. 소현은 아버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내뱉는다.
“언니, 우리 아버진 번호가 맞지 않는 수재였어.”
“그래.”
“언니, 내가 호미자루에 인생을 맡기고 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지?”
“난 아이들에게 문학 안시키겠어. 농사일이 좋아. 일년 땀흘리면 그해그해 결실이 알리잖아. 문학은 일생을 걸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성공할지 말지 모르고….”

#소명이

이태준의 맏딸인 소명 부부는 이태준이 사상투쟁 무대에 서 있을 당시 소련 ○○아카데미야 연구원에 유학중이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아버지 문제로 유학 기한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소명의 남편은 고매한 인격과 실력을 인정받아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임명받는다. 그는 타고난 교육자로 전대학 교원들의 총애를 받는 수재이다.

그는 처제, 처남들을 극진하게 사랑한다. 그에게 고급 만년필이 하나 있다. 소명이 외국 갔을 때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생일날 선물한 것이다. 남편은 그 만년필을 늘 쌍 신주 모시듯 했다. 맏처남 유백이 그 만년필을 부러워한다. 소명의 남편은 그 귀한 만년필을 유백에게 아낌없이 꺼내 준다.
소명은 종알거린다. 줄 것 따로 있지 안해의 선물까지 줘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며칠째 고시랑거린다.
(중략)…장남 유백의 소설사건 때문에 이태준이 사상투쟁 무대에 다시 오르자 소명의 남편은 유백을 불러 나무라기도 한다.
“너 봐라. 학생이 대학기간 공부나 수굿하게 할 게지 무슨 놈의 창작이냐? 너의 그 쥐뿔만한 명예욕이 아버지를 어느 지경에 빠뜨렸는가 봐라. 다른 사람들은 너만큼 재간이 없어 가만 있는 줄 아느냐?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때가 있는 거야. 덤벼친다고 덮어놓고 되는 게 아니야. 이제부터 그런 생각 다시는 하지 말아.”

소명의 남편은 숙청후 추방당한 장인을 끝까지 챙긴다. 이태준이 환갑을 맞은 1964년. 매번 원고료가 나오면 당조직에 바쳐오던 유백이 이번만은 따로 챙겨 아버지 환갑 준비에 사용하려 한다. 매부가 정색을 하고 유백에게 다그쳤다.

“처남이 아직 정신을 못차렸소. 국가보다 제 가족 먼저 생각한단 말이요. 원고료는 나라에 바치고, 가족은 생각지 마오. 오직 당을 위해 일심정력을 다하란 말이오. 아버지 환갑은 집에서 성의껏 차리겠으니 근심 마시오.”
소명의 남편은 완벽한 실력과 군중의 두터운 신망, 고상한 인격으로 장인이 모진 풍파를 겪는 속에서도 대학교원으로 건재했다. 그러나 이태준이 두번째로 혁명화 내려간 뒤 보위부는 그에게 아내인 소명과의 이혼을 강제한다. 그는 이혼후 6개월만에 홧병과 고혈압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소남이

둘째딸 소남은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밖에 나가 놀다가도 우는 애를 보면 한사코 대리고 와 이것저것 쥐어주며 얼리는 성격이었다. 이런 소남을 두고 어머니는 “저 앤 앞으로 불행하겠다”며 우려한다.
소남은 또 언니 오빠 동생들과 달리 소설을 읽기 싫어했다. 소설은 온통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과학자가 된다며 딱딱한 수학, 물리학 책을 늘 손에 쥐고 소설책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전쟁중에 인민군 간호병으로 전선에 나갔던 소남은 집으로 돌아온 뒤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난 담수양어 기사가 되겠어요. 장군님께서 우리나라에 담수양어 할 데 대해 구상하셨거든요. 난 담수양어를 전문 연구하여 내 나라 강 하천마다 물고기가 욱실거리게 하겠어요.”
이런 둘째딸을 이태준은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소남은 김일성대 생물학부에 입학한다. 유진이도 한 대학 어문학부에 들어간다. 소남은 남동무가 생긴다. 제대군인이자 학급 세포비서다. 그는 소남의 동생 유진에 대해서도 보호자 행색을 한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이태준이 반동작가라는 소문이 대학에 퍼져 나가면서 돌변한다.

이태준이 평양에서 쫓겨난 직후 소남과 유진은 모두 교무부로부터 출학조치를 당했지만 대학 학장이 그들을 구제해 준다.
작가 최진이씨는 일기에서 이때 김일성대 학장이 남로당 당수를 지낸 허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당시 김일성대 학장이었던 허헌은 1951년 6월 전란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착오가 있어 보인다.

소명과 유진은 대학에 남았지만 수난은 계속됐다. 학생들은 이렇게 대들기도 했다.
“우리가 이 반동분자의 딸과 같이 공부해야 한단 말이야! 저런 것들 공부시키자고 인민들이 피땀 흘려 대학 건설했단 말이야?”

졸업후 소남은 그의 꿈처럼 평북도 구성시의 한 담수양어장에 양어기사로 배치돼 간다. 일기에는 소남이 이곳 구성시의 담수양어장에 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가 원문 그대로 씌여져 있다고 했다.
이태준은 편지에서 딸에게 ‘일만 일이나 하지 말고 영화도 보고 소설책도 짬히 읽으라고, 처녀로서의 향기 잃지 말라’고 적었다.

이태준이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있을 때 소남은 한 남성과 결혼하지만 아버지가 반동작가로 다시 낙인되자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 6년 동안 폐병으로 죽어가는 남편을 살려놓고 할 일 다했는데 왜 쫓겨난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남편은 매일같이 소남을 구타한다. 보다 못한 마을의 ‘문학청년’이 아내를 구타하는 소남의 남편을 쓰러눕히고 자기집으로 데려간다. 소남의 남편 숭배자였던 그 문학청년은 그후 붓을 꺾는다.
소남은 결국 6개월 된 젖먹이 딸을 남편에게 빼앗기고 이혼하고 만다.
그런 와중에 양어사업소에서도 소남을 해임한다. 이유인즉 사업소 앞으로 ‘1호도로’(김일성 전용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토대가 나쁜 사람을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남은 그후 가구공장에 배치받아 가고 두번째 반려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탄광 노동자였던 남편은 8년만에 갱 안에서 낙반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다시 실려간다. 붓을 꺾고 안전원이 된 ‘문학청년’에 의해 그는 보위부의 한 수용소에서 발견된다. 핏덩이때 빼앗긴 딸이 19세로 성장해 어머니를 찾는다는 소식을 옛 ‘문학청년’에게서 전해들은 소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른 생각 말고 당에서 맡겨준 일을 잘 하라고 하세요.”
소남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긴 뒤 다시 말했다고 한다.
“난 얼마 전에 김일성 동지께서 ‘우리 인민은 위대한 인민입니다’라고 하셨다는 교시를 전달받았어요. 그 ‘위대한 인민’ 속에는 나도 속해 있다고 생각했어요.”
문학청년은 돌아와 소남의 딸에게 어머니 소식을 전해 주었다.

老부부의 말씨름

소명의 일기에 등장하는 만년의 이태준과 부인간의 대화는 이들 부부 사이의 따스한 정을 흠뻑 느끼게 한다. 맏딸인 소명이 옮겨놓은 부모의 가벼운 말씨름이다.

어머니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아버지에게도 곧잘 짜증을 부린다.
“에이, 영감 만나서 고생만 죽도록 합니다.”
이태준은 이런 부인을 곧잘 골려준다.
“아이구, 벽성 골안에 있다 날 만나 때벗이 한 줄이나 아슈.”
부인은 진저리친다.
“원, 두번 다시 때벗다가는 큰 변 나겠수다.”
이태준은 부인을 달래준다.
“여보, 그러지 말고 소명이네 집에 가서 한 보름 있으며 푹 안정하고 오라요.”
부인은 여행증을 신청한다. 여행증이 나오자마자 맏딸네 집으로 훌훌 달아간다. 속으론 다시 안 온다고 벼른다. 그는 딸에게 푸념을 늘여놓는다.
“무슨 영감이 아직도 식성은 까다로워 가지고 요구성 높지, 나 하는 일에 일일이 잔소리지….”
“아버지 그런 줄 아시면 그저 그렇거니 하셔요, 자꾸 이렇다저렇다 하시지 말구.”
어머니는 이틀도 못가 벌써 남편 근심한다.
“그 식성 까다로운 영감이 반찬이나 제대로 해 잡술가, 암만해도 내 가야겠다. 나밖에 그 입 맞춰드릴 사람이 없어.”
보름을 계약하고 왔던 어머니는 3일도 못가 집을 돌아간다.

그런 어머니는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태준의 처 이순옥은 이화여전을 나와 이태준과 결혼한 뒤 남편의 북행을 뒤따라갔다. 일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뒷이야기도 적혀 있다.

이태준의 부인 이순옥은 황해도 벽성군 어느 대지주의 딸로 태어났다. 그가 일전 한푼 없는 문학청년 이태준에게 반한다. 이순옥의 부모들은 혈혈단신 고아청년에게 죽어도 딸을 안 준다고 펄펄 뛰었다. 처녀 이순옥은 결국 말을 타고 집을 뛰쳐나온다. 서울로 올라와 애인 이태준과 끝내 결혼을 이룬다.

9인회 멤버로 1995년 숨진 조용만의 이태준 회상기에는 이태준이 1930년대 중반 장편 “딸삼형제” 등을 발표하면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특히 여성들의 찬사가 폭발적이었던 것으로 적고 있다.
‘당시 이태준이 이화여전 작문 강사로 출강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김활란 총장은 이태준의 인기와 간결하고 명징한 문장에 호감을 가져, 별반 내세울 학력도 없는(휘문고보 중퇴) 그에게 강사 자리를 제공하게 된다.’
딸들의 일기에도 어머니와 김활란 여사의 인연이 등장한다. “딸삼형제”가 대인기를 끌고 있던 때였다.

어느날 아이들은 어머니를 따라 이화여대에 가서 학장 김활란 선생을 보게 된다. 그는 50대 독신여성이다. 결혼 안하고 교육사업에 전심전력해 오는 고명한 분이다. 그의 명성은 국내는 물론 일본·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아이들은 이런 김활란 여사를 끝없는 숭배의 눈길로 쳐다본다.
“어머니, 나도 이담에 크면 시집 안가고 김활란 선생님처럼 여성활동가가 될래요!”
소명이 어머니에게 속삭이자 김활란 선생이 이 말을 듣고 아이들을 타이른다.
“아니다. 사람은 가정이 있어야 한다. 너희 어머니는 나보다 몇배로 훌륭한 분이란다. 너희들은 꼭 어머니를 본받거라.”
딸들은 어머니를 따뜻한 눈빛으로 새롭게 바라본다.

한편의 戀詩

이태준이 두번째로 평양에서 쫓겨나 강원도의 한 탄광지구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을 때 맏딸 소명은 결국 남편과 강제이혼당한 뒤 곧 남편과 사별하고 만다.
보위부로부터 이혼을 강요당했던 남편은 줄곧 버티다 결국 반강제로 이혼하게 된다. 남편은 이혼 직후 급성 고혈압을 앓아 자리에 눕더니 반년만에 숨을 거둔다.
슬픔을 안은 소명이 아버지·어머니가 살고 있는 강원도를 찾는다. 그는 부모 앞에서 실컷 울기라도 하고 싶지만 집에는 어머니가 뇌혈전으로 쓰러져 3년째 병석에 누워 있다. 이런 부인을 이태준은 곁에서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소명이 집에 들어서자 이태준은 어머니 기저귀를 갈아끼우고 기저귀를 빨고 있다. 소명이 이를 대신하려 들자 아버지는 “나둬라, 아무래도 내 손으로 계속 할 일인데” 하면서 만류한다. 이태준은 딸에게 벌어진 일들을 전해듣고는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다짐시킨다.
방으로 들어온 소명의 눈에 아버지가 오랫동안 사용해오는 만년필이 눈에 띈다. 어머니 병까지 간호해야 하는 이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는 그 만년필을 놓지 않고 짬짬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고급 만년필은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것으로 혁명화 내려올 때 한 간부가 그 만년필을 탐내여 달라고 했지만 그를 거절했다 한다.
이미 언어장애까지 와서 떠듬떠듬거리는 어머니를 소명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너언…그래도…누운…물이……나…마 이구나, 나…안…다……마…을라…버…려다.”
입술을 깨물며 오열을 삼키는 소명에게 어머니가 별안간 글쓰는 흉내를 낸다. 급히 종이와 연필을 찾아든 소명은 어머니 얼굴에 귀를 바짝 가져다대고, 어떤 말은 몇번 되물으며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나간다.

불나비

나는 불나비,
불빛을 보고 날아든 불나비
그 불빛 아름다워 내 넋은 취했네
그 불빛 뜨거워 내 심장 달았네
불길이여, 타오르라 더 활활 타오르라
나는 이 몸 이 마음 다 바쳐
너의 불길 더 높이 솟구치게 하리라

이태준이 그 시를 보고 미소짓는다.
“허허, 이 노친이 평생 작가영감 따라다니더니 이젠 제법 문필쟁이 흉내내는구려.”
그런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보다 앞서 숨을 거둔다.

딸들의 일기에서 이태준은 부인이 숨을 거둔 얼마 후 자기 살던 집에서 없어졌다고 적고 있다. 사랑하는 딸들에게조차 ‘비운의 작가’ 이태준의 최후는 오리무중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소명은 지금 나이 칠순이 되었다. 집안에서 막내와 소명만이 남았다. 그의 일가가 겪은 피눈물나는 체험은 늙은 소명으로 하여금 붓을 들도록 추동했다.(끝)

 

이태준은 누구인가

1904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난 이태준은 1927년 7월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시·동화·수필·평론 등 문학의 전 장르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단편소설집 11권, “제2의 운명”을 포함해 13편의 장편 등 총 3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1933년 일제 탄압으로 카프(KAPF) 중심의 경향문학이 퇴조하자 이태준은 순수문학을 표방하면서 ‘9인회’(九人會)를 결성, 순수문학을 이끌었다. 구인회는 이태준 말고도 정지용·김기림·박태원·이상·이효석·김유정 등 기라성 같은 멤버들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비평계의 스타였던 임화는 이런 이태준을 두고 ‘비경향문학이 낳은 가장 큰 작가’로 평가했다. 이태준은 1939년에는 “문장”지를 창간해 편집자 겸 주간으로 활약했고, ‘반영으로서의 문학’보다 ‘기교로서의 문학’을 추구했다. “문장”지 창간호부터 연재를 시작해 4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문장작법의 영원한 고전으로 꼽혔다. 그런 그가 1946년 갑자기 월북하면서 놀라운 사상적 변모를 시도해 문단을 놀라게 했다. 1947년 쓴 “쏘련기행”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월북후 이태준은 한동안 북한 문단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김일성대 교수인 정률은 그를 들어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렀고, “로동신문” 주필 기석복은 그를 위해 조소문화협회 주최 이태준 연구발표회를 수차례 주선해 주기도 했다. 1947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초청으로 중국 대륙을 한달여간 방문, 이듬해 “위대한 새중국”이라는 중국 기행문을 발간(국립출판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문학작품들은 종전(終戰) 이후 남로당­소련파의 몰락과 함께 갑자기 북한 문단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태준은 그동안 몇몇 귀순자들의 증언에 의해 56년 숙청된 후 60년대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957년 평양 추방후 해주 황해도일보사 인쇄공으로 배치, 64년부터 중앙당 101호창작실 ‘비밀작가’로 활동, 67년 평양으로 귀경, 74년 강원도 탄광촌으로 재추방, 그후 행방불명….  

 

<월간중앙> 2000년 11월호

출처 : 세상을 향하여...
글쓴이 : 소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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