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서로 같이 보고 읽으며 토론해 보면 어떨까요?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호모 리터니즈
진보경
나는 빈 칸에 그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한다.‘해당 정보와 일치하는 아이디는 다음과 같습니다.jeonghyuns**’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끝 두 자리는 별표로 표시한다는 설명이 붙지만 나머지 철자는 뻔하다.정현수.그러니까 숨겨진 두 글자는 알파벳 ‘oo’인 셈이다.화면 상단의 비밀번호 찾기로 들어간다.아이디와 이름,주민등록번호,휴대전화 인증번호를 차례로 채운다.마지막으로 새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뜬다.정현수의 보안장치는 너무 허술했다.현실과 가상으로 나누어진 그의 공간.탐사 삼 일째,잠입은 성공적이다.
첫째 날은 집 안을 둘러보고 청소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불청객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냄새였다.숙성이라고 해야 할까,부패라고 해야 할까.여러 소(素)들이 섞여 오랜 시간 묵은 냄새.증발된 삶의 흔적들이 좁은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고여 있었다.음식 냄새,담배 냄새,가구 냄새,하수구 냄새…….그리고 그의 체취.좀 더 강한 냄새부터 잔향까지.모두가 뒤섞여 도무지 구분되지 않는,냄새들의 저장소.금세 두통이 도졌다.발코니로 다가가 창을 열었다.앞 동은 층고가 낮고 뒤쪽은 야트막한 산이 배경인 아파트의 21층.벌거벗고 집안을 활보해도 될 만큼 자유로운 높이에 그는 살고 있었다.발밑으로 솜뭉치 같은 먼지들이 풀풀거렸다.청소기를 돌리고 썩은 음식들을 내다 버렸다.자정이 넘은 시각,음식물 쓰레기통 뚜껑을 여는 남자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둘째 날은 늦잠을 잤다.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는 그의 침구 속에서,나는 배가 고파 눈을 떴다.냉장고 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생수 두 통뿐이었다.주방 수납장에서 라면 몇 봉지를 발견했다.계란도 단무지도 김치도 없이,끓인 라면을 뚜껑에 덜어 두 끼를 때웠다.정현수의 휴대전화를 충전해 전원을 켰다.다행히 잠금 설정은 되어있지 않았다.전화번호 저장함은 텅 비어 있었다.통화목록도 모두 지워져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수신함에 읽지 않은 메일 수백여 통이 쌓여 있다.나는 잠깐 망설인다.메일들을 클릭하는 순간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해.스팸메일이야 그렇다 쳐도,수신 확인은 그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되지 않겠는가.어쩌면 나에겐 그것이 더 나은 일인지도 모른다.우선 광고메일들을 체크해 휴지통으로 보낸다.발신자가 백화점이나 은행,식당,웹사이트 등의 상호로 표시되거나 제목에 ‘대출’,‘오빠’,‘신제품’ 같은 키워드가 포함되어 있으면 무조건 삭제한다.그러고 나니 순수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 듯한 메일 여섯 통이 남는다.지난달에 수신된 두 통은 결혼식과 돌잔치 안내가 제목으로 올라와 있고,한 통은 ‘형 잘 지내요?’로 안부를 전하는 메시지다.네 번째 메일의 제목은 ‘수정 관련사항입니다’,발신인은 ‘한강병원’이다.언뜻 봐선 그의 사적인 일에 관한 내용인 듯싶다.정현수는 유부남이었을까.내용을 살펴본다.안녕하세요.한강병원 원무과 김 대리입니다.제작해 주신 홈페이지에 오류가 발생하여 문의 드립니다.추가로 수정을 원하는 부분도 상세하게 적어두었으니 첨부파일을 참고하세요.비용 관련 협의는 전화로 했으면 합니다.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발신인이 ‘리쉬케쉬’인 메일 두 통을 놓고 고민한다.리쉬케쉬는 실명일까,닉네임일까.‘제목 없음’이 제목인 이 메일은 광고일까,아닐까.얼핏 대부업체 상호 같은 느낌도 든다.인터넷 새 창을 열어 검색어를 입력한다.
요가와 명상의 도시 리쉬케쉬.갠지스 강의 상류에 위치한 히말라야의 관문이다.힌두교인의 성지이므로 이곳에서 푸자를 하고 꽃접시를 띄워 보내며 소원을 빌기도 한다.요가의 본고장이라 수많은 아쉬람과 요가선생들이 있고,비틀스가 구루(guru) ‘마하리쉬 마헤쉬’를 찾아와 머무르면서 더욱 유명해진 도시.장기간 요가와 명상을 즐기고 싶은 여행자에게 최적의 장소이며 금주와 채식의 고장.술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고 100% 채식을 하므로 이곳에서는 달걀조차 먹을 수 없다…….
수행자의 도시에서 온 메일.역시 판단하기가 어렵다.어쩌면 그가 가입한 인터넷 카페나 동호회의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가입한 카페 목록을 열어본다.삼십대 중반의 남자라면 대부분 가입했음직한 성격의 카페들이 주르륵,여섯 개가 뜬다.등산,음악,사진,재테크,여행 그리고 마지막으로 CEO클럽.정현수의 직함은 대표이사였다.회사명은 ‘펨토테크놀로지’.첫째 날,그의 명함에 찍힌 회사 전화번호를 눌러보았다.결번이었다.명함 우측 상단엔 ‘네트워크 솔루션’이라는 단어가 인쇄돼 있었다.회사 도메인을 주소창에 입력했다.웹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떴다.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을 닫게 된 그 회사의 CEO가 정현수였다.한강병원에서 발주를 받은 건 회사를 폐업하기 전이었을까,아니면 이후일까.그가 되기 위해선 그를 완벽히 알아내야 한다.나는 리쉬케쉬에서 온 메일을 열어보기로 결심한다.
수신날짜가 8월 5일인 첫 번째 메일은 사진 한 장과 두 줄의 메시지가 전부였다.
내가 지금 이곳에 머무는 이유에 대해 잊으려고 노력 중이야.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어.요즘 사귄 새 친구를 소개할게.
허름한 골목길,얼룩소 한 마리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는 사진.소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물인지 침인지 모르겠다.
두 번째 메일은 내용 없이 인물 사진만 첨부돼 있다.통통한 체형에 단발머리인 여자는 무표정하다.그렇지만 딱딱하게 굳지 않은,오히려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다.아마도 발신인의 사진 같다.두 통의 메일로는 아무것도 추측할 수가 없다.그녀는 정현수와 어떤 관계일까.수신된 날짜는 10월 17일.내가 그를 발견하기 하루 전에 도착한 것이다.
마른 낙엽을 수북이 덮고 그는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평일 오후의 등산로는 한산했다.매표소 앞 매점에서 김밥과 라면을 사먹고 네 시쯤 오르기 시작한 산행이었다.중년부부 두 쌍과 젊은 여자 한 명,대학생으로 보이는 일행 대여섯 명 정도가 그날 마주친 사람 전부였다.어디서 넘어왔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하산 길이었다.조용한 산길에서 서로 말없이 길을 터주며 걸음을 재촉했다.깔딱고개를 지날 땐 평소보다 심하게 헉헉거렸다.지난밤 과도하게 마신 술과 담배 때문이었다.계곡을 치고 올라온 지 한 시간이 지났다.정상이 눈앞에 보였다.숨이 턱까지 차올랐다.마지막에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담금질하는 건 산행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조금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었다.산속의 어둠은 모든 것을 까마득하게 지워버린다.주변은 물론,시야에서 사라진 길 위에 서있는 내 모습 까지도.검은 하늘과 더 짙은 능선의 경계만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야간산행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당혹감을 넘어 두려움으로 온몸을 굳게 만드는 어둠.나는 산속의 어둠쯤 두렵지 않았다.거의 매일 오르내린 덕분에 눈 감고도 헤칠 수 있는 길이었다.호흡은 가빠도 마음은 더없이 고요했다.등산객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 산.그곳에 있을 때 나는 가장 자유롭고 평등했다.
물든 단풍은 정상 근처에서만 볼 수 있었다.발밑에선 낙엽들이 사각,소리를 내며 부서졌다.가을은 아직 오지 않고 가뭄이 세상을 바짝바짝 말리고 있었다.나는 용변 볼 장소를 찾아 길을 등졌다.널찍한 바위 뒤편에 쭈그리고 앉아보았다.굽이진 길 위로 하산하는 일행이 보였다.소변이야 대충 돌아서서 금방 끝낼 수 있지만 엉덩이를 까고 앉아야 하는 일은 더 은밀한 장소여야 했다.아래쪽은 급경사였다.다른 길을 찾아볼 여유는 없었다.나는 내리막 경사를 따라 미끄러지듯 뛰었다.이 정도면 됐다 싶은 곳에 바지를 내리고 앉았다.어느새 파리들이 다가와 윙윙거렸다.
발끝으로 낙엽을 모아 용변을 덮었다.역시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냄새가 심했다.시큼하고 들큼하고 구렸다.손가락으로 코를 싸쥐고 발로 계속 낙엽을 찼다.사위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대충 정리를 끝내고 비탈길을 오르던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누가 불러 세운 것 같기도,알 수 없는 신호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내가 앉아있던 주변을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내려다봤다.불룩하게 솟은 무언가가 보였다.바위도 아니고 흙도 아니었다.나는 슬금슬금 내려가 다시 그 자리에 섰다.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수북한 낙엽 사이로 푸른 옷자락이 보였다.손바닥으로 낙엽을 헤쳤다.역한 냄새가 훅 끼쳤다.푸른 상의에 검은 바지 차림의 누군가가 엎드려 있었다.그의 등에 손바닥을 댔다.차가웠다.이봐요.나는 푸른 옷의 오른팔을 들춰보았다.표피가 터질듯 부풀어 오른 파리 유충들과 딱정벌레 무리가 굼실거리고 있었다.
요동치는 마음과 달리 나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불현듯 오한이 들고 온몸이 떨려왔다.나는 망설였다.그냥 모른 척 되돌아가고 싶었다.후들거리는 발이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휴대전화를 꺼내 ‘119’를 눌렀다.깊은 계곡 안이라 통화불능이었다.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 통화를 시도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조금만 기다려요.그 말은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천천히 몸을 움직여 일을 진행했다.구조대원들이 발견하기 쉽도록 그를 덮은 흙과 나뭇가지,낙엽들을 옆으로 치웠다.벌레들이 놀란 듯 꼬물거렸다.파리들이 머리 위를 맴돌았다.냄새 때문에라도 더는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현장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려던 그때,또다시 무언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그의 바지 뒷주머니 위로 반쯤 삐어져 나온 지갑.
나는 침착하게 등산장갑을 손에 꼈다.
어차피 이 사람에겐 소용없는 물건 아닌가.발견한 구조대원이 유족들을 수소문해 돌려줄 수도 있겠지.하지만 나와 같은 누군가가 이것을 먼저 발견한다면…….장갑 낀 손으로 지갑을 빼냈다.몇 장의 카드와 신분증,현금은 십만 원도 채 안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내 의도와 상관없이 유예된 삶에서 벗어날 방도를 궁리 중이었다.좀 더 잘살기 위해 선택한 길인데 어쩌다 보니 한가운데 갇혀버린 채 덜컥 문이 닫혔다.세상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사람들 또한 그랬다.서른 살 넘은 무직자인 나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어릴 적 친구들뿐.누구도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나는 이제껏 그 흔한 연애조차 못 해봤다.더 나은 모습으로 더 좋은 상대를 골라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는 없었고 그런 내가 적응할 수 있는 집단이나 장소 역시 없었다.하지만 그건 명백히 내 잘못이 아니다.나는 열심히 노력해 왔다.단 한 번도 샛길로 빠져보지 않은 그야말로 모범생이었다.그렇다 해도 나를 그럴듯하게 돋보일 수식어가 없는 한,내 삶은 유예 중인 거였다.이제 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전면적인 궤도 수정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벌써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집마련을 목전에 두고 있는 또래들을 보면 더욱 극심한 절망감에 빠졌다.그렇다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오던 길 계속 가는 것도 불안하고 새 길을 찾아내는 것 역시 자신 없다.나는 내 인생의 판을 새로 짜고 싶었다.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갑에서 현금 대신 신분증을 꺼냈다.아이 손바닥만 한 작은 플라스틱 판 안에 그의 정보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이름은 정현수.나와 동성(同性)이고 나보다 한 살이 많다.뿔테 안경에 회색 스웨터 차림의 증명사진 속 그는 나이보다 조금 더 늙어 보였다.주소지는 서울의 남쪽 신도시에 위치한 아파트…….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이제껏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생각이,그야말로 섬광처럼 떠올랐다.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댔다.아니다.그것은 전부를 버려야 가능해지는 일이다.지금까지의 나,나의 생활,인간관계,과거 행적까지 모두.
그럴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순식간에 처리됐다.‘그럴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결단은 내리지 못한 채였다.나는 내 지갑의 신분증을 꺼내 그의 것과 맞바꿨다.신용카드 한 장과 그의 명함도 몇 장 챙겼다.현금은 건드리지 않았다.주머니에 지갑을 원래대로 꽂아두었다.오른쪽 앞주머니를 더듬어 휴대전화와 열쇠꾸러미까지 갈취했다.딱딱한 그의 골격이 손가락에 닿았다.헤친 낙엽과 흙을 다시 그의 몸 위에 덮었다.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깜깜한 그곳을 어떻게 등지고 하산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가을밤,산중의 바람은 차가웠다.땀에 젖은 바지가 다리에 자꾸 휘감겼다.어지러워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주저앉았다.멀리서 매점 불빛이 반짝였다.내 삶을 최초로 이탈하는 순간이었다.
두 통의 메일로 봐선 정현수와의 관계를 가늠하기가 어렵다.현재 인도에 머물고 있는 여자는 두 달 간격으로 소식을 전해왔다.그것도 너무나 간략하게.여자의 이전 소식을 알 수 있을까 싶어 메일 보관함을 뒤졌다.정현수가 따로 보관 중인 메일은 없었다.휴지통마저 텅 비어 있었다.그는 관리가 철저하고 주변정리가 깔끔한 사람이었다.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들은 폴더 별로 분리되어 탐사하기가 수월했다.‘사진방’ 폴더를 클릭한다.날짜 및 장소별로 지정된 폴더 안에 인물 사진은 그의 독사진 몇 장뿐이다.나머지는 모두 풍경사진.내친김에 앨범을 찾아보기로 한다.서랍과 책꽂이,장식장,심지어 다용도실까지 뒤졌지만 그 흔한 졸업앨범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그는 누구일까.나는 갑자기 불안해진다.그를 빌리기로 결심한 이후 가장 걱정되는 점이 그의 인간관계였다.휴대전화에 저장된 이름과 통화목록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용기를 내지 않았던가.그러니 오히려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그래도 설마 했지만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최소한의 관계인 가족조차도.모든 인연에 무관한 그의 삶이 어쩌면 의도에 의한 것은 아닐까,궁금해진다.
사흘간의 탐사 끝에 비로소 나는 그가 되어 사는 일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아파트 정문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아 상가 식당에서 백반을 사먹었다.식사 후엔 동네 주변을 산책했다.나는 정현수 대신,아니 정현수가 되어 거리를 쏘다녔다.그의 옷은 내게 헐렁했다.살을 좀 찌워야 하지 않을까,나는 잠시 고민했다.키는 더 늘일 수 없으니 소매와 바짓단을 줄여야 할 것이다.거대한 체구와는 다르게 정현수는 심플한 취향을 가졌다.살림살이 역시 단출했다.옷장,침대,컴퓨터 책상,주방가구.거실엔 한쪽 벽을 책장으로 채웠을 뿐 마땅히 갖춰야 할 티브이와 소파가 없다.드문드문 꽂혀 있는 책들은 대부분 IT와 경영관련 서적이고 간간이 ‘줄리아나의 리더쉽’,‘협상의 원포인트 레슨’ 같은 처세 관련 책들이 눈에 띈다.옷장 서랍 밑바닥에 통장 대여섯 개가 나란히 깔려 있었다.모든 공과금은 정해진 날짜에 자동이체로 빠져나갔다.그는 통장마다 맨 앞 장 귀퉁이에 연필로 비밀번호 네 자리를 적어두었다.잔고는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관계없음’으로 인한 정현수의 삶은 외로웠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익숙한 내게는 무척 다행한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이던 때 엄마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엄마는 늘 내게 말했다.명심해라.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걸.아버지와 결혼할 당시 엄마는 항공사 승무원 시험 최종합격을 앞두고 있었다.사랑에 빠져있던 엄마는 결혼을 선택했고 그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어긋난 거라고.그때 내가 승무원의 길을 택했더라면…….평생을 잊지 못할 아쉬운 선택에 엄마는 탄식했다.그건 모르는 일이죠.그 길에서 또 어떤 일이 엄마를 어긋나게 했을지.어쩌면 지금보다 더 참혹했을 수도 있어요.나는 혼자 중얼거렸다.알밤을 맞을 일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의 고귀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믿는 일이,원래 주어진 참혹한 삶을 인정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였다.
졸업 후 여기저기서 취업 제의가 들어왔다.금융권의 계약직 사원으로 취직한 동기들이 앞다퉈 나를 데려가려고 나섰다.나는 공인회계사 시험에 이년째 낙방 중이었다.마음만 먹으면 중소기업 정규직 자리도 널려 있었다.서른이 넘도록 용돈을 타 쓰는 일이 괴로웠던 나는 솔깃했다.하지만 엄마가 고집을 부렸다.출발점이 어디냐에 따라 네 인생이 달라지는 법이야.지금 그렇게 아무 곳에나 들어가면 너는 평생 그 좁은 바닥에서 푸드덕거리다 끝날 게다.어려워도 더 넓고 깊은 물에 뛰어들어야 해.나중에 후회 없으려면 엄마 말 잘 들어라.그렇게 삼 년이 더 흘렀다.취업문은 좁아졌고 동기들은 제 밥줄 잡고 있기도 힘겨워했다.엄마는 내가 큰 물에 몸을 던지는 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리고 나는 지금 첫 단추를 새것으로 갈아치웠다.
받은 편지에 대한 답신을 보낸다.기쁜 날 참석 못해 미안하다.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당분간 메일로만 연락이 가능할 것 같다.안부를 물어온 정현수의 후배에게도 마찬가지 내용이다.리쉬케쉬의 여자에게는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마지막으로 한강병원 김 대리에게 짧은 메시지를 적는다.보내주신 수정안 잘 받았습니다.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 마감이 겹쳐 당장은 진행이 어렵습니다.조금만 말미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며칠 후에 전화 드릴게요.
H은행 통장정리기 앞에서 한참을 기다린다.입출금 명세를 기록하는 기계음이 찌익 찍,지루하게 이어진다.다른 은행에 비해 시간이 길다.인쇄되는 내용이 많은 걸로 보아 이곳이 정현수의 주거래은행인 모양이다.답신을 보낸 다음날 전화가 걸려왔다.정현수의 휴대전화가 울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받아야 하나,말아야 하나.벨소리는 길게 이어졌고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잠시 후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한강병원 김 대리입니다.유지보수비 외에 수정비용을 따로 지불해드려야 할까요.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응답을 하지 않으면 또 전화가 걸려올지도 몰랐다.나는 간단히 답신을 보냈다.그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투입구에서 빠져나온 통장을 받아 살핀다.한강병원으로부터 매달 일정금액이 입금되고 있었다.김 대리가 말한 유지보수비,프로그램에 대한 사후관리비쯤 되는 것인가.그러잖아도 잔고가 떨어져 걱정하던 참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발신번호를 확인하고 수신버튼을 누른다.네,정현수입니다.나는 또박또박,이름을 밝혔다.웹마스터 P가 인사말도 없이 웅얼거린다.
“요청하신 작업은 사흘이면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아,예.그렇게 처리해 주세요.”
“결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지갑에서 정현수의 신용카드를 꺼내 일련번호 열여섯 자리를 불러준다.
홈페이지 수정작업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정현수의 실력까지 덮어쓸 순 없었으니까.김 대리에게 답신을 보낸 후 컴퓨터에서 ‘한강병원’ 폴더를 찾아냈다.나로서는 알 수 없는 파일들만 수두룩했다.집에서 가까운 홈페이지 제작업체를 찾아가 기존 프로그램의 수정과 보완이 가능한지를 물었다.담당자는 원본 파일들을 가져오라고 했다.집으로 돌아와 저장장치에 파일을 복사했다.그리고 어제 그것들을 P에게 건네주고 왔다.
지하철 역 입구에 서서 잠시 고민한다.오늘 저녁으론 무얼 먹을까.내가 살던 집 근처엔 할머니 혼자 삼십 년 넘게 꾸려온 순댓국집이 있다.좁은 공간에 테이블 여섯 개가 전부여도 끼니때가 되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맛 소문이 났다.요즘 자꾸 그 맛이 당긴다.정현수의 집으로 가는 길과 순댓국집으로 가는 길은 서로 반대 방향이다.어떻게 할까.주변을 무심히 둘러본다.길 건너 환한 불빛,‘병천○○순대’ 체인점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횡단보도 쪽으로 몸을 돌려 걷는다.어쩌면 할머니 순대를 다시 먹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진다.내 안에 축적된 기호와 습성들을 완전히 지울 방법은 없을까.나는,정현수니까.
온라인 원격교육 사이트에 로그인한다.첨삭해야 할 리포트가 다섯 개 올라와 있다.통신교육업체의 수강생들이 문제지를 풀어 올리면 그것을 채점하는 일이 나의 몫이다.각 과정별로 교재는 무료로 제공된다.나는 그 교재를 읽고 함께 제공된 답안지를 참고삼아 점수를 매긴다.의뢰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완료하면 되는 일이다.딱히 어렵거나 촉박하지도 않다.외부활동 없이 집에서 책을 읽고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된다.대신 보수는 적다.리포트 한 건당 삼천 원.그럭저럭 웬만큼만 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을 것 같다.
며칠 동안 인터넷 취업사이트를 돌며 일을 찾았다.남은 잔고와 한강병원에서 입금되는 유지보수비로는 관리비와 공과금 납부도 빠듯했기 때문이다.앞으로 생존에 관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정현수의 떡고물을 축내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결과물을 보고 김 대리는 아주 만족해했다.이번에는 그의 전화를 피하지 않았다.윗선에서 따로 비용지불은 어렵다고 합니다.대신 제가 술 한 잔 사도록 하죠.
수강생의 이름을 클릭하고 점수 칸을 채운다.참고가 될 만한 사항은 교재에서 발췌해 따로 코멘트를 달기도 한다.객관식과 주관식 문항에 꼼꼼히 답을 단 사람들에게서 성실한 삶의 태도가 느껴진다.대부분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이다.교재 내용은 직장 내 소통과 개인적인 성공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회사 내에서 상사가 지켜야 할 점,동료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설득과 대화의 심리학…….틈틈이 다른 일자리를 더 알아봐야겠다.언제까지나 방구석에 처박혀 지낼 수만은 없다.정현수의 전공과 이력이라면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그러기 위해선 공부도 많이 해야 하겠지.새로운 영역을 배우는 일,마음이 설렌다.그리고 상황이 된다면,아니 무엇보다 먼저,연애를 하고 싶다.
“선배님,오랜만입니다.”
몸집이 작고 다부진 체구의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나는 한강병원 로비의 회전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김 대리와 만나기로 약속을 정해놓고 전전긍긍했다.지난번 빚진 거 갚아야죠.정 선배님 얼굴도 보고 싶고,한 잔 사겠습니다.처음엔 핑계를 대며 몇 번 거절했다.서슴없이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그가 정현수의 어느 시절 후배인지,그저 의례적으로 사용하는 호칭일 뿐인지,알아낼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무작정 미루고 있는 것도 불안했다.세 번째 전화를 받았을 때 어쩔 수 없이 수락을 한 거였다.나는 최대한 정현수처럼 보이도록 치장했다.사진 속 그의 것과 비슷한 뿔테안경을 구입했다.옷장에서 가장 낡은 옷을 골랐다.낡은 것은 오래 묵었다는 증거 외에 그만큼 애용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두툼한 회색 니트를 꺼내 입었다.키높이 구두를 신었더니 바짓단을 접지 않아도 되었다.
“작년 봄 제작 회의 때 뵙고 이번이 두 번째네요.살이 좀 빠지신 것 같습니다.제가 기억하는 선배님 첫 인상은 꽤나 듬직한 체격이었는데요.허허.”
당혹스런 속내와 달리,나는 머쓱하게 웃었다.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거리며 익어간다.김 대리가 잔을 든다.
“과묵한 건 여전하시네요.”
선후배 사이긴 해도 두 번째 만남이라고 하니 저쪽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취기가 오르면서 분위기는 조금 부드러워졌다.티브이에서 저녁뉴스가 방영되고 있지만 취객들의 소음에 뒤섞여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다.화면과 자막을 흘끔거린다.불콰해진 김 대리는 말이 많아졌다.이 나라 국민치고 내일이 불안하지 않은 사람 없습니다.침체의 늪에 이제 막 첫발이 빠졌을 뿐인데요,자신이 어떤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요.저희 병원도 감원의 칼바람이 언제 휘몰아칠지 몰라 매일 살얼음판입니다.나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동조와 연민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따끈한 온돌 방바닥에 엉덩이를 지지며 우리는 조금씩 노곤해졌다.
“그런데,신 선배는 아직 연락 없어요?”
우물거리던 입놀림을 멈추고 그를 건너다본다.기어이 우려하고 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그는 정현수와 사적인 관계였다.둘의 공통분모,신 선배라니.
“아직…….”
“참,세상 일 알 수 없고 믿을 놈 아무리 없다 해도 어떻게 신 선배가 그럴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이쯤에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야 할까.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면 곤란한데.
“정 선배님이야,회사 일로 알게 됐지만 신 선배하고 저는 수업도 같이 듣고 꽤 가까웠거든요.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고요.”
그가 고기와 술을 추가로 주문하고 담배연기를 후,뱉으며 말을 잇는다.
“선배님 많이 드세요.형수님 소식도 들었습니다.지난여름 동문 모임에서요.어딘가로 떠나셨다면서요…….혼자서 얼마나 힘드세요.”
나는 점점 궁금해진다.신 선배라는 사람은 정현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정현수의 아내는 누구이며 어떤 이유로 그에게서 떠난 걸까.혹시 리쉬케쉬의 여자일까.이대로 묵묵히 김 대리의 말을 듣고 있어도 괜찮으리라.아마 정현수였더라도,지금의 분위기에선 그랬을 것이다.그의 몸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린다.
“이게 다 신 선배 때문 아닌가요?그 사람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동업자이기 전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들었습니다.자기 혼자 잘살자고 그런 짓을 하다니요.결국 경쟁사만 좋은 일 시키고,회사 문 닫고,자기는 도망쳐버리고,친구도 잃고,이게 뭐예요.어떻게 정 선배한테 그럴 수 있냐고요…….”
풀썩,김 대리가 옆으로 쓰러진다.불판 위에선 까맣게 눌어붙은 고기조각이 오그라들고 있다.
김 대리의 말을 정리해 보면 신 아무개와 정현수는 절친한 친구이며 동업자였다.그런데 신씨가 정현수를 배신하고 회사를 닫게 만들었다.이후 정현수의 아내가 그의 곁을 떠났다.
만취해 그대로 잠이 든 그를 힘겹게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선배님 잘살아요.김 대리가 눈을 꿈뻑이며 중얼거렸다.나는 그의 등을 두어 번 다독이고 택시를 잡았다.
메일함을 연다.리쉬케쉬에서 메일이 도착했다.‘회귀’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삶의 의미를,내가 사는 이유를 찾아내고 싶어 떠나온 지 벌써 이 년이 지났어.나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이 내가 찾아낸 정답이라면 당신은 아마 웃을 테지?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살아야겠어.다시 나로 돌아가 내 삶을 찾는 것이 방법일 거야.이곳에서의 삶도 그곳과 별반 다르지 않더라.사람 사는 모습은 엇비슷하고 어디에 머물든,어떻게 살든,나는 그저 나일 뿐이더라고…….당신 많이 보고 싶다.
여자의 도착 예정일은 11월 28일이라고 했다.앞으로 일주일 후면 그녀는 정현수를 찾아 이곳에 올 것이다.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연은 무엇일까.나는 그녀를 맞이해야 할까,피해야 할까.그렇게 되면 나의 일생일대 프로젝트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삶을 원했던 이유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 때문이었다.나는 무능한 사회부적응자였으니까.새로운 길을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기가 어려웠다.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모두 접고 다른 일을 시작하기에 나는 너무 많이 와버렸기 때문에.한 번만 더,이번엔 되겠지.미련을 쉽게 접을 수 없었다.모든 것을 내 손으로 허물어야 하는 일이 아직은 자신 없다.그곳으로 돌아가 다시 내가 된다면 똑같은 고민과 패배감에 휩싸여 매일 산에 오르는 일만 반복할지 모른다.나는,나로 사는 것이 두렵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멍하니 바라본다.우측 선반 맨 위,낯익은 제목이 시야에 들어온다.만년수험생으로 타 분야 서적을 읽을 시간이 없던 내게 친구 녀석이 선물해줬던 책.‘잠깐 머문 곳도 내게는 고향’이라는 인상적인 구절이 떠오른다.의자를 놓고 올라가 그것을 꺼내든다.툭.발밑으로 무언가 떨어져 내린다.누런 서류봉투가 반으로 접혀 있다.도톰하다.책을 내려놓고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낸다.
모두 같은 장소에서 찍힌 수십 장의 사진이다.리쉬케쉬의 여자와 정현수.새하얀 예복을 입은 그들은 행복해 보인다.그와 그녀가 공유했던 삶의 윤곽…….봉투와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두고 쫓기듯 도망치듯 나는 밖으로 뛰쳐나온다.정현수 당신,고작 이런 거였어?그를 빌리기로 작정했던 순간 내가 바라던 상황은 이런 게 아니었다.적어도 나보다 나은 인생일 거라 믿었는데…….이런 삶을 나더러 어떻게 살아내라고.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뒷산을 오르고,다시 내려와 걷는다.인도를 따라 무작정 뛰고 헉헉대며 걷다가 호흡이 잦아들면 다시 뛴다.어느 방향이든 상관없다.지극히 외롭고 무거운 그의 삶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정현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지 모르겠다.그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였을까.어쨌든 그는 실족하지 말았어야 했다.그렇게 마침표를 찍은 삶을 내가 이어 사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이것은 무늬만 다른 삶 외에 어떤 뜻이 있는가.지금의 삶이 차곡차곡 쌓여 미래가 되고 어느 지점쯤에 다다르면 나는 또 새 판을 짜고 싶어질까.
리쉬케쉬의 여자처럼 나도,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옷장 안 깊숙이 넣어두었던 등산복을 꺼내 입는다.두꺼워진 허리에 바지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다.허리띠 버클을 조정해 간신히 채운다.배낭을 메고 그의 신분증과 휴대전화,신용카드와 명함,열쇠꾸러미를 주머니에 넣는다.현금카드,통장,그동안 사용하던 물품들은 모두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마지막으로 현관에 서서 집안을 둘러본다.돌아온 그의 여자가 낯선 흔적을 발견할 수 없길 바라며.
어둑해진 산길을 천천히 오른다.사각거리던 낙엽들이 어느덧 수북이 쌓여 발목을 푹신하게 감싼다.오랜만의 산행이라서일까,무거워진 몸 때문일까.걸음이 쉽지 않다.리쉬케쉬의 편지 내용이 떠오른다.다시 나로 돌아가 내 삶을 찾는 것이 방법일 거야.나는 그저 나일 뿐이더라고.새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남의 인생을 덮어쓰는 일,그것은 결국 누구의 삶도 아니었다.과거를 버려둔 채 현재의 나를 바꿀 수는 없는 거였다.그런데 길이 낯설다.그날 내려왔던 그대로 마른 계곡을 따라 길을 잡았는데 이쯤 나타나야 할 바위가 보이지 않는다.하산 길 이정표를 지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는데.
이정표 지점부터 다시 시작한다.부쩍 떨어진 기온에 으슬으슬 한기가 든다.그를 다시 만나야 하는 일이 내키진 않지만 내 자리로 돌아가려면 이곳을 꼭 거쳐야 한다.빌린 물건을 돌려주고 맡긴 내 물건도 되찾아야 하니까.이제 회계사 시험공부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다시 나로 돌아가 모든 것을 엎고 새 삶을 시작할 것이다.조만간 납골당의 엄마에게 인사드리러 가야겠다.발걸음이 빨라진다.계곡 깊이 내려앉은 어둠에 더 이상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다.랜턴을 켠다.십여 미터 전방에 그날의 바위가 보인다.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다.
바위 뒤를 돌아 내려선다.낙엽더미에 무릎이 푹,빠진다.벌레도 냄새도 거의 사라졌다.춥고 건조한 초겨울의 바람 덕분이리라.발견 당시 유충들의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던 정현수.죽음 이후의 삶은 이곳에서 더 의미 있고 유용했을지 모르겠다.장갑을 끼고 낙엽을 헤집는다.정확한 지점이 어딘지 헷갈린다.앉아 있던 자리 주변을 몇 군데 파헤친다.다시 몇 걸음 옮겨본다.일어서서 발로 바닥을 굴러본다.어느 지점쯤,돌출된 나무뿌리를 밟은 듯 딱딱한 느낌.자리에 앉는다.장갑 낀 손으로 그곳을 더듬어 굴곡을 살핀다.머리끝까지 소름이 돋는다.잘 있었어요…….나도 모르게 울컥,감정이 솟는다.
수분이 빠져나간 그의 둔부는 아래로 쑥 꺼져 있다.지갑이 꽂힌 자리만 조금 도드라질 뿐.나는 챙겨온 정현수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낸다.먼저 휴대전화와 열쇠꾸러미를 그의 바지 앞주머니에 밀어 넣는다.어쩐지 이전보다 헐렁해진 느낌이다.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낸다.휴대전화의 감촉이 손끝에 와 닿는다.채우고 흐르던 내용물이 사라지고 지지대만 남은 그의 몸.갑자기 누군가 머리칼을 잡아챈 듯 정수리에 극심한 통증이 인다.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펼쳐 신분증을 교환한다.꽂혀있던 내 것을 꺼내고 가져온 그의 것을 쑤셔 넣는다.그리고 재빨리 지갑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둔다.
모든 것은 끝났다.이제 나는 돌아가 내 삶의 새 판을 짤 것이다.그럼,잘 있어요.인사를 마치고 신분증을 내 지갑에 꽂는다.그런데 뭔가 이상하다.손끝에서 느껴지는 낯선 이물감.신분증을 다시 꺼낸다.바닥에 두었던 랜턴을 집어 그것을 비추어 본다.경련으로 요동치는 내 손바닥 위의 이것은……,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의 주머니에 있던,내가 꺼낸 신분증에 기록된 낯선 사진과 정보.이름 한재우.주민등록번호 690125…….
무릎이 꺾인 듯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그의 지갑에 넣어두었던 내 신분증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정현수가 보관하고 있어야 마땅할 내 물건.대체 누가 나와 똑같은 짓거리를 한 걸까.여기 이렇게 얌전히 엎드려 있는 이 사람은……,누구인가!나는 거칠게 그를 뒤집어 가슴팍을 움켜 일으킨다.
손에 들린 파란 등산복 밑으로 우수수,무언가 떨어져 내린다.
심사평 - 균형감각·적확한 표현 등 당선작가 성장 가능성 커
본심에 올라온 소설 작품은 모두 10편이었고,본심 심사위원 두 사람은 이 작품들을 함께 읽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 당선작을 결정했다.우선 소설의 기본적인 골격,곧 스토리 라인의 설득력이나 구조적인 짜임새,그리고 이를 부양하는 문학적 표현력 및 문장력 등을 좋은 작품의 판단 근거로 했다.
▲ 작가 현길언(왼쪽)씨와 문학평론가 김종회씨가 2009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검토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과감한 실험적 제재나 새로운 형식의 얼개를 가진 작품이 있는지 눈여겨보았으나,그러한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예심 통과작 10편은,거의 모두가 영상 세대 또는 인터넷 세대의 특징적 면모를 반영하고 있었고,등장인물의 일상 생활 서술에서는 물론 집중된 관심사나 직업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현상을 보였다.동시에 그와 같은 시각은,삶을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기보다는 일회적이고 치유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비극적 세계관을 형성해 놓았다.
이 점은 심사위원 두 사람이 모두 절감한 대목이었다.삶의 목적과 방향성의 부재,태연한 어조로 서술되는 엽기적 상상력 등의 소설 문법은,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다는 건실한 문학관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물론 문학이 세태의 교사가 아니지만,그 근본에 잠복해 있는 인간애나 상호 소통의 정신이 아쉬웠다는 뜻이다.
본심에서 최종까지 남은 세 작품 중 이현주의 ‘헤라클레스’는 보기 드물게 2인칭 시점을 도입하고 탈북자,성인용품 등 유다른 소재를 과감한 이야기 구성 가운데 차입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나,그 말미가 너무 급박하고 괴기한 느낌을 주었다.채근병의 ‘지구인공작소’는 두 갈래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돋보였으나,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을 주었다.
당선작인 진경민(필명 진보경)의 ‘호모 리터니즈(homo returnees’)는 상상력의 진폭이 크고 안정감이 덜하며 우울한 상황을 담고 있으나,소설적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추동력과 적확한 표현력,그리고 현실과 탈현실의 관계를 가늠하는 균형감각 등으로 미루어 볼 때,장차의 성장 가능성을 점치게 했다.당선자에게 축하를,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는 다시 분발하라는 격려를 보낸다.
현길언·김종회
당선 소감 - 춥고 어두운 터널에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비용으로 지불한다고 했다.소설을 위해 포기했던 많은 것들은 때때로 내게 감당하기 힘든 대가를 요구했다.춥고 어두운 터널을,그 끝 어딘가에 있을 출구를 그리며 무작정 걸었다.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의 끊임없는 아우성.그것들에서 해방되는 순간은 오로지 글을 쓰는 시간뿐이었다.달콤하고 불온한 유혹에서 나를 붙잡아준 것 역시 소설이었다.두 평 남짓한 골방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따뜻한 나의 정원이었다.싹을 틔운 글감은 그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때론 애만 태우다 시들고 말라버렸지만 그것조차 내겐 소중한 가르침이었다.이제 첫 번째 터널을 지났다.앞으로 얼마나 많은,얼마나 긴 터널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먼저,부족한 글에 이렇듯 큰 기쁨과 영광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따뜻한 손으로 이끌어주신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처음 문학의 씨앗을 품었던 때부터 지금까지,늘 크고 깊은 가르침과 ‘문학을 살라.’는 화두를 주신 박상우 선생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 든든한 힘이 되어준 남편,사랑과 믿음으로 묵묵히 지켜봐 주신 엄마,감사합니다.1월1일자 신문을 들고 대전의 아버님 영전으로 달려가겠습니다.소행성 문우들의 따뜻한 격려와 성원이 저에겐 버팀목이었습니다.감사합니다.마지막으로 제 삶에 무한한 용기를 충전해 준 평생지기 현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약력
-본명 진경민
-1972년 서울 출생.
-창문여고 졸업.
-현재 커뮤니티 ‘소행성B612’에서 소설창작 과정 수강 중.
[2009 경향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글렌 굴드 이야기’
현진현
글렌 굴드(Glenn Gould)는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다. 굴드의 이 거대하고도 미묘한 콘서트용 피아노는 배와 자동차, 비행기에 실려 주인과 함께 세계의 수많은 공연장을 누볐다. 굴드의 연주여행에는 이 스타인웨이 외에도 별도로 고용된 당대 최고의 조율사가 따라다니곤 했다. 콘서트 전날 밤이 되면, 피아노의 물리적인 속성을 빠짐없이 알고 있던 굴드와 그의 조율사는 스타인웨이를 완전히 분해했다 다시 조립하기도 했다. 굴드는 음의 높낮이를 정확하게 조율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연주방식과 연주할 작품에 맞추어 피아노의 기계적인 성격들마저 조율해버리곤 했다. 콘서트 직전에 이르면 굴드는 손가락의 마디마디까지 조율하기 위해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고, 손의 관절들이 충분히 유연해졌을 때를 기다려 자신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굴드는 데뷔한 이래 늘 과도하게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였으므로 그가 지구의 반대편까지 자신의 피아노를 대동한 채 연주여행을 다닌다거나 별도의 조율사가 연주여행에 동행한다는 사실은 그의 예민함에 대한 증거로써 널리 회자되었다. 그것이 예민함 때문인지 아니면 예술적 표현을 위한 것인지, 그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굴드는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고, 그러는 동안 지독한 인기와도 함께 했다.
회사가 이전하는 날 아침에서야 그 건물을 처음 보았다. 뵈, 레, 아, 삘, 뒹 - 건물의 입구를 장식하는 대리석 아치 위에 유려하지 못한 두꺼운 명조로 큼직하게 검정색 다섯 자가 박혀 있었다. 건물이 있는 거리는 80년대에 융성한 대학가였다는데, 대학들이 하나 둘 지방으로 옮겨간 탓인지 풀죽은 모습이 역력했다. 거리에는 다세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교회, 유행을 좇지 못한 꾀죄죄한 맥줏집, 그네가 망가진 한적한 놀이터가 있었고 거리의 맨 끝에는 두 곳의 허름한 자동차 정비소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그리고 밀교의 십자가로 통할 것만 같은 전봇대가 촘촘히 서 있는 것이 퍽 인상 깊었다.
거리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뵈레아빌딩은 그 거리에서만큼은 단연 돋보였다. 5층짜리 건물 치고는 두드러지게 높았고, 몇 년 전 보수되었다는 외관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어정쩡한 것이긴 했지만 나름의 고풍스러움이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 건물은 오랜 시간이 부여한 의젓함과 두터운 층위를 가진 비밀스러움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화방이 들어선 1층만큼은 연두색 타일이 외벽을 치장하고 있어 현대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고, 무역회사가 입주해 있는 2층과 3층에는 두 개씩 테라스가 딸려있었는데 그 테라스들이 건물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짓고 있었다. 긴 테라스에 부조로 형상화된 장미넝쿨은 비록 철근과 시멘트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제법 정교해서 그다지 조잡해보이지 않았다. 4층과 맨 위층인 5층, 다른 층보다 천장이 높아 보이는 두 개 층이 회사가 이전할 곳이었다.
직원들은 이삿짐이 든 박스를 든 채 건물 입구에서부터 수군거리고 있었다. 짐을 빼곡히 실은 낡은 엘리베이터를 올려 보내고 나서야 그 수군거리던 소리가 분명해졌다. 직원 하나가 오래 전 그 건물에서 <7인의 사무라이>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었고 나이든 축들이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영화나 상영이 금지된 영화 따위를 상영하던 작은 극장으로 뵈레아빌딩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교적 젊은 몇몇의 기억은 달랐다. 그들의 과거 속 뵈레아빌딩은 잘 나가던 미술학원이 몰려있던 건물이었다. 학원비가 비쌌던 탓에 그 건물에 있던 학원 대신 외진 곳의 허름한 학원을 다녔다는 이야기, 또 당시 그 건물의 한 학원에서 데생을 가르치던 여대생이 얼마 전 파리에서 죽은 유명화가라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오갔다. 시끌벅적하던 참에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왔다. 뒤늦게 도착한 김 이사가 먼저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건물의 주인이 사장의 새로운 아내라고, 알고들 있으라는 듯 뇌까렸다. 갑자기 좁은 엘리베이터 내부에 여자의 향수냄새 같은 것이 나는 것도 같았다.
내가 보기엔 그 건물이 애초 극장이나 미술학원을 위해서 지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닥의 패턴부터, 조명의 위치, 계단의 각도 같은 것들을 비롯해서 건물의 많은 부분들이 흔히 보는 익숙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 건물은 뭐랄까, 어떤 사람의 개인저택 같은 인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건물이 처음 들어서던 때의 용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척이나 느린 엘리베이터는 4층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4층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천장이 훨씬 더 높았을 뿐 아니라 넓이 또한 짐작을 웃돌았다. 4층에서 5층으로 가는 계단은 안과 바깥 두 군데에 있었다. 내부의 계단에는 온갖 박스들이 뒹굴고 있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도 그 통로는 늘 그렇게 지저분했다. 5층으로 가는 바깥계단 역시 특이하게 널찍해서 나는 그 계단의 난간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곤 했다.
일러스트 | 최수진작가·<베트남그림여행> 저자
회사는 내게 두 번째 직장이었다. 지방의 2년제 대학에서 그래픽 작업에 소용되는 컴퓨터 기술을 배웠고, 졸업 후엔 프리랜서로 일하는 선배 밑에서 꼬박 2년 동안 일을 거들며 푼돈을 받았다. 그러다 제대로 취업을 한 곳이 그 회사였다. 광고회사인지라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오전 열한 시는 넘어야 대부분이 출근했고, 대신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퇴근들을 했다. 하긴 선배와 일을 할 때도 딱히 출퇴근 시간이란 게 없긴 했었다. 어쨌건 알량한 자유로움은 기꺼이 누릴 수 있었지만 조직에서의 일상이 주는 중압감이 나를 무척이나 피곤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회사의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광고주로부터 직접 발주를 받아 스스로 광고를 만드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대형 광고대행사로부터 컴퓨터그래픽 작업을 도급받아 말 그대로 ‘그림’만을 만드는 일이었다. 회사의 주된 일은 후자였다. 나는 그저 그림을 발주한 광고대행사 소속 아트디렉터의 지시를 받고 충실하게 이행하면 그만이었다. 때로는 파일로 전달된 광고카피들을 그림 위에다 배치하는 것까지가 나의 일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옮겨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작업을 하다말고 나는 문득문득, 징그럽게 생긴 약을 어쩔 수 없이 삼키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때로 위로가 되는 건 이미지들을 변형하고 조작하면서 느끼는, 창조자의 조수가 된 것만 같은 쾌감이었다. 유명한 여자배우의 얼굴을 성형하고 세계적인 가수의 키를 키우는 사이 그럭저럭 5년이 지났고, 회사가 규모를 넓혀 이전하는 대열에 나도 끼게 된 것이었다.
카피가 인쇄된 서너 장의 종이, 하얀 키들과 투명한 틀로 만들어진 키보드… . 타이핑을 시작하자마자 카피들은 모두 거짓말이 된다. 카피를 고친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고쳐낼 뿐, 연주자가 악보를 확인하듯 카피의 문장부호에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자음, 모음, 대문자, 소문자, 한 자, 한 자, 또박, 또박, 키를 누른다. 시프트 키를 누르고 기호를 친다. 마침내 종이에 인쇄된 문자들을 한 자도 빠짐없이 모니터 속으로 옮겨 넣는다. 다시 타이핑 ……. 그러다 나는 그만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클라이맥스에 타건(打鍵)을 하듯 스페이스 바를 깊이 누른다. 상체가 리듬을 타고 멜로디의 흐름에 반응한다. 수십 개의 모니터와 수십 개의 컴퓨터들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역겨워진다. 창을 열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저 창을 쳐다볼 뿐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면 모니터는 푸른 바다를 펼쳐 보인다. 나는 정말 피아노를 연주한 셈이 된다.
5층에는 사장의 방만 있었다. 회의실 하나 정도 있을 법 했지만 널찍한 사장의 방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5층에는 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장은 회사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다. 회사가 이전한 후 사장은 출근하는 날보다 그렇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소문대로라면 한 보수정당의 아랫자락을 기웃거리는가 보았다. 대부분의 일처리는 사장의 오랜 친구인 김 이사가 맡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김 이사만이 사장을 만나기 위해 종종 5층을 드나들었다. 다른 직원들이 5층을 드나들 일은 거의 없었다. 나 또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드나들던 바깥 계단에서 5층의 내부를 가끔 쳐다볼 뿐이었다.
5층에 사장의 방 말고도 방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회사가 이전한 지 한 달은 지나서였을 것이다. 그때는 그곳을 그저 잡다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창고쯤으로 생각했다. 문 때문이었다. 얼핏 보아도 건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문이었다. 그 문은 내부가 창고라 하더라도 참 보잘 것이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만 여닫이문이었다. 빛바랜 페인트가 너덜너덜하고 장석은 전체가 녹이 슬어 버려진 쪽문처럼 못나 보였다. 내가 그 문을 열어볼 이유는 없었다.
그 문을 열어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초저녁이면 언덕 아래에서 훈풍이 불어오곤 했으니 이전한 지 서너 달 정도가 지난 초여름이었다. 체온이 느껴지는 그런 바람은 마음 깊은 곳까지 설레게 만들게 마련이어서 일거리가 잔뜩 쌓여있었지만 기분만은 썩 좋았던 기억이 난다. 아주 늦은 밤 나는 담배를 피우다말고 그 바람을 느끼기 위해 5층까지 올라가 있었고, 그날따라 문득 그 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내 관심이란, ‘저 쪽문은 뭐지?’, ‘저 창고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하는 정도였다. 굳게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 문은 놀랍게도, 손잡이를 당기자마자 열려 버렸다.
그곳은 누군가를 위한 연습실인지도 몰랐다. 퍼뜩 그런 생각이 스쳤다.
피아노는 광목으로 덮여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긴 했지만 광목의 실루엣은 인상적이었고 나는 그것이 틀림없는 콘서트용 그랜드피아노임을 기억해냈다. 피아노는 동쪽의 창을 등지고 있었는데 피아노와 창 사이에는 낡은 나무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거리의 가로등이 눅눅한 오렌지 빛으로 하얀 광목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천을 벗겨냈다. 그것은 스타인웨이였다.
검게 빛났다. 자욱하게 먼지가 날렸지만 나는 그것이 스스럼없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와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떨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피아노가 빛나는 바람에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어림잡을 수 없었다. 껌벅대던 가로등이 꺼져버렸고, 가로등 뒤로 낡은 네온사인들이 색 바랜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왠지 을씨년스러워 라이터를 켠 채 방을 둘러보았다. 라이터를 껐다 켜기를 몇 차례 반복하는 사이 사물들이 서서히 제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전구를 떼어낸 흔적이 남아있었고 그 흔적 옆으로 전선 같은 것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곳은 제법 넓은 곳이었다. 콘서트용 피아노 한 대가 있고도 텅 빈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북쪽 벽에는 10호 크기의 유화 한 점이 액자도 없이 캔버스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림은 온통 흰색 물감으로 덮여 있었다. 추상화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갔을 땐 함박눈이 내린 작은 마을을 볼 수 있었다. 마을의 집들은 눈에 덮여있고 오직 근경의 굴뚝 하나가 치솟아 있었다. 그 굴뚝이 작은 마을을 이국적인 느낌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동쪽의 창은 그 방의 유일한 창이었다. 오래된 교회에나 있을 법한 모양새를 지닌 쇠로 만든 아주 작은 창이었다. 그 창의 창틀 역시 그 방의 문에 달린 장석처럼 심하게 녹이 슬어 손이 닿기만 해도 시큼한 느낌이 들었다. 얇긴 했지만 유리는 멀쩡했다. 손잡이를 젖혀서 밀어 올렸더니 훈훈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틀에서 벗겨진 페인트 조각이 툭 툭 떨어졌다. 창밖 아래로 쓰레기 더미가 쌓인 좁은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창문을 고정시킨 후 가만히 선 채 피아노를 쳐다보았다. 피아노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해 곱씹어보려 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피아노는, 다만 아름다웠다. 나는 피아노로 다가가 건반덮개를 열어 보려 했다. 하지만 손을 대는 순간, 그 경외감이란 ……. 무언가 내 머리부터, 어깨를, 팔을, 손목을, 손가락의 끝을 짓누르는 것만 같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 방을 나오고 말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그 방에는 작은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피아노의 번쩍이는 검정빛에 휘둘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찬찬히 피아노를 살펴보았다. 피아노는 꽤 오랫동안 방치된 듯했다. 곰팡이 같은 것들이 피아노의 다리며 발에 슬어있었다. 하지만 50년대에 생산된 피아노치고는 번듯한 편이었다. 피아노의 명판에는 모델명이 선명했다. CD318이었다. 문득 굴드의 피아노가 떠올랐다. 하지만 굴드의 318은 -제작번호가 174번이었던 그 318은- 1957년,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트럭에서 떨어져 망가져버렸다는 사실이 겹쳐 떠올랐다. 나는 준비해간 수건으로 피아노의 건반덮개를 닦았다. 그리고 살며시 덮개를 들어 올렸다. 여든 여덟 개의 건반이 눈앞에 펼쳐졌다. 건반은 티 없이 깨끗했다. 조심스럽게 건반 하나를 오른쪽 엄지로 눌러보았다. C음이 높은 천장을 돌아 넓은 방을 휘감았다.
내친김에 나는 나무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삐걱대고 있었다. 나는 평균율(The Well-tempered Clavier)의 유명한 프렐류드를 치기 시작했다. 음계가 삐걱대고 있었다. 엉망이었다. 피아노는 조율이 안 되어 있었고, 내 손가락들은 너무나 굳어버려서 음에 맞는 건반을 누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손의 기억을 빌려, 막 배우기 시작한 걸음마처럼 한 음씩 내디뎌 평균율의 제1곡을 푸가(Fuga)까지 연주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소리였지만 스타인웨이답지 않은 무거운 음색이었다. 나는 다시 스카를라티의 짧은 소나타를 연주해보았다. 스타인웨이는 조금씩 무거움을 덜어내며 빛나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아침 해가 구름에 가린 것인지 온 방안이 석양처럼 붉어졌다. 보면대에 비친 태양이 눈에 부실 듯 말 듯 시야를 괴롭히는 바람에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그제야 그 스타인웨이의 건반이 마치 굴드의 318처럼 아주 가볍게 세팅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굴드처럼 어깨를 구부리고 팔은 들어 올린 채 건반을 두드려 보았다. 황홀했다.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건반은 가볍게 해머를 움직였고 해머는 현을 내려쳤다. 연주를 할수록 피아노의 기계적인 부분들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페달도 문제없었다. 현 하나가 끊어져 있었지만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다. 그 방은 왠지 슈만과 잘 어울릴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다시 바흐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내 눈이 악보를 읽으면 음의 가치가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뇌는 다시 내 양손으로 음가를 옮겨낸다. 낮은 성부와 높은 성부, 내 두 손은 명징한 소리를 기도하며 건반을 누른다. 해머가 현을 때린다. 현의 떨림은 공기에 파장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주파수들이 내 귀를 통해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다시 나의 몸과 마음을 자극한다. 내 마음과 내 머리와 내 손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공기 속으로 음들은 자유롭게 순회하고 있다. 순회하는 음들은 모두 내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해가 뜰 무렵부터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는 열 시 무렵까지 그 방에 있곤 했다. 가끔은 늦은 밤도 좋았다. 하루는 콘서트 무대에 선 양 용기를 내어 피아노 몸체의 덮개를 열고 연주를 해 보았다. 페달을 밟고 코드를 누르는 순간 아주 큰 소리가 났지만 극장의 전력(前歷)으로 어느 정도 방음이 되고 있었던 탓이었을까, 그 방의 문을 두드리거나 열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의 우스꽝스러운 예외가 있긴 했다. 그 예외란, 늦은 밤 기획팀의 대리 하나가 여자 부장의 가슴을 움켜진 채 그 방의 문을 밀치며 뛰어든 일이었다. 어둡지 않았다면 그들은 바로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길거리의 네온 조명만 비치고 있던 그 방에서 그들은 서로의 몸을 만져가며 쉬지 않고 입맞춤을 나눌 뿐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라이터를 켜는 소리에 놀란 그들은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취한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가고 말았다.
그 여름의 막바지 온 세상이 더위에 휩싸인 어느 날 ‘행복해진 나를 발견했다’라고 일기장에 써 넣었다. 스타인웨이라는 값비싸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방에 들어서면 마치 수백 명의 관객이 들어찬 명성 높은 콘서트홀의 무대에 올라선 것만 같았다. 가끔 스타인웨이와 나란히 무대 위에 서서 청중의 표정을 여유롭게 돌아보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연주는 점차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바흐를 연주하고 나면 청중은 어김없이 브라보를 외쳐댔다. 커튼콜을 받은 나는, 골드베르크변주곡의 아리아를 한 음, 또 한 음 느릿느릿 정성들여 연주하곤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나는 그 시절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나의 어린 피아니스트 시절 말이다.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만두었다. 나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다. 연습에 매진하는 쪽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연습 덕분인지 누구에게나 칭찬을 들었고 언론에도 오르내렸다. 그만 둘 무렵에는 국내 최고의 선생으로부터 레슨을 받으며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국내에 한정되긴 했지만 크고 작은 몇 개의 콩쿠르에서 우승해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공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나는 콩쿠르에 참여했던 다른 신동들과 달리 점점 더 피아노가 좋아지고 있었다.
나를 피아니스트로 만든 건 아버지의 레코드들이었다. 내가 피아노를 그만두기 직전까지도 아버지는 퇴근길에 중고레코드를 한아름 사오시곤 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아르투르 베네디티 미켈란젤리,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렐스, 클라라 하스킬,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글렌 굴드 ……, 모두 빛나는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레코드는 대부분 굴드의 것들이었다. 유학이 결정되던 날엔, 어쩌면 굴드를 직접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내가 굴드를 특히 좋아했던 건 아주 어릴 적 들었던 그의 연주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내가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이따금 서재의 책상머리에 놓인 카세트레코더로 음악을 들으셨다. 헨리 맨시니나 폴 모리아가 지휘하는 관현악곡들이 많았을 테지만, 한잔 하시는 날엔 어김없이 빛나는 피아노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굴드와 스타인웨이가 빚어내는 소리였다. 그때 이미 굴드만의 독특한 스타카토의 묘미에 익숙해져 버린 건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골드베르크변주곡의 스물다섯 번째 변주를 예닐곱 번씩 반복해서 듣곤 하셨다. 그 멜로디를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클리셰 같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내 방에 놓인 피아노와 거실에 있던 오디오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 나는 집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날은 레슨이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에도 나는 레슨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레슨을 해주던 선생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피아노가 없는 집은 좀 어색했지만 내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쫓기듯 이삿짐을 싸기 전까지 나는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나뒹구는 악보들을 넘겨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던 것은 물론이었고, 한동안 그 누구의 연주든 모든 피아노소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견딜 수가 없었다. 골목 어귀에서 흘러나오는 서투른 솜씨의 피아노소리를 듣는 것조차 힘겨운 때가 있었다. 피아노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지방의 학교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통학버스에서였다. 나이 지긋한 운전기사가 슈만을 들려주었다.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버스에서 마지막 학생이 내릴 때까지 미켈란젤리의 피아노소리를 들었다. 기사는 미켈란젤리의 팬이었나 보았다.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기사는 미켈란젤리의 슈만과 드뷔시를 들려주었다. 며칠 뒤 나는 휴대용 CD플레이어와 굴드의 골드베르크변주곡 CD를 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스무 살 남짓까지의 내게, 음악은 보이지 않는 뼈를 가진 물 같은 것이었다.
일러스트 | 최수진작가·<베트남그림여행> 저자
스타인웨이가 사라졌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악보를 가득 안고서 그 방의 문을 열었을 때 스타인웨이는 없었다. 스타인웨이가 있던 자리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먼지가 깔려 있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그 방에서 바흐의 푸가들을 연주했고, 오후에는 집근처 한 신학대학의 구내에 있는 음악전문서점에서 바흐의 악보들을 골랐다.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냥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스타인웨이가 사라졌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오히려 그 크고 무거운 피아노를 어떻게 가져갔을까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꿈에서 봤던 곳을 꿈에서 깨어나 다시 둘러보는 것만 같았다. 피아노는 어떻게 그 방을 들고 날 수 있었을까? 그 방의 출입문은 터무니없이 작았고 창 또한 아주 작았다. 피아노를 발견했을 땐 그런 의문조차 들지 않았던 것도 이상했다. 그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글렌 굴드와 그의 조율사가 분해를 해서 들고난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짐작을 해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때 내가 그 이상한 사건에 대해서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던 건, 왠지 모르게 피아노가 그 방으로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희망부터 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로부터 며칠 동안을 줄곧 굴드가 연주한 레코드들을 들었다. 어찌됐든 스타인웨이를 계속 즐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5층의 그 스타인웨이가 그리운 것은 당연했다.
피아노가 사라진 후 그 방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물론, 누군가 사라진 피아노에 대해 말을 꺼낸다든가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는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아침저녁,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 방을 찾아 피아노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사라지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건물의 관리인과 1층 화방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피아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또 그동안 피아노를 치워버리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했던 피아노의 존재를 김 이사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는 5층에 방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5층에 방이 또 하나 있었어? …… 아, 그 창고? 난 안 들어가 봤는데? 거기 뭐가 있었다고?”
굴드의 예민함에 비견될 만한, 그의 연주에 대한 청중들의 집요하리만큼 민감한 반응은 그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모든 기간 지속되었다. 토론토 외곽 작은 마을의 눈 덮인 작은 집을 떠나 그만의 피아니즘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보였을 때는 물론이고,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예가 자신이 살던 도시의 명성을 넘어섰을 때, 또 노년에 CBS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골드베르크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을 다시 레코딩 해 추억의 스펙트럼을 진일보시켰을 때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그의 피아니즘에 긴 박수를 보냈다. 게다가 광적인 부류의 팬들은 그의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 그의 연주를 목말라하기도 했다.
굴드는 두 번의 은퇴를 했다. 첫 번째 은퇴는 콘서트무대에서의 은퇴였다. 굴드는 단호하게 콘서트 무대를 버렸다. 그것은, 청중의 열렬한 호응에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고서도 더 이상의 연주는 정중하게 거절하고야마는 그의 완고한 제스처와 비슷했다. 굴드의 두 번째 은퇴는 북아메리카에 백년만의 추위가 올 것이라 떠들어대던 해의 어느 가을날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콘서트를 그만두는 것에 이어 레코딩마저 그만두는 죽음으로써의 은퇴였다. 완전한 은퇴였을까? 그것은 실패였다. 그의 죽음은 그의 명성을 북미와 유럽을 넘어 남미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알린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때 스타인웨이의 명성도 함께 바다와 산맥을 넘었다.
요컨대 글렌 허버트 굴드(Glenn Herbert Gould)는 1932년 9월25일 태어나, 1982년 북아메리카의 역사적 추위로 기록된 겨울이 닥쳐오기 전인 10월4일 세상을 떠났다.
미친 듯 두드리다가 다시 흐느끼듯 흘러내리는 내 두 손과, 그 손들을 제어하는 내 이성을 통해 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삶을 드러낸다. 그것이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 내 눈앞에는 삶의 의미가 어른거린다. 나, 나의 손, 피아노 건반, 피아노 줄, 소리, 그리고 동향의 공간. 방의 모든 사물은 시간을 틈타 서로를 탐하고 있다. 아! 그런데 나와 세계의 매개가 사라졌다. 내가 표현되는 방식은 상상으로 그칠지라도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
내가 기도했던 연주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나는 나를 둘러싼 일상 속에 머물러 있었으면 될 뿐이었을지도 몰랐다. 어디를 둘러봐도 구원 따위는 없다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삶의 손에 잡히는 형체, 다만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내게 분명했던 것은 오직, 내가 사는 방식이 점점 더 내게 익숙하게 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피아노가 사라졌다는 것, 그것이 반드시 불운한 것은 아니었다. 나빠진 것은 없었다. 나는 감상적인 고민에 빠진 것만 같았다.
며칠 간의 짧은 휴가를 내고 좁은 내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재미없는 TV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거나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전히 회사로 달려가 스타인웨이의 부재를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심심치 않게 찾아들었을 뿐이었다. 휴가를 하루 남겨 둔 날 정오쯤, 끈질긴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말이다. 옛 여자 친구였다. 수화기를 든 나는 그 길로 그녀와 길고 긴 잡담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가끔 기중기로 굴드의 피아노를 들어 올려 비행기의 조종석에 집어넣는 장면을 상상한다. 검정색 스타인웨이가 삐걱대는 목조 기중기에 매달리면, 머리가 뭉툭한 거대한 여객기는 전투기인 양 조종석 덮개를 열어젖힌다. 인간의 뇌에 손톱만한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듯, 기중기는 여객기의 머리에 스타인웨이를 안착시킨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글렌 굴드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것은 내가 본 그의 사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굴드는 하얀 눈밭에 서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었지만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굴드 뒤로 보이는 광활한 눈밭에 눈이 빨간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장면이 눈에 그려지곤 했다. 굴드는 사진처럼 충분히 고독했다. 그래서 슬펐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서른다섯 해 동안 지녔던 그런 슬픔과는 달랐다. 하기는 굴드가 연주한 모차르트는 늘 악평에 시달렸다. 평론가들은 굴드만의 곡 해석과 타건이 오직 바흐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굴드는 모차르트식의 슬픔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다. 굴드 또한 모차르트처럼 음표 뒤로 무엇인가를 감추었지만 그것은 슬픔을 넘어서는 다른 성질의 무엇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굴드는 골드베르크변주곡을 제외하고는 같은 곡을 두 번 이상 레코딩하지 않았다. 굴드는 그런 식으로 연주를 하는 자신의 개성을 깊이 존중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연주를 표현해주는 스타인웨이의 개성 또한 존중했다. 나아가 두 개의 중첩된 개성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개성까지도 굴드는 존중했다. 그리고 굴드는, 자신 역시 한 명의 청중이었으므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연주를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 연주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 자체였고, 그 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굴드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방식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했다. 말하자면 그의 예술은 그의 삶에 불과했다.
피아노가 사라지고 해가 바뀌어 다시 초여름이 되었을 무렵, 나는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 방을 얻어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내 방 안에는 풀지 못한 이삿짐이 박스째로 가득했는데 그 속에 악보 따위는 없었다. 악보들을 어디에다 둔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해가 무척이나 드셌던 그 즈음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우연히 그리고 오랜만에 5층의 그 방 앞을 지나게 되었다. 무심코 걸음을 옮기던 나는 그 방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고 누군가 그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척이나 놀랐지만 걸음을 돌려 문 앞으로 다가간 나는, 스타인웨이가 있던 그 자리에 머리가 벗겨진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늙어버려 겨우 얼굴을 알아 볼 만한 글렌 굴드였다.
* 이 소설에 등장하는 글렌 굴드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들은 굴드를 중심으로 미켈란젤리, 호로비츠 등 20세기 중후반을 풍미한 피아니스트들의 일화들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009 경향 신춘문예]소설 심사평- 안정된 문장…서사적 짜임새 견고
심사위원 이승우·윤대녕
예심을 거쳐 올라온 10편의 작품 중 최종심에서 거론된 작품은 <글렌 굴드 이야기>, <거울 속에 지은 집>, <악수> 이상 3편이었다. 소재와 주제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체험과 사유가 서사의 바탕을 이루기보다는 자의식에 함몰된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현실과의 마찰을 보여주는 소설이 보다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악수>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통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휴양지 마을에서의 흉가 체험을 기본 골격으로 추리 기법을 동원해 발랄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저승사자 역할을 사는 아버지와의 모호한 관계 설정과 밤마다 열린 창으로 드나드는 누군가의 팔은 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관계의 구체성이 결여돼 결과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힘이 약해지고 말았다. 소통을 염원하는 화자의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 속에 지은 집>은 과민성 피부염을 앓고 있는 화가가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한다. 인터넷을 통한 그림 판매로 생활하는 ‘그녀’와 택배회사 배달원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 작가는 유폐된 욕망의 나르시시즘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소재임에도 이 작품은 인과성이 결여된 이야기의 단순한 나열과 자의식의 과잉이라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현진현씨의 <글렌 굴드 이야기>는 우선 문장이 안정돼 있고 서사적 짜임새가 견고하다. 글렌 굴드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은 좌절된 꿈의 서사를 다루면서 동시에 파괴된 내면의 복원이라는 주제를 놓고 고민한다. 독특한 공간 설정과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가볍게 오가는 발놀림이 매우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작가는 소설이 허구의 힘을 빌려 접근해야 할 지점(현실)이 어디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대해 선자들은 함께 입을 모았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이승우·윤대녕>
[2009 경향 신춘문예]소설 당선소감 “꿈이 좌절된 사람에게 위로됐으면”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부문 당선자 현진현씨(35)의 수상 소감이다. 그럴 만도 하다. 현씨는 신춘문예 당선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분에 당선됐다. 계명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현씨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국문과와 문예창작과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대학 마지막 학기 교수님의 조언으로 처음 써본 비평이 덜컥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비평을 계속하는 대신 “사회생활을 경험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한 광고회사에 취직해 카피라이터가 됐다. 그렇게 시작한 직장생활이 해를 넘기고 또 넘겨 벌써 9년째. 그러다 어느날,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으로는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일을 하다보니 여유가 없어서 멀어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만의 창의적 작업에 대한 욕구가 생겼고, 자연스레 제 몸이 소설을 쓰고 있더라고요.”
당선작 <글렌 굴드 이야기>는 학창 시절 A4 1장 분량으로 쓴 꽁트가 골격이 됐다. 현씨는 지난해 이 꽁트를 찾아내 소설로 재구성했다.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소설을 쓰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광고업의 특성상 바쁜 일이 끝나고 여유 있는 시기를 이용해 작업에 집중했다. 신춘문예 공모를 보고, 부족한 부분을 급하게 수정해 응모한 작품이 당선됐다.
<글렌 굴드 이야기>는 피아니스트의 꿈이 좌절된 채 광고회사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직장인이 어느날 회사에서 글렌 굴드의 피아노를 발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그는 현실에서 좌절된 꿈을 실현하는 환상에 젖는다. “소설이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을 못 이뤘다고 해서 나의 인생이 가치없는 것이 아니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소설은 지난 9년간 작가의 꿈을 잊고 지냈던 스스로에게 현씨가 던지는 위로이기도 하다.
“이번이 제게 찾아온 2번째 기회입니다. 그동안 부족했던 만큼 많이 읽고, 쓰고 싶습니다. 통상적 서사구조의 틀을 바꾸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9년 만의 환향. 고이 접었던 꿈을 다시 펼치며 말했다. “저를 이끌어준 계명대 한국어문학과 최미정 선생님, 문예창작과 김원우 선생님, 그리고 아내와 가족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2009 동아일보 당선작-
여우의 빛
이동욱
절망의 순도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다. 이것은 증류수처럼 고요한 시간의 기록이다. 그 속에서 나는 물방울처럼 웅크린다. 나는 킬러다. 내 시력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의사가 내게 한 말이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나는 내 절망의 활자를 표적에게 찍는다. 표적들은 하나같이 차갑게 무너진다. 하지만 내 표적들은 나를 모른다. 그녀는 수족관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진심을 알 것이다. 표적에 집중해 있는 망원경. 그 안에서 나는 숨을 멈춘다. 너무 오랫동안 숨을 멈추고 있으면 모든 사물이 파랗게 보인다. 그리고 파란색은 위험하다. 그녀는 파란색이다. 총알을 감싸 쥘 때마다 생각한다. 총알은 나의 심장처럼 차갑다.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하나씩 오른다. 계단은 규칙적이다. 표면에는 마블링 무늬가 녹아 있다. 계단 위로 발을 디딜 때마다 청량한 발자국 소리가 좁은 통로에 울린다. 어쩌면 이 소리들은 계단에 녹아 있다가 내 구두가 닿을 때마다 밖으로 깨어나는 것 같다. 발자국 소리를 따라 얼굴이 천천히 굳어진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조그마한 철문이 있다. 철문은 굵은 자물쇠를 물고 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자물쇠를 딴다. 이 빌딩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옥상에는 대형 에어컨 실외기와 커다란 물탱크가 있다. 물탱크는 노랗고 거대한 무당벌레처럼 보인다. 나는 입김을 불어 손가락을 조금 녹인다. 가방의 지퍼를 열어 라이플의 부품들을 하나씩 결합한다. 갑자기 실외기가 작동한다. 덕분에 나는 그 소음에 묻힌다. 옥상 가장자리에 라이플을 얹어 놓고 거리를 내려다본다. 퇴근시간이 지난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다. 오늘은 올겨울 들어 가장 낮은 온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밤하늘 위로 스케이트 날 같은 바람이 미끄러진다. 바람이 스친 자리마다 별이 고인다.
옥상에서 별을 볼 때마다 누군가 우주 한가운데서 크게 울부짖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주파수의 영역 밖에서 부글부글 타오르는 목소리 같은 것을 나는 느낀다. 구름이 비켜나자 달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나는 그 빛에 노출된다. 라이플의 총구로 달빛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나는 조준경을 따로 떼어내 눈 위로 가져간다.
달의 표면으로 실패한 감정이 무수한 탄착흔처럼 쌓여 있다.
며칠 전 나는 이곳에서 L을 처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고 실패한 킬러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연락책은 일단 피해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소식을 끊었다. 이 세계에서 적과 친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목표와 단계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단계였고 실패한 단계는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며칠 후 연락책은 내게 은퇴를 강요했다. 그는 내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조직에선 이미 나와 L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그 조건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작은 햇빛이 커튼의 틈새를 채우고 있었다.
반대편 건물 밑으로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가 다시 이 거리에 나타날 확률은 희박하다. 눈의 초점이 다시 희미해진다. 곧이어 바늘로 눈알의 뒤쪽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한 차례 지나간다. 의사는 통증이 있을 때 눈을 비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더듬거리며 약병을 찾는다. 나는 내 눈의 시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를 놓친 것은 내 첫 실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를 왜 죽이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
킬러에게 저격할 장소는 일회용 성소(聖所)와 같다. 나는 유령처럼 그곳에 존재해야 하며 어떤 흔적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시 그곳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짓단에 묻은 먼지를 턴다. 라이플을 분해한 뒤 케이스에 담는다. 도시의 수많은 빌딩과 자동차, 가로등, 도시의 불빛은 움직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뿐이다.
건물의 비상계단을 통해 가로등이 없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본다. 나는 이 빌딩 옥상에서 그를 죽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고 이곳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물고기가 산다. 내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돌아누운 그녀의 목덜미에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릴 때였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보이는 물고기는 수초 속에 몸을 숨긴 모습처럼 보였다. 크지는 않았지만 물고기 문신치고는 정교한 솜씨였다. 물고기의 이름이 궁금했지만 그녀를 깨우기 싫었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밀도가 높은 물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잠시 몸을 뒤척였다. 우리는 수족관 속에 죽어 있는 두 마리 물고기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집까지 데려다 주던 날이었다. 그녀는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는 언니가 외국에 가 있는 동안 잠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고 했다. 복도에서 몇 명의 사람을 마주쳤지만 그녀는 아무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열쇠가 잘 맞지 않는지 그녀가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복도에 불이 꺼졌다. 나는 그녀를 위해 몸을 조금 움직여 주었다. 불이 켜졌다.
“…왜요?” 그녀가 물었다.
“불을 좀 밝히려구.” 내가 말했다.
다시 불이 꺼졌다.
그리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문득 살과 섞인 그녀의 화장품 냄새가 맡아졌다. 좋은 냄새였다. 그녀가 말했다.
“…잠깐 들어왔다 갈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에 불이 꺼졌다.
그리고 그날부터 우리는 만났다.
킬러에겐 항상 희망이 필요하다. L이 내게 해준 말이다. 그는 탁자 위로 담배 한 개비를 거꾸로 들어 톡, 톡 치면서 말을 이었다.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우리도 남들이 하는 건 다 하고 살아야지.”
그는 한쪽 코에 찡긋 힘을 주고는 얇은 입술의 한쪽 끝으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턱을 돌렸다. 나는 테이블 옆을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리필을 부탁했다. 그녀는 옆 테이블의 주문을 잊지 않으려고 입 모양으로 커피의 이름을 외우면서 내 찻잔을 가져갔다. 그녀가 몸을 숙일 때 체크무늬 에이프런이 살짝 접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담배연기를 뿜었다. 연기는 대부분 천장까지 닿지 못하고 중간에 사라졌다. 그는 조직에서 내게 소개시켜준 일종의 ‘멘토’였다. 물론 경험에 따른 노하우는 그가 나보다 훨씬 풍부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받아 해결한 일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가 두려웠다. 그는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짧게 한 모금을 빨았다.
출입문에 달린 작은 종이 흔들렸다.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잠시 후 두 사람이 되어 나갔다. 커피숍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한 손에 들고는 다른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 오로라를 본 적 있나?”
그의 꿈은 오로라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편협해 보이는 침엽수림이 성냥개비처럼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어떤 무늬가 지나가고 있었다. 오로라를 사진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오로라의 무늬는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처럼 초록색이었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부에는 날짜가 찍혀 있었다. 나는 사진의 출처를 묻지 않았다. 나는 손끝으로 사진 속의 무늬를 따라가 보았다. 미끄러웠다.
“오로라를 직접 본 사람들 말로는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더군. 자네가 관심 있으면 비행기 옆자리 정도는 양보할 수 있는데. 어때?”
나는 테이블 위로 사진을 밀어주었다.
“잠은 좀 자는 거야? 얼굴이 말이 아닌데.”
라이플의 조준경으로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L은 그것이 내가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나에게 새로 생긴 꿈은 모았던 돈이 정리되는 대로 비행기를 타고 북극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두껍게 옷을 껴입고 뒤뚱뒤뚱 눈밭을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언덕을 골라 자리를 잡은 뒤 오로라를 기다릴 것이다. 그 다음에 ……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다. 다만 그 빛 아래에서 누워 한때 듣던 음악을 떠올리거나 그동안 내가 죽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보면 괜찮을 것 같다.
북극에서는 오로라를 ‘여우의 빛’이라 부른다. 좋은 이름이다. 하지만 L은 여우의 빛을 보기 전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럴지 모른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정확한 조준을 위해서 호흡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L이 내게 해준 두 가지 충고이다. 나는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헬스장을 3개월 단위로 다닌다. 물론 일이 생길 경우 사전답사를 위해 작업할 지역을 시험 삼아 뛰어보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정지된 공간에서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머릿속이 백지처럼 환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호흡이 어떤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 백지 위에 점을 하나 찍는다. 곧 내 몸은 그 소실점을 향해 돌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지켜보는 일이 나는 불편하다.
그녀와 헤어지던 날 우리는 각각 아이스티와 커피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가져온 유리잔에는 얼음이 너무 많았다. 재떨이 위에는 담배꽁초가 두 개 버려져 있었다. 나는 세 개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아이스티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변두리의 커피숍은 주말인데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그치자 우리는 완전하게 침묵했다.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달그락.”
그녀의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녹으며 다른 얼음 아래로 떨어졌다. 달그락. 다시 실내에 음악이 흘러 나왔다. 나는 얼음이 녹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조그맣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때로 물고기도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자고 있는 내 얼굴을 만진 적이 있다. 창틈으로 새벽 공기가 새어들어 왔다. 여름이 희미해지는 냄새가 났다. 그녀는 조용히 이불을 들추고 일어났다. 그녀가 치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는 것이 보였다. 가로등 빛에 그녀의 허벅지가 환하게 드러났다가 곧 치마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수증기처럼 움직였다. 내 집에서 지상까지 이어진 철제계단은 모두 12개. 그녀가 계단에 발을 디딜 때마다 위태로운 마찰음이 났다. 나는 누워서 그녀가 내려가는 소리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으며 세어보았다. 손가락이 부족해지자 나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녀와 헤어지던 날이었다.
얇은 창문에 손바닥을 대어본다. 창밖으로, 겨울의 깊은 냉기들이 풀리지 않는 저주처럼 잔뜩 몰려와 있다. 나는 잠시 손바닥의 온도를 낮추며 다시 방아쇠에 검지손가락을 건다. 이 순간의 짜릿한 감정은 중독이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 몇 장 남지 않은 가로수 잎들이 속눈썹처럼 파르르 떨린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의 부피가 늘어난다.
그는 다시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빌딩에서 내려온 나는 한때 우리가 사용하던 안전가옥 근처로 장소를 옮겼다. 마침 그 맞은편 사무실은 임대 광고를 내고 있었다. 졸고 있던 수위를 깨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20평쯤 되는 공간에 책상과 의자, 소파 같은 집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수위는 전에 이 사무실을 쓰던 사람들이 유령회사나 사채업을 하던 이들이었고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 사무실을 온통 뒤집어 놓은 뒤 아직까지 아무도 쓰지 않았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해댔다.
“근데, 뭐하시는 분이슈?” 나는 잔금 처리를 위해 건물 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조그마한 사업을 합니다.” “뭐, 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지만, 저번 사람들처럼 이상한 일 하는 건 아니지? 나야 뭐 관리만 하는 처지지만 매번 그런 일이 터질 때마다 형사들이 찾아온단 말이지. 한두 번도 아니고 귀찮아 죽겠어. 보아하니 청년 인상이 좋아서 그런 걱정은 안 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요즘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암튼 잘 좀 부탁허이.”
슬쩍 말을 놓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형사들이 들락거린다는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어쩌면 아직 이 근처에서 잠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되도록 인상 좋게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건물 사무실 열쇠들은 비상용으로 모두 갖고 계시죠?” “그럼. 저번처럼 사람들이 문을 때려 부수고 난리를 치면 내 입장이 곤란하거든.” 그는 아까부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자랑스럽게 두드렸다. 나는 사무실 열쇠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접이식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20평 넘는 사무실은 혼자 쓰기에 남는 공간이 너무 많다. 종일 불을 켜지 않고 난방도 돌리지 않는다. 관리인에게는 내가 나중에 떼겠다고 하고는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임대 광고 플래카드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 낮 동안 나는 구석에 굴러다니는 생수통에 소변을 보면서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며칠째 같은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쯤 말이 많던 그 수위도 1층 구석에서 건물 출입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것이다. 그는 건물을 지키고 나는 L이 찾아올 순간을 지킨다. 이제 허리 아래로는 소변을 볼 때 외에는 감각이 없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힘들다는 수위의 말을 거들어 줄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사무실에 뒹구는 부서진 가구가 되어 버릴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 눌러주기만을 기다리는 폭탄의 작고 빨간 스위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주머니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물 없이 천천히 씹는다. 이 약이 당분간 내 시력을 보호해 줄 것이다. 입안이 금세 까칠해진다. 이렇게 오랫동안 타깃을 기다리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보름가량을 작은 방에 앉아서 정해진 타깃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보름이라는 기간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방심한 상대는 경호원도 없이 여자를 데리고 모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조준경 가득 그의 살찐 얼굴을 잡아당긴 뒤 그의 미간에 총알을 박았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관절은 아무리 주물러도 감각이 없었다. 쓰지 않는 근육이 낡아가듯이 어느새 내 관절은 한쪽으로 굳어 있었다. 마치 내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모두 내 관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보름 동안 나는 외롭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울었다. 보름 동안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내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창 밖에는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잠시 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으로 가린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났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L에게 얘기했다.
L이 말했다.
“자네는 혼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고독이란 우주선을 잃어버린 우주인 같은 거라고.”
그는 나를 비웃지 않았다.
“생각해봐. 아무것도 없는 우주공간에 떠서 그는 차츰 떨어져가는 산소량을 확인하겠지. 그때 그가 점점 멀어져가는 지구를 바라보면서 말이지. ‘제길, 담배나 한 대 피워 봤으면’ 하고 우주를 향해 날리는 유머 같은 것 말이야. 참 쓸쓸하지. 그래도 괜찮아. 그의 쓸쓸한 유머들로 헬멧이 부옇게 흐려지면 우주도 그의 눈물을 보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고독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L이 해준 마지막 충고였다.
내 절망의 순도는 갈수록 낮아진다. 나는 더 이상 순수한 의미의 절망을 알지 못한다. 나는 종교가 없고, 보험에 가입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깥이 필요하다. 나는 자주 혼자 침대에 누워 이런 말들을 중얼거린다. 그러다 문득 천장이 한없이 높아지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북회귀선이나 날짜변경선 같은 것들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실을 감고 있는 실패처럼. 실이 풀리면서 돌고 있는 지구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실을 끊으며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새들의 생소한 이름을 생각하려 한다. 생각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주 안타깝다.
이곳에서 버틴 지 보름이 넘어가고 있다. 아마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자신만의 우주로 돌아간 것일까. 한 달가량을 계약했지만 내일쯤에는 철수해야 될 것 같다. 나는 내가 버려놓았던 잡다한 쓰레기를 한곳에 모은다. 말이 많던 관리인은 다행히 그동안 한 번도 사무실을 찾지 않았다. 나는 바뀐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사무실을 나선다. 적어도 이 달 말까지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내가 숨쉬던 공기도 그 안에서 천천히 썩어 갈 것이다. 관리인은 조그마한 수위실에서 TV를 켜놓고 잠들어 있다. 나는 잠든 그의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본 후 걸음을 옮긴다.
시내버스는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달리고 있다. 버스 창문을 조금 연다. 비가 그친 창밖의 차가운 공기. 새벽까지 내리던 비는 공기를 좀 더 공허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심호흡을 할 때마다 공기 속에선 무언가 가득 차 있었던 것들의 흔적이 맡아진다. 사무실에서 철수했지만 나는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거둔다. 출근 시간을 넘긴 버스 안에는 등산복을 입은 노인과 교복을 입은 여학생, 그리고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전부다. 우리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버스의 구석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다. 라디오에서 이번 겨울비가 그치면 기온이 한층 더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버스는 직사각형이다. 문득 나는 고개를 돌려 버스의 네 각을 확인한다. 시력이 나빠진 이후 모서리를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모서리는 점점 커진다. 나는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작아진 내 몸이 조금씩 그 속으로 빨려든다. 아늑한 착각이다. 나는 적당히 흔들리는 버스의 진동에 맞춰 눈의 초점을 감았다가 다시 풀어 놓는다.
그녀와 시내에서 간단히 술을 마시고 함께 택시를 탄 후였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일찍 찾아온 추위에 옷깃을 더욱 촘촘히 여미며 지나갔다. 술기운이 오르는지 그녀는 손바닥으로 발그레해진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봐. 자동차는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잖아.
그녀는 손톱으로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그랬지. 사랑은 유리 같은 거라고.
창문에 입김이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면 …… 우리는 지금 사랑 안에 있는 건가?
택시는 내부순환도로를 막 벗어나고 있었다. 거리는 한산했고, 차가웠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목젖을 통과하는 따뜻한 알약처럼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를 좋아하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열쇠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방에는 그녀가 급하게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보일러는 꺼져 있다. 이불은 침대 구석에 몰려 있고, 바닥 여기저기에 입다 벗어 놓은 옷들이 구겨져 있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낸다. 찬장을 열어 잔을 하나 꺼낸다. 가장자리에 물때가 묻어 있다. 나는 잔에다가 물병의 물을 옮겨 담는다. 물잔을 들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침대에서 화장품 냄새가 살짝 일어난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삼키기 전에 충분히 입 안을 적신다. 그녀는 지금쯤 오전 업무를 끝내고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책상 위에는 간단한 기초화장품과 낡은 노트북, 필기구들, 그리고 메트로놈이 있다. 화장품의 마개를 열고 가만히 코를 가져다 댄다. 화장품의 냄새 속에는 그녀의 귓불이 있다. 목도리가 빠져나간 목덜미와 음식을 씹을 때마다 드러나는 보조개가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이런 것들을 하나씩 조립한다. 하지만 마개를 닫으면 그녀는 사라진다.
그녀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으레 다녔을 피아노 학원도 다니지 못했다. 그녀도 피아노에 흥미가 없었다. 대신 메트로놈이 좋았다. 작은 추를 매달고 일정하게 좌우로 흔들리는 걸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녀의 메트로놈은 추를 달고 있는 아날로그 식이었다. 전체적으로 원뿔형 구조에 나뭇결 무늬를 한 플라스틱이 외장을 덮고 있다. 군데군데 손때가 탄 흔적이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친구를 따라 피아노 학원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학원 문을 열자 피아노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학원에는 피아노가 놓인 방이 여러 개 있었다. 하지만 방음처리가 된 소리는 아주 멀리서 흔들리는 깃발처럼 희미했다. 친구는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는 평소 자기가 연습하던 방으로 들어갔다. 학원 선생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방에서 먼저 온 아이를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파 위로는 몇몇 음악가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한동안 소파에서 발장난을 하며 놀던 그녀는 잠시 후 신발을 신고 일어났다. 학원을 좀 둘러볼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방이 많았다. 창가 쪽으로 다가가던 그녀는 문이 반쯤 열려 있는 방을 발견했다. 조심스레 문을 밀어 보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색 피아노가 고집스러운 노인처럼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벽에는 자주색 스펀지가 올록볼록하게 돋아나 있었다. 바닥에는 하늘색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가 자기도 모르게 방문을 닫았다. 두꺼운 문이 닫히고 나자 방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지자 그녀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보슬보슬한 양탄자의 느낌이 좋았다. 그녀는 피아노 의자를 빼서 앉아 보았다. 그녀는 그 작고 조용한 방이 마음에 들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잠시 후 그녀를 태운 작은 방은 하늘 높이 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식당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엄마가 보였다.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밀고 다니는 할머니와 분식집에 모여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도 보였다. 그녀가 태워 버린 일기장이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태운 작은 방은 점점 지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메트로놈은 피아노 위에 있었다. 작은 추가 가운데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몰래 메트로놈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메트로놈을 자신만의 비밀상자에 넣어 두었다. 오랜 후에 그녀가 집에서 독립한 다음에야 메트로놈은 상자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상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일 말고 메트로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세상엔 박자를 맞추며 해야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사할 때마다 메트로놈을 잊지 않고 챙겼다.
나는 케이스를 벗기고 태엽을 감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메트로놈의 추를 왼쪽으로 가볍게 기울인다. 손가락을 떼자마자 추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며 한 박자를 센다. 그리고 왼쪽으로 기울어지며 다시 한 박자를 센다. 그리고 다시 한 박자. 그녀는 요즘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까. 그리고 조용하게 다시 한 박자.
언젠가 나는 그녀가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은 적이 있다. 손바닥 안으로 그녀의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나는 메트로놈을 가져와 그녀의 심장소리에 맞게 박자를 조정했다. 잠든 그녀의 심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은 안단테(ANDANTE)였다. 나는 이걸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사람들의 맥박은 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L은 죽을 것이다. 지금 그의 심장은 어떤 빠르기로 뛰고 있을까. 나는 흔들리는 추를 잡아 세운다. 순간 방 안이 조용해진다. 어디선가 깃털을 떨어트리며 새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이 방을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진다. 구름 위에서 보면 마치 누군가의 커다란 생일 케이크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로등의 둥근 유리관으로 눈알만 한 나방이 제 몸을 부딪치고 있다. 그때마다 유리관이 좌우로 흔들린다. 나방의 무서운 습관이다. 때로 잠이 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 창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린다. 내 숨소리다. 너무 조용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내 조그마한 귓속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 그러면 내 호흡이 조금 더 낯설어진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양파를 키우는 중심의 빈 공간이다. 나는 아무 의미 없이, 눈물이 마를 때까지 냄새를 피우는 작은 입자다. 지금도 내 몸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세균과 같이.
새벽의 마트에는 언제나 질서가 있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면 나는 늘 근처에 있는 24시간 할인마트로 간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새벽의 마트에는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다. 무례하게 어깨를 치고 가는 사람도 없고 부모에게 떼를 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없다. 나는 지갑을 챙기고 집을 나선다. 불을 끄고 나올까 하다가 그냥 문을 잠근다. 큰길로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본다. 내가 켜 놓은 불이 아직 집 안에 있다. 안심이 된다. 버스가 지나가지만 걸어가기로 한다. 거리의 공기는 두부처럼 부드럽다.
자동문을 통과해 지하로 내려간다. 비가 왔었는지 바닥 여기저기에 물기가 흩어져 있다. 애완동물 코너는 매장 구석에 있다. 토끼는 잠을 거의 자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토끼가 들어 있는 투명한 유리 케이스를 살짝 두드린다. 토끼의 빨간 눈동자를 보고 싶었지만 토끼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토끼는 팔짱을 끼듯 앞발과 뒷발을 모두 품 안으로 집어넣은 채 케이스 구석에 동그랗게 말려 있다.
수족관은 자주색 천으로 덮여 있다. 매장의 형광불빛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주위를 살핀다. 그리고 살며시 천의 한쪽 끝을 들춰낸다. 열대어들. 크고 작은 열대어들은 햇빛에 드러난 먼지처럼 천천히 물속을 떠다닌다. 나는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물고기처럼 입을 뻐금거려본다. 수족관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고 조그마한 벽돌집 굴뚝으로 공기방울이 올라온다. 나는 수족관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밀어낸다. 발돋움을 해서 수족관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물은 생각보다 따듯하다. 작은 물고기들이 먹이가 들어온 줄 알고 내 손 주위로 모여든다. 주둥이를 내밀어 내 손에 대어 본다. 순간 나는 주먹을 쥔다. 주먹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꺼내어 펼쳐본 손바닥 위에는 총알만 한 물고기가 누워 있다. 아가미를 헐떡일 때마다 무지개 빛깔의 비늘이 반짝거린다. 나는 물고기를 바지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매장을 빠져나온다.
거리에 가로등이 꺼지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분주해져 있다. 물고기를 넣어둔 주머니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다. 나는 걸어가면서 물고기가 주머니 속에서 녹아내리는 상상을 한다. 피와 내장이 분해되고 살이 뼈에서 떨어진다. 눈알이 흐물거리며 녹는다. 마지막으로 무지갯빛 비늘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내 몸을 덮어간다.
나는 골목길에서 고양이가 뜯다 도망간 쓰레기봉투 속으로 물고기를 던져 넣는다.
불이 꺼진 긴 복도. 그 끝에 L이 있다. 통유리로 안이 훤히 비치는 사무실 안에서 그는 혼자 앉아 있다. 그의 자리 위에만 하나의 형광등이 켜져 있다. 그는 외로운 섬처럼 보인다. 나는 머뭇거린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그가 나를 돌아본다. 죽음의 공포로 가득 찬 눈은 불결해 보인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 없는 눈에서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나는 품에서 칼을 꺼낸다. 왼손으로 그의 목젖을 잡고 뒤로 젖힌다. 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기도가 막힌 탓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서서히 가라앉는 그의 심연을 나는 끝까지 지켜본다. 대상이 사라진 살의는 다른 감정이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의지이다. 순수한 살의에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냄새를 맡았다.
비가 내리면 꽃이 핀다. 며칠 동안 나는 거리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다 다시 그 거리를 향기처럼 빠져나간다. 그러다 간혹 실패한 의미로 우주 속을 부유하고 있을 말들에 대해 생각 한다. 우주는 지금도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그 속에 L도 있을 것이다.
“밤하늘은 왜 어두울까?” 그가 물었다.
나는 술값을 치르고 남은 돈을 지갑에 넣다가 그를 쳐다봤다. 가로수 가지마다 작은 전구들이 감겨 있고 곳곳에서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젖이 위로 크게 튀어 나와 있었다.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았다. 스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 술집에서 나왔다. 왜 그런지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태양이 없으니 그렇지.” 내가 말했다.
우리가 보는 별들은 모두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들이다. 우주의 크기가 무한하다고 한다면 이런 별들 또한 무수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밤하늘은 이런 별들로 빽빽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정이다. 이렇게 따지면 밤하늘은 태양보다 15만 배나 더 밝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지구는 너무 뜨거워서 인간을 비롯한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는 우주의 모든 별들은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주가 스스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별이 지구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기 때문에 별빛의 세기는 점점 약해져 희미하게 보이거나 소멸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멀리 있는 별일수록 멀어지는 속도는 빛의 속도에 가깝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 역시 멀어진다. 따라서 빛이 없는 공간이 더욱 커져 결국 검은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이지.”
그가 말했다.
“어떤 물질이든 팽창을 하면 팽창하는 동안 에너지를 사용하지. 우주는 팽창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별빛에서 얻어. 그래서 우주는 내내 어두운 거야.”
“언제부터 천문학자가 된 거야?”
그가 웃었다. 고인 침을 삼키며 나도 웃었다. 목젖이 꿈틀거렸다. 겨울인데도 바람이 푸근하게 불어왔다. 눈이 내릴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여우의 빛’을 얘기했고 나는 최근에 만난 여자 얘기를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조직에서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우리는 곧 서로의 안부를 챙기고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내 머릿속으로 검은 풍선이 들어왔다. 풍선의 표면으로 두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나였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풍선은 커졌다. 풍선이 커지면서 두 개의 점도 서로 멀어졌다. 풍선이 커지면서 다른 한 점은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풍선의 반대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점은 처음엔 물고기처럼 보이다가 다시 총알처럼 작아졌다. 풍선이 커질수록 나는 점점 어두워졌다.
L의 집을 찾아간다.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공간은 왠지 청동빛을 띠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집은 발굴되지 않은 무덤처럼 서늘하고 조용하다. 나는 작고 반짝이는 숟가락을 꺼내 싱크대를 두드려 본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린다. 비누가 딱딱해져 있다. 수건은 바싹 말라 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는 발자국이 남는다. 책상 위에 빈 액자가 놓여 있다. 나는 그 액자를 그녀의 얼굴로 채워본다. 가까운 곳에서 트럭이 지나가는지 창문이 잠시 부르르 떨린다. 식탁에 유리잔을 놓고 나는 천천히 물을 따른다. 갑자기 눈앞이 다시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더듬더듬 약병을 찾는다. 약병이 손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병의 입구에서 하얀 알약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알약들 위로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는다.
빈 방의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다. 오랫동안 집을 비운 뒤 다시 문을 열면 알 수 없는 냄새가 난다. 내가 없는 사이 벽이 참았던 호흡을 한 것일까. 그 냄새가 낯설어 나는 잠시 촛농처럼 문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녀는 사랑이란 서로의 호흡을 감정하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알약을 하나씩 병에 담는다. 그녀는 내 진심을 알 것이다. ‘여우의 빛’은 오로라의 다른 이름이다. 북극에서는 오로라를 그렇게 부른다. L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안부를 묻듯 벽에 볼을 대고 조그맣게 숨을 쉬어 본다.
심사평
소설이 문학인 이유를 입증한 수작
예심을 거쳐 올라 온 열 편의 소설은 대체로 구성이 안정됐고 제가끔 독특한 문체를 보여줬다. 한국 소설의 기초가 탄탄하다는 사실의 증거로 여겨도 좋으리라. 박하의 ‘오션 파라다이스’, 오윤서의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가 마지막까지 논의됐다. ‘오션 파라다이스’는 투기성 오락에 중독된 사람의 시시각각으로 돌변하는 정신적 상황을 생활상의 궁핍에 비춰 절박함과 비루함을 동시에 임계점까지 끌고 간 작품이다.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는 배가 끊긴 섬에 남겨진 여인과 두 등대지기 사이에 조성된 관계의 미묘한 심리적 긴장과 그것을 미리 판단해 버린 여인의 불행한 파국을 재치 있게 연결시킴으로써 생각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웠다.
당선작 ‘여우의 빛’은 청부 살인업자라는 이색적 인물을 내세워 산다는 것의 근본적인 잔인함과 사는 자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치밀하게 반추한 작품이다. 심사자들은 당선작을 뽑는 데 쉽게 합의했다. 다른 작품들도 일정 수준에 도달했으나, ‘여우의 빛’은 소설이 문학인 이유를 가장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다른 작품에서는 문체가 상황을 정서적으로 강화하는 보조적 장치라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 문체는 상황과 길항하면서도 상황을 정돈하고 동시에 상황을 움직인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오정희 소설가·정과리 문학평론가
<당선소감>
새 책상을 주문했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
새 책상을 주문했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
책상을 주문했다. 인터넷으로 계좌이체를 한 뒤 담배를 피운다. 지금 쓰는 책상을 만져본다. 이 위에서 밥을 먹고 일기를 쓰고 TV를 보았다.
그리고 잠언이 가득한 글을 쓰고 버렸다. 맞은편 벽 포스트잇 한 장이 책상 뒤로 떨어진다. ‘지상의 짧은 삶에서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결코 고통과 헤어질 수 없다.’ 그런 글귀가 있었을 게다.
읽지도 않은 책에 먼지가 가득하다. 손가락으로 먼지를 벗겨낼 때마다 다른 종류의 후회와 위안으로 손톱을 바짝 세웠다. 생활은 불규칙했고 꿈 없는 잠은 지하로 뚫린 터널처럼 길었다. 깨어날 때마다 아찔했다.
건반을 누르듯 책상을 만져본다. 그동안 많은 무게를 견뎌줬다. 연애에 실패했고 시험에 번번이 떨어졌다. 한 번 충전한 휴대전화를 일주일 동안 썼다. 불어난 허리로 맞는 바지가 없었다. 외로우면 시를 썼고 다음 날 버렸다. 그즈음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치욕도 달콤하단 걸 알았다.
허리에 맞는 바지를 살까 하다가 헬스장에 등록하기로 한다. 이제 감당해야 할 당신들의 사건이 저 밖에 가득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생과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같이 웃어줬으면 좋겠다. 처음 소설을 써 보라고 하신 서종택 선생님과 내 글을 소설이라고 인정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 감사드린다.
책상을 하나 더 주문했다. 빨리 그곳으로 가고 싶다.
△1978년 포항 출생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석사 수료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09 문화일보 당선작-황지운<안녕, 피터>
<안녕, 피터>
황지운
영수는 운전대를 쾅, 하고 쳤다. 그 소리에 유진이 거울을 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도로만 뚫으면 다 해결되는 줄로 아는 멍청한 공무원 새끼들, 영수는 다시 한 번 운전대를 쳤다. 13번 국도로 들어가는 고가도로는 휴일을 맞아 교외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유진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유진은 왼손을 들어서 땀을 닦았다. 손끝에서 땀이 뚝, 하고 떨어졌다.
유진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진석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고 있었다. 진석의 셔츠는 땀에 절어 칙칙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진석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거대한 배가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으음, 진석이 몸을 뒤척이자 땀 냄새가 훅, 하고 올라왔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얼마 전 내린 눈이 논 위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논 위에서 콩콩콩, 뛰는 까치를 보면서 평화롭다는 생각을 했다. 유진은 그렇게 까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땀을 닦았다. 영수는 주머니를 뒤져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라이터가 고장인지 불이 붙지 않았다. 영수는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창밖으로 던졌다. 라이터는 포물선을 그리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라이터 사이로 보이는 날씨는 무척 청명했다. 낙엽은 잘 말라서 바람이 불 때마다 바삭바삭거리는 소리가 났고, 하늘은 눈이 부셨다. 배드민턴 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히터가 고장 난 건 차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스위치를 힘껏 돌린 게 장갑을 끼고도 손이 시리다고 말하던 유진이었는지, 성질 급한 영수였는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누군가 스위치를 돌리던 순간, 스위치는 힘없이 뽑혀버렸다. 누구의 잘못을 탓할 수는 없었다. 셋은 그저 창문이란 창문은 한껏 연 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히터의 열기를 그대로 맞으면서 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여행은 영수의 말년휴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셋은 5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셋과 재희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진석과 영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를 나왔고, 재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왔다. 넷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잠시 어울려 다니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만났다. 그 고등학교는 재희의 어머니가 지은 학교였다. 재희는 그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예쁜 여자애들이 많아서 다닐 만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학교 주위는 황량했고, 구멍가게와 오래된 아파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넷은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언제나 함께였고, 항상 즐거웠다. 진석이 입던 밑단이 다 해진 후줄근한 교복이나, 담배를 피우다가 교사에게 벌을 받던 영수의 모습도, 좋아하던 학교 선생님이 결혼하던 날 펑펑 울던 유진이나 가출을 밥 먹듯이 하던 재희도 모두. 매일매일은 비슷했고, 짜릿함이나 흥미진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넷은 아니, 셋은 그 세월에 만족했다. 고3 어느 봄날에, 재희가 그렇게 가버리고, 진석이 학교를 그만두고 난 후, 넷은 영영 모이지 못했다. 아니, 전혀 만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영수가 군대를 갈 때라든가, 진석이나 영수가 대학을 가는 일이 있으면, 셋은 만나서 맥주 한잔을 홀짝홀짝 비우면서 술집 벽에 붙은 티브이만 보다가 헤어졌다.
셋은 어제 재희를 화장한 곳에 가보기로 했다. 재희는 강원도 방태산 언저리에 뿌려졌다. 이사장은 재희가 산이라면 질겁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이사장은 재희가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선산에서 생을 마무리 짓기를 바랐다.
어쨌든 지금 그곳에 간다는 건 이제 와 생각해보면 미친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가자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에는 무척 좋은 생각처럼 들렸다. 그저 셋은 오랜만에 만났고, 무언가를 기념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유진이나 진석은 가끔 교외에 나가기는 했지만 전라남도를 벗어난 적은 없었고, 둘에게 강원도라는 지명은 하와이나 프라하처럼 멋있게 들렸다. 강원도에서 2년 남짓 머물고 있는 영수가 둘을 말려야했지만 영수는 너무 취해 있었다.
지금 정신을 차린 셋은 고가도로 입구에서 손으로 부채질만 하고 있다. 부채질은 하나마나였다. 영수는 주머니의 담배를 만지작거렸고, 혹시 좀 더 더워지면 저절로 어디엔가 불이 붙어서 담배를 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 생각을 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웃은 영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제 먹은 술은 영 깨질 않았다. 그건 영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진석은 모르겠지만 유진은 차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누군가 얼큰한 해장국을 한 그릇 준다면 영혼까지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진석은 2년 만에 고향에 들렀다. 너무 오랜만 아니야?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군복무 중이잖아, 라고 변명을 하곤 했지만 그건 핑계였다. 스무 해가 넘게 살아온 도시였다. 모든 것이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영수는 이 도시가 권태로웠다. 영수는 기차역 앞에 서서 이곳도 제법 도시 티가 나는군, 하면서 큰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다 온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도시는 너무 낯설게 변해버렸다. 그토록 영수가 드나들던 역 앞 오락실이며, 만홧가게는 텅 빈 건물만 철거 표시를 안고 서 있었다. 영수는 자신이 낯선 고장에 온 것처럼 불안했다. 영수는 벤치에 앉아서 담배 한 갑을 천천히 피웠다. 한참 후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이 덜 깬 유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영수는 고향에 오길 잘했다고 안도했다.
으으음, 하고 진석은 소리를 내면서 팔을 휘저었다.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영수는 쾅, 하고 다시 운전석을 쳤다.
“이 상황에서 저 자식은 잠이 온대니? 추헌곤, 저 자식 좀 깨워봐.”
“어머! 누가 추헌곤이래? 유진이라고 부르랬잖아. 왜 자꾸 옛날 이름을 부르고 그래?”
“아, 그랬나? 미안.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이름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5년이나 지났거든! 기분이 상하니까 앞으로는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줬음 좋겠어.”
“근데 왜 하필 유진이야? 알렉스나 토미, 이런 걸로 바꾸지 그랬어? 요새 게이 삐끼들은 그런 이름 안 쓰나?”
영수가 빈정거리자 유진은 몸을 살짝 틀어서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이름 바꾼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시비야, 자기 돈 들여서 바꾼 것도 아니면서, 하고 중얼거렸다. 유진은 5년 전에 이름을 바꿨다. 오래 전부터 유진이 간절히 원하던 일이었다. 추헌곤이라는 이름은 고풍스럽다는 느낌을 훨씬 지나쳐서 촌스러웠고, 무엇보다 너무 남자 이름 같았다. 이름을 지을 때, 삼대독자니까 돌림자를 써서, 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엄마는 무시해야 했다고 유진은 언제나 생각했다. 과거야 어쨌든, 유진은 지금의 이름이 무척 좋았다. 영어로 바꾸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남자 이름 같지 않았다.
영수는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유진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봤다.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턱선은 여전히 날렵했고, 수염 한 올도 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건 턱선뿐만이 아니었다. 입술도 여전히 새초롬했다. 아니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귀여운 남자였다. 하지만 영수는 재희에게도 그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 말을 남자에게 하는 건 사내자식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진이 입술에 립글로스를 발랐다. 유진은 새끼손가락을 날렵하게 들어서 입술이 더 반짝거리도록 정돈했다. 영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영수는 무안한지 괜히 빵빵거리면서 짜증을 냈다.
“루, 루씰!”
진석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차가 다시 한 번 출렁거렸다. 시발, 불안해서 운전해먹겠나. 영수가 투덜거렸다.
“…아, 꿈이었네.”
진석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무슨 꿈을 꿨는데?”
“루씰이 사람이 돼서 다른 남자랑, 그런….”
“루씰이 네 방에 있던 인형 맞지?”
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걔가 남자랑 뭐?”
“…그냥, 그런…그런… 꿈… 부끄럽게시리”하고 진석은 헛기침을 했다. 진석은 말을 시작할 때나 끝맺을 때 헛기침을 했다. 진석의 목소리는 점잖으면서도 음산하고 조용했다.
“영감탱이냐? 헛기침이나 하고.”
영수는 못마땅한지 한마디 뱉었다. 진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근데 이놈의 차들이 갈 생각을 안 해. 사람들이 밥 처먹고 도로로만 나왔나?”
“영수야, 그만 짜증 내. 너만 짜증 나는 것도 아니잖아.”
유진이 짜증스럽게 한마디 뱉었다. 영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영수가 왼손을 흔들면서 유진에게 화를 내려는 순간, 앞 차가 움직였다. 영수는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열린 창문으로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셋의 이마에 맺힌 땀이 빠른 속도로 식었다. 셋은 시원함에 안도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갈림길이 나오자 영수는 속력을 줄였다.
“왼쪽으로 가는 게 맞는 거지?”
영수는 조심스럽게 유진에게 물었다.
“응.”
“확실해?”
“응.”
영수가 길을 잘 못 찾는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영수는 항상 다니던 길이어도 약간 다른 각도에 데려다놓으면 길을 찾지 못해서 우왕좌왕했다. 수십 번 가 본 재희의 집도 항상 헷갈려했고, 유진의 아파트의 동과 호수도 잘 몰랐다. 유진은 갈림길이나 이정표가 나올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 길 맞는 거지? 를 외칠 영수를 생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근데 꼭 국도로 가야 되는 거야?”
영수가 말했다.
“재희가 고속도로를 싫어했잖아.”
“당연하지. 재희는 오토바이 타고 다녔잖아. 차가 있었으면 고속도로를 무척 사랑했을 걸? 국도로 가는 게 얼마나 돌아가는 길인지 알고는 있지?”
“몰라, 그냥 가. 난 오토바이를 타던 재희밖에 몰라, 그리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보다 풍경을 보면서 천천히 갈 수 있는 국도가 더 좋아.”
유진의 말에 영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다 좋으니까, 이따 편의점이나 슈퍼가 보이면 바로 서는 거다. 라이터가 고장 났어.”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셋이 탄 차는 첨단지구 13번 국도를 지나 담양으로 갔다. 셋은 도중에 편의점에 들러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산 후, 컵라면 세 개를 사서 해장을 했다. 아침 겸 점심이었다. 오는 길에 88고속도로 근처를 지나면서 영수가 다시 한 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자고 강하게 이야기하면서 핸들을 틀었지만, 둘의 찢어질 듯한 함성에 다시 핸들을 돌렸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라면 한 개만 먹겠다던 진석이 한 개를 더 먹을 동안, 영수는 담배를 피우면서 인도에 무성하게 난 풀들을 발로 건드렸다. 풀들은 영수의 발끝이 닿으면 휘청거리다가 다시 제자리를 잡기도 했고, 영영 부러져서 바닥에 누워버리기도 했다.
영수는 바닥에 누워버린, 반쯤 누렇게 변해버린 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희, 같았다. 아니, 여자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던 날부터 지금까지 주욱,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영수 같았다. 여자 친구는 상냥했고, 착했지만 군 복무기간 동안 기다려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영수는 기다려줬음 하고 생각했다. 딱히 사랑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줬으면 싶었다. 영영 떠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던 여자 친구가 지금 임신 5개월째라니. 영수는 손가락으로 여자 친구를 만났던 적을 세어보다가 안심했다.
적어도 영수의 아이는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자 친구와 마지막으로 자던 날, 콘돔에 구멍이라도 낼 걸 그랬어, 라고 영수는 생각했다. 영수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쌀쌀한 바람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영수는 몸을 웅크리면서 인도에 걸터앉았다.
“얘, 그렇게 앉아있지 마. 꼭 양아치 같잖니. 어쩜 앉아도 꼭.”
“남이사. 신경 꺼.”
영수는 유진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휑하게 뚫린 교차로가 눈에 들어왔다. 간혹 신호등 앞에서 깜박이를 켜고 서 있던 차들은 좌회전을 하거나 우회전을 했다. 영수 앞으로는 한 대의 차도 지나가지 않았다. 차가 지나다니면 공기가 안 좋다고 투덜거릴 거면서 영수는 아무도 없는 것이 쓸쓸하다고 느꼈다. 진석은 왕뚜껑 하나를 다 먹고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영수에게까지 후루룩 소리가 들렸다. 술이 깨면서 자꾸 우울함이 엄습했다. 기집애도 아니고 우울하기는, 하고 영수는 다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리고,
“가자.”
하며, 입가심으로 빵을 먹고 있는 진석과 막대 사탕을 입에 막 문 유진에게 말했다.
“담배는 다 피우고 차를 타야지.”
유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깐 뭐라고 하지도 않더니만 갑자기 왜 그래?”
“아깐 막히는 도로 위였고, 지금은 아니잖아. 나가서 다 피우고 들어와. 간접흡연이 얼마나 안 좋은 줄 알아?”
“너흰 몰라. 진정한 사나이의 괴로움을.”
“…우린 흡연자를 이해해야 해.”
진석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걔네들은 니코틴에 중독된 병자들이거든.”
진석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놀리는 거냐?”
“아니… 거짓말은 아니잖아. 너도 알잖아. 네 폐가 썩어가고 있는 거.”
진석은 다시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간접흡연으로 인해서 우리의 폐도 함께 썩어가고 있지. 우린 담배 한 대도 안 피우고, 폐암으로 죽을 수도 있어. 혹은 후두암 같은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그럼 우리는 죽기 직전에 영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원망하겠지.”
인생에서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이다. 하긴 언제는 도움을 바란 적이 있었는가. 영수는 입을 다물었다.
“삐졌어?”
유진이 영수를 쿡쿡 찔렀다. 영수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삐진 거 맞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 괜히 그러겠어?”
유진은 계속 영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만히 좀 있어! 시발, 가만히 있으니까 누굴 호구로 아나!”
영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진은 깜짝 놀라며 울 듯한 얼굴로 영수를 빤히 쳐다보더니,
“진석아, 나 가슴이 떨려서 도저히 영수 옆에 못 앉겠어. 자리 좀 바꿔줘.”
라고 말했다.
영수는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나이 처먹고도 계집애처럼 질질 짜는 게 쪽팔리지도 않냐? 아니, 그럼 애초에 사람 신경을 살살 긁지나 말지. 담배 좀 피우는 게 뭐 어때. 재희가 피울 때는 멋있다고 하면서 난리 치던 새끼가 말이야.”
“거기서 재희 얘기가 왜 나와?”
유진이 울먹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영수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나 운전 안 해. 잘난 늬들끼리 가든지.”
“…우리 운전면허증도 없어.”
진석이 말했다.
“뭐? 그 나이 처먹도록 면허도 안 따고 뭐한 거냐? 다들 인생을 왜 이렇게 헛사는 거야? 여기에서 군대 간 사람도 나밖에 없지?”
“군대나 학교 같은 제도권을 통해서 인간의 계급을 따지는 건 일차원적인 일이야…군대 갔다 오면 어른이 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른이 된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어른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그냥 어른 대접 해주니까 어른인 척하는 거지… 어른이라는 개념도 명확하지도 않고. 그저 세월이 흐를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유치해지는 거야….”
진석의 말이 끝나자, 영수는 한동안 잠자코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유치하다는 거야?”
진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죽일 자식, 영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진은 얼굴을 찡그렸다. 왜 유진에게 화를 냈는지, 영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수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리고 체념한 듯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가 쌩 하고 움직였다. 유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가 앞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석은 차에 타자마자 앞좌석의 두 명이 분위기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우석대학교를 지나자 전라도를 벗어났다.
왜 그랬을까. 유진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생각하느라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충청도를 지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유진이 좀 심하게 영수에게 뭐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영수는 언제든 유진이 짜증을 내면 잠자코 받아주었다. 유진은 울다 만 눈으로 영수를 훔쳐봤다. 영수는 입을 꾹 다문 채 운전을 하고 있었다. 군대에 가더니 사람이 변했다. 유진은 살짝 야속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지만 셋 중 누구도 점심을 먹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차는 득안대로 고가도로를 지나, 논산을 거쳐서 계룡시 방면으로 가고 있었다. 허기가 져서 일어난 진석은 창밖의 식당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점심 안 먹을 거야?”
진석은 입맛을 다셨다. 둘은 고개를 돌려서 진석을 보았다. 표정이 싸늘했다. 진석은 무서울 때 하는 것처럼 목을 움츠리고 둘의 반응을 살폈다.
“나, 난 삼겹살.”
진석이 말했다.
영수와 유진은 젓가락을 든 채 허겁지겁 삼겹살을 먹는 진석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천천히 좀 먹어라. 어째 사흘 굶은 애처럼 먹냐? 너 예전에도 이렇게 많이 먹었었냐?”
진석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는 혀를 끌끌 차며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유진은 고개를 돌리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영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유진이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우릴 끌어들여, 라는 둥 투덜대자 영수는 꽥 소리를 질렀다.
“시발, 옆에서 더럽게 꽥꽥거리네. 술 마시는 게 죽을죄냐? 한잔만 마실게. 됐지?”
“…너네 싸우는 게 꼭 오래된 부부가 싸우는 것 같다.”
진석이 입 안 가득 고기를 넣은 채 말했다.
“저 자식이 못하는 말이 없어.”
영수의 얼굴이 빨개진 걸 감추려는 듯 괜히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건 영수의 오랜 소원이었다. 유진과 부부가 되는 것. 유진이 남자를 좋아할 적마다 심하게 놀리던 영수였다. 일부러 유진 앞에서 레이싱걸 누드화보집 같은 것을 보면서, 착착 소리가 나게 페이지를 넘기던 영수였다. 언제나 유진을 좋아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생각만 했다. 어떤 여자들보다 유진은 예뻤다. 유진은 영수가 찾던 여자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제길, 영수는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입 안에 씁쓸함과 시원함이 퍼지면서 온몸이 나른해졌다. 영수는 까맣게 탄 삼겹살을 한 점 집어 먹었다. 유진은 영수의 잔을 빼앗으면서, 이제 그만 마셔, 라고 말했다. 아, 알아서 해, 라며 영수는 다시 삼겹살을 집어 먹었다. 거지 같은 인생이었다.
영수는 언제는 인생에 되는 일이 있었나 싶었다. 넘길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있는 것처럼 영수의 인생은 언제나 막막했다. 겨우 유진을 잊고 여자를 만났지만, 여자 친구는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극장에서도 인기 있는 영화는 영수 앞에서 매진되었고, 영수가 좋아하는 식당은 언제나 몇 달 못 가서 없어져 버렸다. 생애를 통틀어서 인생을 바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순간 죽어버렸다. 그 자식은 친구도 아니야, 영수는 생각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날씨가 좋았다. 재희는 일주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오랜만에 오전수업만 하는 날이었다. 그날 왜 오전수업만 했는지 뚜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냥 유진과 진석과 함께 누구의 집으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밖에서 배드민턴이나 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셋은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 후,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영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재희에게서 전화가 온 건 그때였다. 재희의 목소리는 반쯤 잠겨 있었다. 영수는 목소리가 왜 그래? 그러니까 담배 좀 작작 피워, 새꺄, 하하. 하면서 웃었다. 재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약간의 흐느낌이 들렸다. 재희의 말은 간단했다. 여기, 동네 근처 빌딩 옥상 난간이야. 영수는 옥상에는 어떻게 올라갔느냐고도 묻지 못했다. 네가 올 때까지, 한 발짝도 안 움직일게. 할 말이 있어, 였다. 영수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무슨 소리를 하냐, 라고 말했다.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수는 장난치지 말고, 이따 애들이랑 배드민턴 치러 갈 건데 같이 가자, 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재희는 유진과 진석에게도 전화했지만, 누구도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재희가 죽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 셋은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속았지? 하면서 나타날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재희는 죽었다. 어이없게도 교통사고였다. 재희는 빌딩에서 내려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역주행했다. 재희는 자동차 세 대와 부딪히고, 오 킬로 정도를 더 운전했다. 그리고 트럭을 들이받고 허공으로 날아갔다. 죽었다, 는 말을 곱씹을 여유도 없을 정도로 쏜살같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영수가 해야 했던 건 뭘까. 영수가 달려갔다면 상황은 변했을까? 영수는 아직도 그날의 그 대화를 생각해본다. 그때마다 재희의 목소리는 조금은 밝았다가, 조금은 어두웠다. 영수가 했던 말도 조금씩 바뀌었다. 하지만 재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영수야? 졸리지?”
진석이 졸다 말고 일어나서 영수에게 말했다.
“응, 조금.”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줄까?”진석은 영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영화 한편을 봤어… 딱히 재밌지는 않았는데, 뭐랄까, 감동적이었지… 그 감동이 우리가 항상 포르노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은 아니었어. 신도 아닌 남자가 음악을 연주해서 사람들을 구하는 내용이었지. 그때 전 세계는 레밍 바이러스가 퍼져 있었어.”
“레밍 바이러스가 뭔데?”
“…몰라. 어떻게 감염되는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그냥 그 바이러스에 걸리면 짧게는 1분, 길게는 석 달 안에 모두 죽어. 아니, 죽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하다가, 결국 죽어. 동맥을 긋든, 한강에서 뛰어내리든, 빌딩에서 뛰어내리든… 근데 영화를 보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어.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은 자살인 걸까, 타살인 걸까?”
“그 얘기가 재밌다는 거냐, 지금?”
잠깐만, 진석은 말했다.
“…손녀가 레밍 바이러스에 걸린 남자가 있지. 그 남자는 음악가를 찾아가. 그 음악을 들으면 잠시나마 레밍 바이러스의 활동을 멈출 수 있거든… 그때 손녀는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지. 손녀로는 미야자키 아오이가 나와. 결혼을 했어도 아름다운 여자지. …그런 여자랑 결혼하는 남자는 사형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어쨌든 손녀가 음악을 듣는 동안, 그 남자는 음악가의 어머니에게 말하지. 왜 늙어서 다 죽어가는 자신이 아니라, 손녀가 레밍 바이러스에 걸렸는지 모르겠다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해. 아름다운 것들은 빨리 죽고, 우리같이 추한 것들만이 남아서 세상을 지켜가는 거라고.”
“…그래서?”
진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넌, 그 얘기를 들으면 잠이 깰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나름, 재밌는데. 유진아, 재밌지 않았어? 난 그 영화 보면서 울었는데.”
으응, 유진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여튼, 영수는 투덜거렸다.
영수는 23번국도 송선 교차로에서 속도를 줄었다.
“여기에서 어떻게 가야 되는 거야?”
영수는 자고 있는 유진을 깨웠다. 유진은 으음, 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영수는 진석을 깨웠다. 진석은 눈을 반쯤 뜨고는 손가락도 펴지 못한 채 허공을 가리키더니 잠이 들었다. 시발, 나더러 어떡하라고, 영수는 차를 세워놓고 담배를 피웠다.
영수가 길을 헤매면, 재희는 어디에 있든 길을 가르쳐줬다. 재희는 길을 참 잘 가르쳐주었다. 영수도 재희가 길을 가르쳐주면 쉽게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재희는 보통 사람들처럼 큰 건물, 큰 도로를 중심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영수가 길을 잃은 지점에서, 어디에 서 있다고 이야기할 때, 영수가 그곳을 등지고 있는지, 마주보고 있는지, 왼쪽 혹은 오른쪽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가끔 영수는 어디에선가 재희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오싹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재희가 함께 있다는 건, 절대 꺼지지 않는 등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든든했다.
재희가 죽고 난 후, 영수는 교차로나 신호등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곤 했다. 영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수는 밤마다 같은 꿈을 꿨다. 재희가 나오는 꿈이었다. 재희는 저만치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흥얼거리면서 길을 걷고 있었고, 영수는 재희를 따라가고 있었다. 재희 앞에는 태양이 잘 마른 아스팔트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영수가 걷는 길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수는 재희야, 하고 불렀지만 재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영수가 온 힘을 다해서 길을 걸어도 재희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영수는 꿈에서 눈물을 흘렸다. 일어나보면 베개가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눈물은 닦아내도 계속 흘렀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영수는 걷지 못했다. 꿈속에 나온 진흙길처럼 걷는 게 버거웠다. 그럴 때마다 영수는 재희에게 전화를 했다. 재희의 전화는 언제나 꺼져 있었다.
영수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영수는 기어 옆에 놓인 유진의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재희의 번호를 눌렀다. 영수는 한참동안 그 번호를 바라보더니 종료버튼을 눌렀다. 이젠 확실히 알고 있다. 재희는 절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걸.
영수는 어디든지 가기만 하면 되지, 하는 심정으로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국도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다. 영수는 몇번 국도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쌩쌩 달렸다. 대충 북쪽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도로는 구불구불했지만 차를 타고 다니기에는 적당했다. 전국이 이런 도로들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겠지, 영수는 생각했다. 수많은 도로와 건물과 사람들 중에서 절반은 영수가 가보지 못한, 가보지 못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어디든 다를 건 없었다. 영수는 낯설 것도 없는 풍경을 바라봤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보듯 영수를 바라봤다. 쓸쓸했다.
연기군청을 지나서 조치원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영수가 다니던 학교가 있다. 영수는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았다. 학교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삼 년 남짓 다닌 학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즐겁지 않았다. 그냥 버티고, 지탱하고 있던 시간들이었다. 아니, 재희가 사라진 후, 모든 시간들은 그냥 흘러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영수는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충청도를 지나 남한강 대교에 들어서자 날씨가 흐려졌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이정표에 강원도가 쓰여 있었고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수는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이 저주받은 도시에 제 발로 들어오다니. 영수는 라이트를 켰다. 가로등이 없는 국도는 조금만 어두워져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에 반짝거리며 떨어지는 눈의 개수는 점점 많아졌다. 영수는 뻑뻑해진 눈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영수는 잠을 자고 있는 둘을 바라봤다. 둘은 점심을 먹은 이후부터 계속 잠을 자고 있다. 진석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차가 출렁거렸다. 영수는 지금 자신이 아침부터 쉬지 않고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가 치밀었다.
춘천, 홍천, 인제…이정표들이 보이고, 방태산의 이정표가 보였다. 그때마다 영수는 유진을 깨웠지만 유진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방태산의 이정표가 빈번하게 보이고, 우회전과 좌회전을 반복할 때였다. 31번 국도의 사거리에서 쉼 없이 쏟아지는 눈을 와이퍼로 닦아내면서, 흐릿해진 이정표를 물끄러미 살폈다. 에라, 영수는 직진을 했다.
운전석에 앉은 오다기리 조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유진은 그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그가 환히 웃으면서 유진의 손을 잡았다. 손끝은 차가웠지만 손바닥은 따뜻했다. 유진은 그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는 유진에게 사랑해, 라고 얘기했다.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유진은 행복에 겨워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순식간에 내려오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환희였다. 차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오다기리 조는 시발, 하고 외쳤다. 유진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야?”
영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밖으로 나가 차 문을 발로 있는 힘껏 찼다. 차 문은 힘없이 찌그러졌다. 똥차가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 하고 악을 질렀다. 유진은 창문을 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차는 앞바퀴가 바닥에서 살짝 떠 있었고, 뒷바퀴는 어딘가에 빠져 있었고, 주위에는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진은 황급히 차 문을 열었다. 차 문이 쌓인 눈 때문에 힘겹게 열렸다. 걸을 때마다 무릎이 푹푹 빠졌다.
“우리가 3박 4일 갇혀 있었던 거야? 무슨 눈이 이렇게 무섭게 많이 와?”
“그래서 여기가 저주받은 도시 아니냐. 왜 더 푹 주무시지 벌써 일어났냐? 그렇게 깨울 때는 일어나지도 않더니만.”
영수는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여기가 어디야?”
“…나도 몰라.”
“이 지경까지 오도록 말 한마디도 없었단 말이야?”
“설마 내가 이 지경까지 오도록 말이 없었겠어? 네가 안 일어난 거겠지.”
“몰라, 깨우지도 않았으면서 거짓말쟁이.”
유진은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을 닫자 눈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저 새끼를 죽일 수도 없고, 영수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뱃갑에 담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충청도에서 골프장 어귀를 지날 때 한 갑 더 사놓기는 했는데, 하고 영수는 담배를 아껴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는 먹통이었다. 유진은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던졌다. 쨍, 하고 핸드폰 케이스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진석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진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여기는…천국인가…?”
하고 진석은 비척비척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진석은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눈 위로 넘어졌다. 아, 아, 따뜻해. 루씰. 하고 진석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라이 같은 새끼, 영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얘기했다.
“이제 어쩔 거야? 책임져.”
“나더러 뭘 책임 지라는 거야? 내가 길 모르는 거 뻔히 알면서 자던 새끼가 누군데?”
영수가 소리를 지르자, 메아리가 되어서 울렸다. 영수가 윽박지르자 유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시발, 까딱만 하면 처울고 말이야. 뭐냐? 이게.”
“몰라, 나 재희 보러 갈 거야. 빨리 책임져.”
“…그럼 그날 나가서 붙잡지 그랬냐? 여기 와서 죽은 재희 보고 징징거리지 말고.”
영수는 아차 싶었다. 유진은 성큼성큼 영수에게 다가와서 영수의 뺨을 때렸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내가 너한테 맞을 정도로 잘못한 거냐? 그리고, 내가 거짓말한 거냐? 사실이잖아. 어디서 손찌검이야, 손찌검이.”
영수는 주먹을 들어서 유진의 배를 가격했다. 유진은 신음 소리도 못 내고 눈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아, 이게 아닌데. 영수는 안절부절못하며 슬금슬금 유진에게서 멀어졌다. 영수는 발끝으로 진석을 툭, 건드렸다. 그때까지 눈 위에 엎드려 있던 진석이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영수에게 다가왔다.
“…친구끼리 때리면 안 돼.”
하고 말했다. 영수는 그때까지 주먹을 꾹 쥐고 바르르 떨고 있었다.
“넌 또 뭐야? 옆에서 같이 처잔 주제에.”
영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너 목소리가 좀 이상해졌다. 왜 그렇게 부르르 떨어? 추워? 그리고 난 너한테 길을 척척 가르쳐줬어. 내가 어찌나 능숙하게 길을 가르쳐줬던지 네가 무척 좋아하면서 나한테 뽀뽀도 해줬단 말이지. 근데 꿈이었더라고.”
“상식적으로 내가 너한테 뽀뽀를 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화 돋우지 말고, 들어가서 다시 잠이나 자든지, 119에 신고라도 해보든지.”
“…여기가 재희가 있는 데야?”
진석은 영수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재희를 만나면 할 말이 있거든.”
“뭔데?”
“흠, 너는 모르는 일들이야. 신경 안 써도 돼.”
“너 왜 자꾸 숨기는 건데? 너 내 흉봤지?”
진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 뭐 눈에는 뭐만 보일 뿐이지, 라고 말했다. 영수는 쓸데없이 화가 치밀었다. 이 자식이 말이야. 누구 때문에 강원도에 편하게 도착한 건데 말이야, 하고 영수는 주먹을 쥐고 진석의 배를 때릴 참이었다. 죽은 듯이 쭈그려 앉아 있던 유진이 비척비척 일어나서 영수의 옆구리를 물었다. 악, 영수는 비명을 지르며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유진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영수 위에 올라가서 팔로 영수의 목을 졸랐다. 나쁜 자식, 어떻게 네가 날 때려! 영수는 꺽꺽거리면서 유진의 팔을 풀어보려고 애를 썼다. 영수의 얼굴은 벌게졌다가 새파래졌다. 영수는 팔꿈치로 유진의 배를 쳤다. 유진은 허리를 구부리며 주저앉았고, 영수는 유진의 가슴을 발로 쳤다. 퍽, 소리가 났다.
“그래, 넌 얼마나 잘한 게 있다고 올 때부터 지금까지 떽떽 거리냐? 한번 들어보자. 시발새끼야!”
영수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왜 그때 안 간 건데?”
유진은 쭈그리고 앉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너, 너도 안 갔잖아!”
유진이 말했다. 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영수는 그곳에 갔었다. 한참동안 길을 헤매다가 빌딩에 갔을 때, 재희는 없었다. 영수가 빌딩 옥상에서 내려오자 어디선가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수는 반사적으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토바이 한 대가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자동차 세 대와 부딪히고, 오 킬로 정도를 더 운전했다. 그리고 트럭을 들이받고 오토바이 운전자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영수는 아무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면서 도로 위로 착지한 운전자를 둘러싸고, 웅성거렸다. 영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것은 재희가 아니었다. 영수는 다시 재희가 아니었다고 중얼거렸다. 영수는 눈물이 나올까봐 눈을 감았다.
“너도 할 말 없잖아!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
유진은 비틀비틀 걸어서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영수는 유진의 팔을 꽉 잡고 흔들었다. 유진이 종잇장처럼 펄럭거렸다.
“…그만해!”
진석이 말했다.
“…그냥, 잊어버려.”
“너, 너 말이지! 너는…!”
영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관두자, 이제 와서. 눈은 아까보다 더 많이 쌓였다. 셋을 둘러싼 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유진도 영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유진은 그날 뭘 하고 있었나? 영수와 진석이 배드민턴을 치러 가자고 했던 건 기억이 났다. 하지만 재희의 전화통화 내용도, 그때 재희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호모새끼라고 학교에서 놀림 받을 때, 재희는 껄렁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괜찮아? 하고 물었다. 재희 옆에 언제나 북적거리던 남자들, 여자들, 선생님들. 여유로운 걸음걸이, 시니컬한 말투와 교복에 묻어있던 따뜻한 가정의 냄새 같은 것들. 재희가 죽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유진이 죽어야 했다. 유진의 눈물이 눈 위에 떨어졌다. 훌쩍, 하고 유진이 콧물을 삼키자, 영수가 휴지를 내밀었다.
“아까, 주유소에서 주더라.”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유진은 고마워, 하면서 웃었다.
“웃지 마, 흉해.”
영수가 말하자 유진은 다시 뾰루퉁해졌다. 귀여운 녀석, 영수는 유진을 보면서 쿡, 하고 웃었다.
“난 네가 더 귀여운데.”
진석이 말했다. 영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닥쳐 인마.”
영수는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에 눈이 들어갔는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영수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바라봤다. 담배 위로 눈이 떨어졌다.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눈이 세차게 내렸다. 어제, 강원도를 나섰을 때도 눈이 왔었다. 재희도 이 눈을 볼 수 있을까? 재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멍청이 같은 자식, 영수는 중얼거렸다. 영수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영수는 유진이 볼까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눈이 얼굴에 떨어지면서 녹았다.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차갑게 사라졌다.
재희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건 청춘이었다. 아니, 진심이었다. 셋은 아무렇지도 않게 연애를 하고,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면서 웃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마음을 다하지 못했고, 마음 한 쪽은 텅 비어 있었다. 미친 듯이 밥을 먹고, 미친 듯이 남자와, 여자와 섹스를 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기뻐야할지도, 즐거워야하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가볍고 무료하게 지나갔다. 셋은 열여섯, 열일곱에서 한 치도 성장하지 못한 채, 스물다섯 살이 부쩍 넘어버렸다. 아니, 애초에 어른이 될 기회 따윈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길을 걸어가도, 뒤처진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청춘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셋을 비웃기만 했다. 셋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영수는 희미하게 보이는 내리막길을 바라봤다. 반투명한 재희가 껄렁한 웃음을 지으며 저 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쁜 자식, 저리 가버려, 영수가 말했다. 재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영수도, 유진도, 진석도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물이 영수의 볼을 타고 내려와 눈과 섞였다. 안녕, 안녕, 재희. 영수는 중얼거렸다. 〈끝〉
친구 흔적 찾는 로드무비 형식, 세 청년의 무기력한 방황 그려
소설 심사평
예심을 거쳐온 9편의 소설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상통하기도 했고 엇갈리기도 했다. 작품을 이해하며 좋거나 모자람을 꼽는 데는 어울렸지만 그 좋고 모자람의 어느 점에 더 많은 무게를 둘 것인가에는 다소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논의는 다음 5편이었다.
‘하늘다람쥐도 아니었고’(최윤서)는 도박으로 거액을 잃고 자살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방송사 PD의 취재 전말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현장감은 활발한 대신 작가의 관심이 지나치게 퍼져 여러 모티브들이 하나의 주제로 집중되지 않은 흠을 가지고 있었다. ‘터미널’(배경열)은 이인칭으로 불수의 육체가 숨을 놓기까지의 의식을 끈질기게 붙들고 그 움직임을 전달해주고 있어 마치 임종의 중계를 듣는 듯한데 아쉬운 것은 그 전달이 육체의 불편에만 치우치고 저세상으로 미끄러지며 느낄 인간의 내면적 갈등에 대해서는 말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샛길’(김희남)은 폐지를 수집하는 여인의 일상을 뒤따르며 고단한 밑바닥의 삶을 묘사하는 데서는 매우 사실적이었지만 자기의 비루한 사진을 이용한 구호 홍보물 때문에 반발하는 등 종반의 반전에서는 그 사실감이 약화되고 있다.
우리의 토론은 ‘지뢰유실구역’(정운광)과 ‘안녕, 피터’(황지운)로 모였는데 두 작품은 미래의 희망 없음이란 우울한 전망을 드러내는 데는 함께하면서도 그 공간과 그 속에서의 장면 진행은 상반되고 있다.
‘지뢰유실구역’은 접경지의 섬에서 그 섬을 그토록 떠나고 싶어하는 여인이 반신의 불구로 힘들게 숨을 잇는 엄마를 버리고 제대를 앞둔 해병대 남자와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남자는 지뢰를 밟고 이송됨으로써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 좌절을 그리고 있고 ‘안녕, 피터’는 세 청년이 목숨을 버린 친구의 흔적을 찾아 자동차 여행으로 강원도로 떠나지만 결국 눈길에서 피폐해져 파투가 나고 마는 실의의 과정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의 것은 떠나고 싶어 했음에도 끝내 떠나지 못한 암담함을 폐쇄적인 공간 속으로 투영하며, 뒤의 것은 성장을 하지 못한 채 여전한 미숙아로 방황해야 하는 무기력을 막막한 분위기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하나는 신춘문예적 패턴을 보이며 깨끗이 지우지 못한 작위성으로, 다른 하나는 문체의 정밀성의 미흡함으로, 우리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우리는 선택해야 했는데 그 선택에는 젊은 백수가 넘쳐나는 오늘의 현실도 감안되었다. 행운의 당선자는 그러므로 겸손하게 작가란 타이틀을 받아들이되 앞으로의 분발로써 그 이름에 마땅한 내실을 이루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병익·박범신
쓸데없는 생각할 때 기분 좋아, 줄리아 하트의 음반에 감사를
소설 당선소감 - 황지운
당선 소감을 쓰겠다고 책상에 앉은 지 두 시간이 지났지만, 노래만 흥얼거린다.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십대 후반의 여학생이 자정의 공원에서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한다. 여학생은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검정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다. 그 여학생은 왜, 늦은 밤 춤을 출 수밖에 없었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소설을 쓰겠다고 책상에 앉으면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멍하게 앉아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고, 온몸의 감각들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는 시간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쓸데없는 생각이 늘어갈수록 기분이 좋다.
일단 ‘안녕, 피터’의 모티브가 된 줄리아 하트의 ‘배드민턴’에 감사한다. 줄리아 하트의 음반은 언제나 명반이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형중 사마와 청글 식구들에게 고맙다.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대학원 은사님들께도 감사한다. 컴퓨터가 고장 나 여태 쓴 소설이 몽땅 사라져버리고, 망연자실해 있던 나에게 신춘문예에 소설을 내보라고 권해준 지영 언니와 대학원 문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친구 미스 김, 언제나 소설적 영감을 주는 차차에게 고맙다. 또 한없이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당선 소감을 듣고 나서 “오메, 내 새끼!”라고 외치면서 좋아하실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한번만이라도 다시 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간절하게 해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외할머니를 떠올리면서 눈물을 글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명 박지애
▲1984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9 신춘문예 한국일보 당선작 /소설]
너의 도큐먼트
김금희
내가 처음 루팽을 만난 건 TV '만화동산'에서였다. 루팽은 나타났다 사라졌고 잡혔다가 달아났으며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났다. 모든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하다 마침내 루팽의 승리로 끝나면 이불에서 일어나 일요일을 시작했다.
사업에 실패하자 아버지는 루팽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삼 개월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왔다. 그것도 밤에, 그것도 몰래. 때론 아버지가 왔다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가,
면도기에 붙어있는 수염을 보고 눈치 채는 날도 있었다. 아버지는 대포폰을 쓰다 나중에는 공중전화로 연락했다. 어디서 자는 거야? 누가 엿듣기라도 하듯 아버지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산에서 지내. 서류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은 아버지가 산비탈을 올라가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두고 싶었다.
서류상으로 이미 남남인 엄마 가게에도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대개 무례하게 굴다가 겁을 주고 사라졌다. 엄마는 울다가 화내다가 나중에는 빚쟁이들과 데면데면 농도 섞었다. 빚쟁이로 등장하기 전에는 친구, 친척, 동료로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채무자를 벼랑까지 몰고 간다는 사채업자가 끼어있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신용불량자 신세를 면하겠다고 한동안 가게에 머물며 법무사를 찾아다녔지만, 아버지는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다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나였다. 양복바지에 코듀로이 재킷. 채주 표현으로는 '망했어도 남아있는 사장님 풍채'를 하고 아버지는 휙 하니 골목을 돌아나갔다.
찢어진 가게 차양이 바람에 들리더니 걸어오는 채주가 보였다. 점퍼를 껴입기에는 너무 일렀지만 채주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채주는 9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였고 위절제술을 고민 중이었다.
채주는 들어서자마자 가게 주인 티가 난다는 둥 아예 가게를 접수하라는 둥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맛밤을 뜯어 하나씩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친구들의 근황을 알렸다. 누구는 중형차를 몰고 누구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누구는 세 번 낙태했다.
누구는 원어민 강사와 연애하고 누구는 중국으로 떠났으며 누구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주인공만 달랐을 뿐 언제나 비슷비슷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누구는 이렇게 가게의자에 앉아, 위의 한 부분을 잘라내야 할 친구의 식탐을 들여다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 시각 매킨토시 도큐먼트를 열어 텍스트를 깔고 있었을 것이다. 손목에 쥐나도록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여야 하는 박봉의 일자리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나풀나풀 사라져버릴 듯 불안하던 데이터가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실물로 제본소에서 배달되는 순간은 극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여미가 죽었다잖아."
"여미가 죽어?"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집에서 심장마비인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평소 여미는 심장 질환을 앓지도 않았고 약물 중독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미의 심장은 아무 문제없이 삶을 견뎌오다가 어느 밤 갑자기 멈춰버렸다.
"몇 달 전 둘이 헤어졌다던데, 주용이 발이나 뻗고 자겠니."
채주가 쥐포를 하나 더 뜯었을 때 엄마가 가게로 들어왔다. 계양산 약수터에서 아버지를 봤다는 사람이 있다며 나서더니 성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잡히지 않을 것이다. 괴도 루팽이니까. 채주가 돌아간 뒤 가게와 붙은 뒷방으로 들어가 인터넷에 접속했다. '사람 찾기'로 여미를 검색하고 미니홈피에 들어가니, 방명록에는 이미 한 떼의 슬픔이 지나간 뒤였다. 놀람, 눈물, 안녕, 죽음 같은 단어들이 드물어질 때까지 방명록을 뒤로 넘겼다.
여미를 처음 만난 것은 15박16일 일정으로 떠난 중국 여행에서였다. 베이징에서 비행기로 둔황을 간 다음 기차를 타고 란저우, 시안을 거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각 과에서 추천한 학생 서른 명 가운데 여미와 나, 채주가 있었다.
여미 얼굴에서 가장 큰 특징은 왼쪽 입술 끝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푸르스름한 핏줄이었다. 옆에서 보면 푸른 털실 한 올을 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끝은 붉은 심장과 이어져있을 것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여미의 별명은 '80년대'였다. 몇 명을 빼고는 다들 80년대 생이었지만 여미 별명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80년대 운동권 여학생 같다는 뜻이었다.
여미는 야학동아리에서 활동했고, 풍물패에서 장구도 친다고 했다. 둔황 사막에 둘러앉아 장기자랑을 할 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하며 여미가 열창하자, 애들은 별명이 딱 떨어진다며 웃었다. 차라리 '낭랑 18세'나 '남행열차'를 불렀으면 나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미는 차분하고 신중했지만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여행사 스케줄에 따라야 하는 일정에서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당으로 향해야 했다. 안 그래도 향신료 때문에 젓가락이 가지 않던 음식은 그때마다 남았고, 여미는 음식을 포장해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시안에서도 장미꽃을 사라며 호텔 앞까지 쫓아온 여자애에게 포장해온 만두를 주었다. 그 만두는 오늘밤 뒷풀이 안주였어, 여행단 아이들이 힐책하듯 말하자 여미는 "배가 고프다잖아." 이렇게 답했을 뿐이었다.
"그만둔 게 아니라 잘렸어."
호텔 방에서 둘이 맥주를 마시다 야학동아리를 왜 그만뒀냐고 묻자 여미는 쿡쿡 웃었다.
"애들이랑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배시시 웃는 입가에 핏줄이 도드라졌다가 피부 속으로 다시 잠겼다.
"그래도 최소한 입사지원서를 채울 욕심으로 동아리에 들진 않았어."
여미는 내가 취조관이라도 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색했다. 시작 자체는 꽤 순수했다고 덧붙였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어 나는 여미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채주는 여미 별명 앞에 '오지랖 넓은'이라는 말을 붙이며 마뜩치 않아 했지만, 나는 여행 내내 여미가 좋았다. 모일 때마다 월드컵 이야기로 흥분하는 학생들이나, 겨울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냉소하는 교수들과 달랐으니까. 여미는 과외를 세 건이나 뛰고 논술 채점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테니, 우선 돈부터 모으고 봐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든 다른 길이 열리면 미련 없이 달아날 거라는 여미의 말을 그때 내가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학보사와 사진동아리, 자취방을 돌며 이십 대를 채워나가는 주용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는 함께 어울렸고, 주용의 권유로 여미는 학보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미는 주용과 '연애'했다. 빤한 삼각관계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여미를 괴롭혔다. 어느 날 전화해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소리 지르자 여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싫어."
그러면 내가 죽겠다고 하자 여미는 다시 냉정하게 말했다.
"너도 안 돼."
다음 날 엄마는 하루씩 교대로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자고 제안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엄마의 계획은 무모했다. 틈이 날 때마다 시내 곳곳을 돌아다녀보자는 것이었다. 차라리 흥신소에 의뢰하면 빨리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더 이상 대들지 않았다.
이제 외출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으니까. 가게에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피곤이 몰려와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입맛을 잃어 과자나 빵, 라면 따위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머리도 빗지 않은 채 카운터에 앉는 날이 늘었고 매일매일 현찰을 만질 수 있다는 소박한 기쁨조차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가게를 나서는 내게 엄마는 시내 지도 한 장을 내밀었다. 부채처럼 착착 접으면 세로가 30센티미터쯤 되는 지도에는 각 구가 반듯한 직선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엄마는 하루 동안 다닌 길을 표시해 두라고 했다. 추적이 성공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지도를 펴보았다. 계양산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나는 공단 옆에 세모로 가게 위치를 표시했다. 산에 있다는 아버지의 말은 얼마나 사실일까? 벤치에 앉아 시내의 산들을 찾아봤다. 전에 살았던 동네와 가장 가까운 곳이 철마산, 어쩌면 그곳이 아닐까? 하지만 아버지의 회사가 있었으니 빚쟁이들을 만날 확률은 어느 곳보다 높다.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볼펜으로 철마산을 죽죽 지웠다.
언제까지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주안역에서 내려 옛 시민회관 쪽으로 향했다. 두리번거리며 걷다 입간판에 턱을 부딪치고 지도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시내에서는 정신 똑바로 차려라."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이렇게 충고했다. 그때는 웃어 넘겼지만 아버지 말이 맞았다. 시내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순식간에 능선과 능선을 넘어 부지런히 달아나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 검도장이었던 곳은 어학원으로 바뀌었다. 서점은 네일아트숍이 되었다.
상점들만 변하는 게 아니다. 이십육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이 매순간 거리를 채운다. 게다가 내가 걷는 동안 아버지도 어디론가 끊임없이 걷고 있을지 모른다. 루팽을 좇는 갈리마르의 막막함이 이랬을까, 나는 이내 모든 것에 시들해졌다.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전화로 채주를 불러냈다. 채주는 식구들이 위절제술을 말린다며 한숨이었다. 뚱뚱하기는 하지만 멀쩡한 위를 잘라낼 정도는 아니라며, 채주 엄마는 아예 몸져누웠다고 했다.
"날 이렇게 뚱보로 키워놓고, 무책임하게."
채주는 가족들이 반대하더라도 인터넷에서 병원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위가 슬퍼하겠다, 떼어내지 못해 안달하는 널 보면."
위로하기 위한 농담은 썰렁하기만 했다. 나는 말에 서툴렀다. 회사에서 편집회의라도 열면 마음만 안달복달할 뿐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을 제대로 꺼내놓지 못했다. 마취주사를 맞은 듯 얼얼한 입안을 혓바닥으로 부드득부드득 문지를 뿐이었다.
"병원에 같이 가주라."
내가 탈 마을버스가 왔을 때에야 채주는 속내를 드러냈다.
"혼자서는 비참할 것 같아."
나는 그러기로 약속하고 버스를 타려다가 여미네 집 주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정류장에 내릴 무렵 채주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이 청승아. 골목 어귀에서 지도를 펼치고 주안과 가까운 산에 엑스를 그렸다. 내일은 엄마가 이 지도를 들고 거리로 나갈 것이었다.
엄마와 내가 가게를 들락거리는 열흘 동안 지도도 나달나달해졌다. 엄마는 추적의 배경을 동그라미로, 나는 엑스로 표시했다. 동그라미와 엑스는 마치 경주하듯 지도 위를 내달렸다. 엄마의 발길은 갈산으로 갔다가 여전히 계산과 계양동 근처를 헤매고 있었다. 약수터에서 봤다는 말이 아직까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와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지만 엄마의 표정은 그런대로 밝아졌다. 길거리에서 판다며 내게는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도트무늬 머리띠를 사오거나, 화분을 들여오는 날도 있었다.
지도에서 내 동선은 주안에서 시청을 지나 수봉산을 거쳐 항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채주와 지하상가를 돌아다니거나, 계획에 없던 곳으로 혼자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우리가 다닌 대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주용이 살았던 원룸 주변을 배회하기도 했다. 붉은 벽돌로 쌓은 건물의 삼층, 작은 테라스에는 철제 의자가 하나 나와 있었다. 창문 밖으로 커튼자락이 비죽이 나와 바람에 탈탈 흔들렸다.
거리 곳곳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뒷모습을 만났다. 그들은 테이크아웃 커피숍에 앉아있거나, 보도에서 내려와 택시를 타거나, 과일 상자를 들고 언덕으로 올랐다. 아버지는 종종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무르며 서 있었는데, 그런 버릇이 있는 중년 남자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거리를 무작정 걸어 다니는 방법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버지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끝까지 쫓아갔다. 처음에는 단숨에 따라잡아 얼굴을 확인했지만, 점점 뒤를 밟는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에는 누구도 아버지일 수 있었다.
한 번은 역 광장에서 토스트를 사먹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집 앞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을 똑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추적자로서 내 역할이 어설펐는지 남자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몸을 숨길만한 모퉁이나 가로수가 없을 때는 길에 멀뚱히 서서 고스란히 시선을 받았다.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가자 남자는 홱 뒤돌아 선글라스를 벗고는 눈을 홉떴다. 뒤돌아 뛰면서 모든 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입가는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얼굴은 아버지와 전혀 달랐다.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미네 집 주소를 이메일로 알려준 사람은 주용이었다. 클릭하자 '여기 여미가 있어'라는 문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스크롤바를 내렸다. 첫 사진은 군데군데 색이 벗겨진 흰 벽, 흰 문, 흰 쇠창살로 된 집 앞을 지나는 어린 남자애였다. 오른쪽 한 귀퉁이에는 줄무늬고양이가 쓰레기통 위에 올라 남자애를 지켜본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흙빛 같은 뒷덜미, 풍선으로 얼굴을 가려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다. 더 내리자 안경잡이 남학생 하나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고 스포츠머리의 청년이 난감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그 옆을 지나가는 여자애 셋, 똑같은 레깅스를 신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여미는 아니다.
다시 아래에는 패스트푸드점 의자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한 여자. 고개를 푹 숙인 여자의 뒷머리 숱이 듬성듬성 빠져 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열두 시 너머를 가리킨다. 여미일까? 이불을 둘둘 감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할머니가 마지막이었다. 합판 천장 아래에는 벌 떼가 집을 지어 검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여미가 여기 있어, 주용은 다시 반복하더니 여미네 집 약도를 그려 놓았다.
여미가 있긴 어디에 있다는 거야, 미친놈. 창을 꺼버리고 지도를 펼쳤다. 송현동에는 파랗고 노란 도로선이 엉켜있을 뿐 주용이 알려 준 달동네박물관은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동그라미로 여미네 집을 대강 그려 넣다가 지도의 표시들을 선으로 쭉 이어보았다.
항구와 놀이공원, 전철역과 도서관, 백화점과 산, 달동네박물관과 가게, 약수터를 모두 통과한 선은 지도 끝에서 멈췄다. 일정한 각도로 꺾인 모양이 마치 별자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으로는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주용은 여전히 묻고 있었다. 여기 여미가 있잖아, 안 보여, 정말 안 보여?
채주는 위절제술 대신 식도와 위 경계를 밴드로 묶는 시술을 받았다. 20cc 정도의 위만 남겨서 먹는 양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수술을 앞둔 일주일 동안 채주가 '최후의 만찬'을 함께 즐기자고 했다. 채주와 나는 인터넷으로 맛집을 검색해 강남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만찬의 마지막 날, 월미도 횟집에서 채주는 갑자기 울었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 회 한 점을 깻잎에 싸서 내밀었다. 채주는 어깨를 떨면서도 씩씩하게 받아먹었다.
수술을 받고 나서 채주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4주 동안은 죽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뒤로도 정기적으로 가서 밴드를 조여야 한다. 둥근 밴드 안쪽에 풍선이 달려 있어 몸 밖에서 물을 넣고 뺄 때마다 위의 크기가 조절된다고 했다.
"위가 줄어든 게 느껴지니."
"그럼!"
채주는 가슴 부근을 문질렀다.
"우선은 먹지를 못하니까."
수술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100킬로그램 가까이 줄어든 사람도 있다고 했다. 밴드에 묶여 몸은 몸이되 몸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채주의 위를 상상했다. 채주는 과거 사진들을 모두 불태워버릴 거라고 말했다.
"네가 가진 사진도 다 내놔."
"그러면 스물여섯 이전의 너는 어디에도 없잖아."
채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삼겹살이랑 장어, 닭다리살과 함께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거지. 이제 새 출발이야."
채주를 만나고 돌아오니 엄마가 얼마 전 계양산에서 아버지를 봤다고 했다. 허둥지둥 쫓아가자 쏜살처럼 사라졌는데, '여보' 하고 부르자 힐끗 뒤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엄마 손으로 딱 잡으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 뒤로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붉은 매직으로 지도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는 이제 외출을 줄여야겠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불이 들어오지 않던 간판을 바꾸고 형광등을 더 단다. 마트에 나가 새로 출시된 과자 종류를 확인하고 가게 밖 골목에 파라솔을 놓는다. 삼천 원마다 스티커를 한 장씩 줘서 '福'자를 채우면 세제를 준다. 엄마 입에서 이런저런 계획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문을 더 남기려면 도매점에 직접 가서 물건을 가져와야겠다는 엄마 말에 나는 건성으로 응, 하고 대답했다.
"네가 운전면허증을 따라."
이번에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젊었으면 내가 면허 따서 소형트럭이라도 몰고 방방곡곡 돌아다니겠다마는."
엄마 눈이 아득해지더니 차양도 새로 달아야겠다고 덧붙였다.
"펄펄 날아오르는 걸 말아놓은 게 몇 달짼지."
엄마가 본 사람이 맞았는지 이틀 뒤에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걱정 말아라, 전화를 받자마자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무얼 하며 지내냐고 묻자 머뭇거리다 아직도 산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산이 어디냐고요, 내 목소리가 높아지자 엄마가 전화기를 빼앗았다.
"식사는 했어요?"
전화기를 다시 빼앗으려는 나를 밀쳐내며 엄마가 통화를 마쳤다.
"살아있는 거 알았으니 됐어. 훌훌 털고 다시 돌아올 거다."
전화기에 찍힌 발신번호는 '76'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동인천 근처에 있다고 확신했다. 항구로 향하고 있던 내 지도상의 추적라인은 정확했던 셈이다. 나는 역에서 신포동까지, 다시 차이나타운까지 걸으며 만나는 공중전화마다 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엄마 말을 믿지 않았다.
중구청을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향하는 길은 자동차 하나가 겨우 지날 만큼 도로 폭이 좁았다. 옛 조계지 시절에 지은 건물들을 따라 오르면, 치파오와 중국신발, 효자손과 나무칼 같은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이 나온다.
나는 그 앞을 기웃거리다 손지갑을 하나 샀다. 낮에는 자유공원에 올라 장기 두는 노인들을 지켜보거나 파라다이스 호텔 주차장에서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저녁에는 얕은 둔덕을 줄지어 오르는 가로등이 나를 자꾸 걷게 했다. 쇠락한 거리와 어울리게 내 걸음도 느릿느릿했다. 박문사, 중구대서소, 칠성통상, 신공항 공인중개소, 중앙동 커피점을 지나 드디어 홍등의 무리가 나타나면, 하루의 추적을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아버지를 발견했다.
언덕을 따라 중국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차이나타운,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거리가 끝나고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지난 뒤였다. 회색건물의 작은 마당에서 아버지가 남자 셋과 화투를 치고 있었다. 전보다 더 야위어서 볼이 움푹 파였지만, 염색했는지 머리카락은 검었다. 건물은 사회단체에서 만든 노숙자를 위한 재활 센터였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아버지는 파란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재활 센터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창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손짓하자 남자들은 왁자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아버지는 주변을 정리했다. 여자가 다시 나와 종이쪽지를 건네주며 무어라 설명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아버지가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얼른 뒤돌았다.
가게에 돌아와서도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지방신문 기사 하나를 찾았는데, "노숙자들에게 무료 급식과 譴結? 잠자리를 제공해 '재활 의지'를 불어넣음"이 시설의 목적이었다.
결국 밥을 먹고 씻고 잘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평범한 일상조차 기사에서는 전혀 다른 무게였다. 노숙자로 들어왔다가 나중에는 시설 도우미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내용도 읽었다. "도움이 도움을 낳는 것이죠." 관계자 말을 인용하고 당사자 사진도 올려놓았는데,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똑같이 파란 조끼를 입고 있었다.
"시설에 들어오고 나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어요. 앞만 보고 달려오던 그 시절 욕심과 좌절이 사라지고 나니 새 삶이 열렸죠." 그러나 잘 적응하다가도 센터에서 달아나 노숙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입소자들이 많다는 말로 기사는 끝나고 있었다.
지도를 꺼내 작은 별표로 재활 센터를 표시했다. 엄마의 붉은 원과는 20센티미터 거리도 안 된다. 가게는 그보다 더 가깝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것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종적을 감춘 것들도 있었다.
거주지 불명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되자 의료보험증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신분을 보장해주던 일상적인 것들이 가장 먼저 이별을 고했다. 돌아온다, 주민등록과 의료보험, 국민연금과 보험증권, 은행통장이 있어야 하는 일상으로. 하지만 그것은 곧 파산한 가장으로, 갚을 수 없는 빚과 루팽처럼 몰래 집을 오가야 하는 피로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를 만나리라 기대했던 곳은 약수터일까, 항구일까, 역 광장일까, 차이나타운일까. 아버지를 잡아당겨 채우려는 것은 내 도큐먼트일까, 아버지의 도큐먼트일까. 나는 어느 쪽에도 자신이 없어 지도를 접어 다시 가방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 버스에서 내렸을 때 서른 명 정도의 남자들이 정류장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쪽문에는 간판도 없이 파란 글씨로 '인력'이라고 써있었다. 주인이 건물 문을 열자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경쟁하듯 좁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늙은 남자들은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물었다.
여미의 집으로 향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이유여서는 안 되는 것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지웠다. 얼얼한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스물여섯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도 아니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푸르스레한 핏줄 때문도 아니다. 심장이 멈춰버린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옆에서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해줬으면 싶었다. 달동네박물관을 지나 색색의 포스트잇처럼 지층에 붙은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달동네의 일부를 헐어내고 아파트 단지를 지었지만, 비탈길을 타고 오른 낮은 지붕들은 여전했다.
골목에서 녹색대문 집을 찾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패에는 남씨 성이 적혀 있고, 우편함에는 여미 앞으로 온 보험회사 홍보물도 보였다. 대문 앞에 서서 마당을 훔쳐보았다. 집안에서는 기침소리가 크게 났을 뿐 조용했다.
십 분쯤 머물렀을까, 등 뒤에서 한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눈, 위로 도톰한 입술, 한눈에 남동생인 줄 알았다. 검은 점퍼를 입은 남자는 주머니에 한 손을 찌른 채 다시 물었다.
"누구세요?"
"저, 여미… 말인데요, 소식을 늦게 들어서 와보지도 못하고."
뒤이을 말을 준비했지만 그는 조금도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열쇠로 문을 열었다.
"우리 집에는 그런 사람 안 살아요."
당황한 나는 몇 걸음 물러섰다. 집안에서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엉뚱한 사람을 찾아."
한 시간 정도 더 서성이는 동안 집안에서는 불이 켜지고 텔레비전 소리가 떠들썩하게 새어나왔다. 생선을 굽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냄새가 풍겨왔다. 바람이 불어 어디선가 검은 봉지가 날아오더니만 계단을 걸어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다시 골목을 내려와 역으로 빠르게 걸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뒤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바짝 붙이고 뛰었다. 구두 안축으로 발뒤꿈치가 닿을 때마다 욱신욱신 아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잊는 거다. 뺨을 한 대 맞은 듯 붉어지던 남자의 볼이 떠올랐다. 아니, 기억하는 거다. 형광불빛처럼 생선냄새처럼 된장찌개처럼 텔레비전 소리처럼 가볍게 사라진 비닐봉지처럼. 얼굴이 젖었다 마르는 동안 길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일주일 만이었다.
다시 한 번 담을 넘겨다보았다. 세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버지는 이곳에 있을 거였다. 내가 형사 갈리마르가 되지 못했듯, 아버지도 괴도 루팽이 될 수는 없다. 철커덕, 소리가 나서 보니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자전거 브레이크를 풀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먼저 길 아래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운동화끈을 다시 묶는 척 시간을 끌었더니 뒤에서 그만큼 서 있었다. 주말인데다 축제기간이라 차이나타운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들과 어깨를 툭툭 부딪혀가며 중구청으로 내려갔다.
어디로 갈까 막막해 하다가 중화가 입구, 왕희지 동상 옆에 마련된 야외공연장으로 향했다. 축제 기념으로 경극을 공연하고 있었다. 중국식 공갈빵과 족발, 술을 파는 천막도 보였다. 팸플릿을 받아들고 간이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공연장 밖에서 기다렸다. 술 취한 양귀비가 백화정에 오지 않은 현종을 원망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양귀비가 물러나고 손오공이 무대 위로 올라와 거북이와 티격태격하며 무공을 다투고 나서 경극은 끝났다.
나가야 하나, 다시 걸어야 하나, 아버지와 마주쳐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자주색 공연복을 입은 소녀가 삼십 개가 넘는 훌라후프를 스텝에게 받아 돌리기 시작했다. 몸을 완전히 휘감으며 빠르게 회전하는 훌라후프들은 꼭 커다란 비눗방울처럼 보였다.
한동안 음악에 맞춰 돌리다가 리듬감을 잃었는지 훌라후프가 소녀의 발등으로 우르르 떨어졌다. 사람들이 엉거주춤 일어서서 소녀를 살폈다. 스텝이 훌라후프들을 허리께로 올려주자, 소녀는 꾸벅 인사한 뒤 다시 돌렸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공연도 실수도 망설임 없이 능수능란한 중국 소녀가 부러웠다.
아버지는 공연장 밖에 없었다. 놓쳤다고 생각했을 때 맞은편에서 자전거가 나타났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같은 거리를 밀며 걸었다. 밴댕이 횟집이 몰려있는 곳에서도 공연 중이었다. 탱크톱과 짧은 치마로 여장을 한 남자가 "어머님, 아버님들 청춘을 확실히 돌려드릴게." 하며 노래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정류장으로 향했다.
청추우운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아버지는 도로를 가로지르지 않았다. 못 다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데, 가는 세월 잡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다고 먼저 사라지지도 않았다. 청추우운아 내 청추운아, 어…딜… 갔느냐.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아버지는 맞은편에서 줄곧 나를 지켜보고 서있었다.
버스 두 대가 먼지를 몰고 정류장으로 들어와 사라지는 동안에도 우리 간격은 그만큼이었다. 나는 세 번째 도착한 버스를 행선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타버렸다. 걸어오는 내내 아버지가 묵직하게 밀어냈던 것은 자전거가 아니라 나였다.
늦가을 밤 추위는 버스 안까지 따라왔다. 지도는 인쇄 부분이 벗겨지면서 속지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끄트머리를 잡고 뜯어내자 별자리의 마디들이 차례차례 사라졌다. 조금 더 힘을 주자 지도는 손톱으로 긁은 듯 긴 자국을 남기며 찢어져 버렸다.
이제야 몸이 녹는지 다리가 떨렸다. 소형트럭을 몰고 싶어 하는 엄마는 가게에 새 차양을 달 것이다. 여미가 죽었어도 녹색대문집 사람들은 저녁이면 생선을 구울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주용의 카메라는 계속 여미를 찍을 것이다.
심지어 시간이 흐르면 실리콘 랩밴드와 풍선조차 채주의 몸이 될 것이다. 창문을 열어 지도를 버렸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도로표지판에 부딪힌 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채며 속삭였다. 이제 남은 이 텅 빈 도큐먼트야말로 네 것이라고.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게. <끝>
[당선소감] "당선소식 듣던 날도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 두려움 이기고 쓰겠다"
전철을 타고 철교를 건너다 강 위로 아주 무겁고 농밀하게 돋은 비늘들을 보았다. 그것은 바람을 따라 서서히 일어서며 끊임없이 일렁였다. 아주 잠깐 햇빛이 돋았다가 사라졌을 때, 오늘의 기쁨이야말로 저 황금 비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삶을 추동하겠지만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 첫 걸음을 떼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앞으로의 여정을 따져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당선 소식을 듣던 그날에도 변함없이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위안한다. 내 작은 방을 벗어나 거리로 향할 때 비로소 소설이 완성된다는 믿음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도.
부족한 작품을 세상으로 불러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한국일보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글쓰기의 출발점이었던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은 고통스러울 정도다. 같은 글을 몇 번이고 읽어주었던 남편에게는 어떠한 감사의 말도 부족할 것 같다.
시부모님을 비롯한 사랑하는 가족들, 인하대 국문과 선생님들과 친우들, 편집자 생활을 하며 만났던 동료들과 '책'들에도. 더불어 내 소설의 원천인 이름 모를 '당신들'에게도. 나는 언제나 덜컹이며 당신들과 함께 흘러갈 것이다.
때론 내 발을 밟은 당신에게 눈을 흘기며, 때론 자리 하나를 두고 당신과 신경전을 벌이며, 만 원에 석 장짜리 '올드 팝송'이라도 울리면 우리는 하루의 피로를 걸어둔 채 잠시 숨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일상이 또 다른 비늘로 돋아날 그날을 기다리며, 두려움을 이기고 나는 쓰겠다.
[인터뷰] 소설가 꿈 위해 9월 사표내고 글만 쓴 몇달… "아, 살았구나"
"'아, 살았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더라구요. 호호호."
김금희(30)씨는 당선 통보를 받는 순간에도 소설을 쓰고 있었다. 자기암시의 힘이었을까? "중학교 때부터 소설가를 꿈꿔왔다"는 김씨는 "서른이 되면 소설가가 돼있으리라고 꿈꿔왔는데, 신기하게도 이뤄졌다"며 활짝 웃었다.
출판사 편집자로 직장생활을 한 지 7년째. 책 만드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던 김씨는 올 여름 갑자기 몸이 아팠다. 그의 '오랜 꿈'을 눈치챈 회사 동료들은 "네가 글을 못 써서 먹병이 났구나!"라며 한 마디씩을 건넸고, 김씨는 9월 사표를 냈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글만 썼고, 그래서 나온 3편의 단편 중 첫번째 소설이 거짓말처럼 그에게 소설가의 길을 열어주었다.
당선작은 빚 독촉에 시달린 아버지가 괴도 루팽처럼 변신해 도시 곳곳으로 숨어들고, 주인공은 그런 아버지를 찾아다닌다는 줄거리다. 아버지의 부재(不在)라는 익숙한 소설적 테마를 다루면서도 주인공이 '비어있는 아버지의 공간에서 내가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깨달아간다는 성장소설의 요소를 적절히 결합시키고 있다.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라고 한다면 불편할 것이고, 또 커다란 주제를 가진 작가라고 해도 버거워할 것이죠. 그 가운데 놓인 작가가 되고 싶어요"라는 김씨. 김씨의 고민은 'IMF 세대'로 불리는 자신들의 세대적 정체성이다.
운동권 조직은 와해되고 학생회는 등록금 투쟁을 하고 있을 무렵 대학에 입학한 그는 선배들이 "쟤들은 생각이 없어, 잘 노는 세대야, 세계로 가는 세대야"라고 자신들을 규정할 때 느꼈던 일종의 모욕감이 자신의 소설적 동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래의 기성 작가들이 개인의 내면 탐구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세대가 처한 사회ㆍ경제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
당선 소식을 전했을 때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김씨의 남편 역시 이미 신춘문예로 등단한 평론가 강경석(34)씨다.
"'여기 지루해, 저긴 감동적이야'라고 제 작품에 훈수 둘 때마다 '흥, 평론이나 쓰는 주제에 어떻게 소설을 알겠느냐'는 식으로 반발한다"고 말한 김씨는 "그래도 그 사람이야말로 내 소설의 가장 훌륭한 독자이자 비평가"라며 결혼 3년차 새댁다운 멘트를 날린다.
이미 쓴 습작들에 돈 문제, 삼각관계, 실업, 운동권 선배의 경험, 가족 등 많은 주제가 들어있다는 김씨는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쓸 수밖에 없어요. 어쨌든 생활이 묻어나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라고 했다.
[심사평] 조화롭게 이야기 꾸려나간 구성 돋보여… 본선 세편은 현실괴리·상투성에 울림 못얻어
예심을 거쳐 올라온 10여 편의 작품 가운데 가상적 현실을 다룬 작품이 절반이 넘었다. 판타지든 알레고리든 그것이 현실 속의 문제와 축을 이루어야 울림이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최종적으로 네 편을 골라냈다.
'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수행해나가는 한 병사의 이야기인데 그것이 가상공간의 게임캐릭터라면 이미 익숙하다 못해 식상한 소재이고, 현실 속의 전투라면 왜 이런 전투를 하는 것인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싱글 왈츠'도 노래방과 같은 형태로 눈물방을 운영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발상은 신선하나, 그렇게 흘려야 하는 눈물의 의미가 잡히지 않고 소설적 구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여자의 부엌'은 말만 부엌가구 디자이너이지 실제론 부엌가구를 팔러 다니는 여자의 핍진한 삶과 고객들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신분상승욕 등이 잘 그려져 있기는 하나, 그것이 치정으로 연결되고 그런 치정의 해결이 남자의 아내를 통해서라면 결말이 너무 상투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여기에 비해 '너의 도큐먼트'는 집을 나간 아버지를 찾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앞서의 작품들보다 문장 감각과 묘사력이 뛰어나다. 몇 개의 중심인물들의 삽화를 앞뒤로 잘 배치하여 전체 이야기를 조화롭고도 풍성하게 만들어내는 소설의 구성 솜씨도 돋보여 오랜 의논 없이 바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자, 그리고 올해는 뜻을 이루지 못한 응모자 모두 부디 정진 바란다.
●심사위원이제하(소설가) 이순원(소설가
2009 조선일보 당선작-채현선
<아칸소스테가>
채현선
아내는 심장근육이 굳어가는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아내의 심장은 언제 멈출지 모른다고 했다.
아내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첫사랑을 찾지도 않았다.
조바심을 내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오히려 내쪽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리고 끊임없는 고난에 부딪히면서
녀석은 자신만의 적응을 모색했을 거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외출했던 아내가 이구아나 한 마리를 안고 돌아왔다. 초록빛 몸통에 꼬리에는 우둘투둘한 융기가 한 줄로 돋아 있었다.
"도트."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도트?"
"이 아이 이름이야. 인사해.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살 거야."
"도트? 점?"
"응. 그런데 이름 뜻은 달라. 도토리만 먹는대.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아내가 도트라고 이름 지은 이구아나는 꼬리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마루의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가끔 멈춰 서서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스운 것은 녀석이 뒤로만 걷는다는 것이었다. 새롭게 맞닥뜨린 낯선 세계를 제 딴에는 그렇게 탐색 중인 모양이었다.
아내는 또 어디론가 나가더니,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들어섰다.
"이번엔 이름이 뭐야?"
내 물음에 아내는 웃기만 하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밥그릇을 들고 나왔다.
"봐, 귀엽지 않아?"
아내는 마룻바닥에 밥풀을 흩어놓았고, 고양이는 그 밥알을 정신없이 핥았다.
"이 아이 이름은 바파르가 좋겠어."
"바파르? 왜?"
"밥풀."
아내는 또 웃었다. 나는 밥알을 먹는 새끼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한쪽 눈 주위를 둥그렇게 감싼 검은 털 때문에 만화 속의 '애꾸눈 잭'이 떠올랐다.
아내는 연 이틀 동안 동네 구경을 하겠다고 나가서는 그린이구아나 한 마리와 고양이를 안고 돌아왔다. 모두 이웃들이 이사 온 기념으로 주었다는데, 꽤 복잡하고 신경 쓰이는 선물인 셈이었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그것들을 데려와서 대체 어쩌려고, 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내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아내는 도트와 바파르를 한꺼번에 껴안고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길게 하품을 했다. 감기는 눈 사이로 아내 뒤의 마루와 그 너머의 바다가 햇살에 반짝였다.
"기조 씨, 기조 씨."
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아내가 스르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엉겁결에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바닥에 쏟았다.
아내는 습관처럼 내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르곤 했다. 아내는 이름마다 어떤 리듬이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자기 자신의 한 부분에만 관심이 쏠려있어 다른 것을 향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고는 다시 리듬을 실어 기조 씨, 기조 씨를 부르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어릴 때 아빠 따라서 이발관에 갔다가 수동식 이발기로 뒷머리를 깎곤 했어. 날이 뾰족뾰족하고 가위처럼 생긴 거 말이야. 스프링이 움직일 때마다 시계 초침소리가 나서 졸음이 몰려오곤 했어."
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년의 아내를 상상했다.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이었다. 사시사철 울울한 숲과 자갈길 사이로 소나무 냄새가 밴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며 아내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었다. 아내의 눈두덩 위로 평온했던 유년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오던 허름한 이발관과 머리에 번들번들하게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이발사 앞의 한 여자애가 떠올랐다. 여자애는 의자 위의 울룩불룩한 빨래판에 앉아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매번 머리를 뜯기곤 했을 것이다. 나는 따끔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일어 머리를 긁적였다.
"바파르, 이리 와."
아내가 바파르를 불렀다. 새끼고양이는 선뜻 다가가지 않고 몸을 이리저리 꼬며 아내를 탐색 중이었다. 아내의 희멀건 손이 바파르를 끌어당겼다.
아내는 심장근육이 굳어가는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가끔 가슴을 옥죄는 통증 외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더랬다. 섬유화의 진행으로 수축을 하지 못하는 아내의 심장은 언제 멈출지 모른다고 했다. 그 언제라는 것이 막연하기만 해서, 일 년을 살지도 십 년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인도 치료법도 그에 따른 예후도 없어, 정확하게 처방받을 수 있는 약도 시도해 볼 수 있는 수술도 없었다.
아내는 울지 않았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눈물이 날 정도로 매운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아내는 손부채질을 하며 몇 잔의 물을 들이켠 후 맑은 얼굴로 앞서 걸어갔다. 목덜미가 다 자라지 않은 계집아이처럼 푸르스름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가끔 밥을 먹다가도 스르르,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스르르, 앞이나 옆으로 꼬꾸라졌다. 그러고는 기조 씨, 기조 씨, 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매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은 목소리에 담긴 어떤 기운 때문일 것이다. 아내의 목소리는 어쩐지 청량한 바람이 묻어나는 민트사탕 같다. 그 담박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바닥을 향해 아주 가볍게 내딛는 발걸음이 떠올랐다.
"나, 탭댄스를 배울까 해."
아내는 바파르의 털을 손으로 쓸어주며 말했다. 이어 작은 새처럼 여린 숨을 내쉬었다. 다가가 아내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에 축축하고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 뜨거운 기운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고 싶다는 아내의 열망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탭댄스? 이런 거?"
나는 일어나서 바닥에 발을 구르며 과장된 몸짓을 섞어 탭댄스를 흉내 냈다. 누가 보아도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 마. 바보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내의 눈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야옹.
바파르가 길게 하품을 하며 소리를 냈다. 아내와 나는 들었느냐는 말을 동시에 물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 데려와서 바파르가 처음으로 고양이다운 소리를 낸 것이다. 그 옆에 있던 도트는 눈알을 굴리며 마루를 돌아다녔다. 팔이 기역자로 꺾인 모양으로 붙어 있어서 온몸을 좌우로 틀면서 걸었다. 도토리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뒤로 걸으면서도 녀석은 한 직선으로만 움직였다. 아내는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눈으로 보기 위한 거라고 말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기형적인 요인으로 생긴 버릇이 아닐까 싶었다. 보통의 그린이구아나는 상추나 당근 등의 채소를 먹는다지만 도트의 식성은 달랐다. 이름값을 하려는지 오직 도토리에만 입을 댔고 몸집에 비해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과일조각과 채소를 그릇에 담아 내밀었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혹시나 싶어 사료를 사다 주어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껍질을 벗긴 도토리를 조금씩 깨물며 대부분의 시간을 먹는 데 소비했다.
도트가 오고 나서 아내와 나는 도토리를 줍기 위해 집 뒤의 산을 올랐다. 가을이 깊지 않아 떨어진 것은 많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먹는 양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오 일마다 열린다는 시골 장에 가 도토리를 사왔다. 오는 길에 동물병원에 들렀다. 수의사는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도 눈만 껌뻑거리더니, 겨우 '글쎄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아직까지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라며 오히려 우리에게 물었다. 아내와 나는 내처 도트의 원래 주인에게 가 계속 이렇게 도토리를 먹고 뒤로 걸으며 살아가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도트 어미도 그렇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독특한 체질로 태어난 도트와 그의 어미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자신들 앞에 펼쳐진 특이한 삶을 향한 일종의 적응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도트에게 수식어가 하나 붙었다. 오직 도트.
빨간색과 파란색이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조명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기껏 구불구불한 골목길 끝의 이발관을 찾아가도 실상은 마사지 영업을 하는 곳이 많았다. 한적한 전원에 묻혀 사는 작가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아내의 말이 생각나 이발관을 찾아 나섰다. 서툰 페인트 글씨로 상호가 적힌 슈퍼가 보였다. 나는 생수를 사며 이발관이 있는지를 물었다. 따분한 표정의 슈퍼주인은 파리채를 휘두르며 턱짓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나는 슈퍼를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마다 하얀색 페인트가 발린 벽면에 푸른 잎이 달린 나무와 함지박만 한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높지 않은 건물들이 고만고만해서 옛날 사진 속에나 나올 법한 풍경 같았다.
이발관 유리창은 커다랗고 깨끗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말끔한 유리창 안에 내가 서 있었다. 내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가방을 다른 쪽으로 매봤지만 여전히 어깨는 기울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무거운 등짐을 진 것처럼 갑자기 어깨가 뻐근했다.
외관과는 달리 이발관 안은 허름하고 지저분했고 오래된 먼지 냄새 때문에 콧속이 간지러웠다. 인기척을 해봤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발관에서 흔하게 보았던 수영복을 입은 여자들의 사진은 없었다. 대신 그림 하나가 벽에 붙어 있었다. 액자 속의 그림은 어떤 화석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는 물고기처럼 생겼지만 몸에 기역자로 꺾인 사지가 달린 동물이었다. 생생하게 그려진 모양새 때문에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꼬리지느러미 뒤로 펼쳐진 갯벌이 밤하늘의 달빛에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칸소스테가라우."
어디서 나타났는지 추레한 노인이 옆에 서 있었다.
"아, 네."
노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석 속의 주인공은 인간의 선조라네. 우리들이 원래 아란다스피스라는 물고기였다는 걸 알고 있나?"
"물고기요?"
"자네가 익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먼 시원을 말하는 거야. 사지가 달린 물고기 이전에는 아주 작은 미생물이었다지."
나는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나를 흘끔 보더니 다시 그림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바다 밑에서 커다란 고기에게 잡아먹히며 약자로 살다가 어느 날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네. 그리곤 물고기로서의 진화가 아니라 습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을 변화시켰지. 바다에서 살지 못했으니 누군가는 퇴화라고 할 테지만, 물고기로서 진화하지 못했다고 다 퇴화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리고 끊임없는 고난에 부딪히면서 녀석은 자신만의 적응을 모색했을 거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람이 불고 때로는 폭풍이 몰아쳐도 말이야. 그건 또 다른 진화가 아닐까?"
노인은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듯 눈을 지그시 떴다. 허무맹랑한 말을 늘어놓는 괴짜처럼 보였다.
"녀석이 바다 밖으로 나와 육지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자네와 내가 서 있는 일도 가능할 수 없었을 걸세.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의 선조였으니까."
나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어 그림을 바라보았다. 바다 속의 평범한 물고기에서 육지로 나와 기역자로 꺾인 사지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걷는 저 그림 속의 도마뱀 같은 물고기로, 그리고 다시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로 변해 가는 영상이 펼쳐졌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노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굳이 따져 물을 일은 아니지 싶었다.
"이 그림 사실라우? 이게 습곡에서 발견된 화석을 재현해놓은 거야. 진짜 화석은 아니지만 그림이 너무 생생해서 더 진짜처럼 보인단 말이지. 녀석을 봐, 멋지잖아?"
노인이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벼 파더니 거뭇한 코털을 뽑아 허공에 대고 후후 불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아니라 저는……."
"안 사려면 말고."
노인은 옷의 먼지를 툭툭 털며 웃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누런 치아는 듬성듬성하고 오랫동안 빨지 않았는지 하얀 가운 여기저기에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림 앞에서 물러서며 수동식 이발기가 있는지 물었다. 노인이 헤벌쭉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내 앞에 꺼내놓은 것은 이발기뿐만이 아니었다. 날이 무딘 가위와 숱이 무성한 거품 솔, 손잡이가 달린 면도칼과 구식 라디오, 그리고 십 년도 더 지난 것 같은 잡지, 나팔꽃처럼 생긴 커다란 관이 달린 축음기 등 모두 오래되고 별로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 어느 것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한쪽에 세워진 서랍장 안에서 물건들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알록달록한 단추들과 실패 뭉치도 있었다. 손때가 묻은 작은 주전자와 작동이 될까 싶은 전기 포트와 다리미도 나왔다. 가장자리가 깨진 접시와 컵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 노인은 내내 벙글거렸다. 나는 그런 노인이 이발사가 아니라 '기이하고 특별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커스단의 마술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정말 노인에게는 기이한 구석이 있었고 어쩐지 나와는 다른 세계와 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함께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기이함이 특별하게 여겨졌다. 설령 그것이 오래된 물건들이 뿜어내는 기운 때문이라고 해도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런 걸 사가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는 노인의 성의를 생각해 거품 솔을 집어들며 물었다. 그가 나를 향해 다시 벙긋 웃었다. 물건들을 팔기 위해 억지로 지어 보이는 웃음 같진 않고 원래 천진하게 잘 웃는 사람 같았다.
"사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 가끔이긴 하지만. 자네가 이발기를 사러오는 것처럼 말이야. 요샌 통 손님이 없어. 남자들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이상한 시대니까."
노인은 내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이발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이걸 사시든지. 이게 한 오십 년 됐나?"
여기저기 거죽이 뜯겨져 나가고 없어 오십 년이 아니라 한 백 년은 더 지난 것 같았다. 누군가가 앉는다면 그대로 폭삭 주저앉을 것처럼 낡은 의자는 위태로웠다.
"이 의자를요?"
"이거 좋아. 한번 앉아 봐. 얼마나 편안한지 잠이 그냥 와버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수동식 이발기만을 가방에 넣었다.
"저 그림은 안 사가고? 저것도 오천 원인데."
나는 노인의 손끝을 따라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내 노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가든지 안 사가든지 상관은 없어. 하지만 언제든지 이것들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내가 살아있는 한 여길 떠나진 않을 테니까. 지금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언젠가는 눈에 들어올 날이 오기도 하거든. 살아 있다면 말이야."
이발관을 나서는 내 등 뒤에서 노인이 껄껄 웃었다. 나는 몇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이발관의 유리창으로 햇살이 포자처럼 부서져 내렸다. 몇 걸음을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이발관이 저 멀리 물러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사온 수동식 이발기를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발관에서 보았던 아칸소스테가 얘기를 하려다 그만 두었다. 마루에 거울을 놓고 가위를 가져와 앉더니 아내는 자꾸 혼자서 자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내는 가위로 망설임 없이 머리카락을 귀밑까지 바짝 잘랐다.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푸푸, 불던 아내가 내가 사온 이발기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아내의 목덜미를 깎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낡은 스프링이 시계 초침처럼 째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사이로 아내에게 선물해준 유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단발머리의 아내는 시골의 촌스러운 계집아이처럼 보였다. 아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나는 아내가 웃을 때마다, 그녀의 생명이 조금씩 길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들뜨곤 했지만 어떻게 하면 아내를 웃길 수 있을까, 연구하지는 않았다. 아내가 내게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희귀병 진단을 받고 나서 우리는 겨우 며칠만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중에도 아내가 움직이는 반경은 작고 조심스러웠다. 조수석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움켜쥐었다. 어느 땐 수천만 개의 입자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사실 아예 모든 걸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아내와 여행하며 보내고 싶었다. 그 시간이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승합차를 사서 개조한 다음 전국을 돌아다니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 둘과 함께 소규모로 운영해오던 출판사를 접겠다고 했다. 최근에 출판된 책의 반응이 좋아 형편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마음이 가질 않았다. 아내는 그것마저 만류했다.
'변하는 건 없어. 그냥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야.'
자신의 말처럼 아내는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조바심을 내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어이없게도 뭔가 극적인 상황을 바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내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첫사랑을 찾지도 않았다. 특별히 찾고 싶은 사람도 없다 했다. 아련한 추억이나 죄책감을 가질만한 상대가 없는 아내의 지나온 삶은 튀어나온 곳 없이 담백하고 평평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아내의 말대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보다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며칠에 한 번씩 출판사에 나가고 작가를 만나고 편집 회의를 했다. 그러면서도 수없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내의 안부를 물었다.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들고 있던 서류나 책을 그대로 집어던지고 숨 가쁘게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면 아내는 오르내리는 내 등을 무심한 얼굴로 다독였다.
우리에게 유일한 변화가 있었다면 살던 집을 그대로 둔 채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우연히 여행 중에 들른 곳이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도 다르지 않아 며칠 전에 대충 짐을 싸 이사를 했다. 다리가 있어 완전히 고립된 섬도 아니고, 살던 집과도 멀지 않고 푸른 바다를 볼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이 섬이었다.
새로 마련한 집의 마당에는 웃자란 풀이 무성했고 소금기가 밴 바람은 부드러웠다. 마루의 묵은 때가 대단해서 열 번이 넘는 걸레질을 해야 했다. 아내는 내가 하는 일들을 마루에 앉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고, 나는 온종일 풀을 베고 마당을 쓸고 거미줄을 걷었다. 하루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아내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안방 문을 닫더니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앞에 서서 문을 열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안에서는 서툴지만 제법 힘이 실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춤하게 물러서서 탭댄스를 추는 아내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아내가 바닥에 발을 굴렀다. 나는 아내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검은 가죽 신발을 신은 아내의 작은 발이 내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지난밤 노트북으로 교습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더니 어느 정도 스텝을 익힌 모양이었다. 단발머리의 아내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상상을 하니 쿡쿡, 웃음이 나왔다.
마루 한쪽에 있는 바파르와 도트의 집 앞으로 슬쩍 다가갔다. 녀석들은 철망 안의 아내가 만들어준 이불 위에서 몸을 꼭 맞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바파르와 도트를 데려온 날, 아내는 마루에 앉아 천 조각들과 솜뭉치를 들고 온종일 손을 놀렸다. 간간이 지나가는 맑은 바람이 아내의 긴 머리카락을 조용하게 흔들었다. 좌식 책상에 앉아 원고를 읽던 나는 허리를 꺾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 아내가 짜안, 하고 내 앞으로 이불을 내밀었다. 빨간 꽃잎이 박힌 핑크색 이불은 방석만 했고 포근포근하게 부풀어 있었다. 밖으로 삐져나온 하얀 실밥 자국을 내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내는 딴청을 피우며 손바닥으로 이불을 가렸다.
바파르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바짝 다가가 녀석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고양이 속눈썹이 원래 저렇게 길었는지를 잠깐 생각했다. 바파르가 작은 눈을 끔벅거렸다. 오직 도트는 바파르 옆에서 눈알을 굴려 사방을 살폈다. 도트가 기역자로 꺾인 팔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발관에서 보았던 아칸소스테가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육지로 올라와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했다는 그것도 도트처럼 저렇게 좌우로 몸을 틀며 걸었을 것이다.
잠이 쏟아져 내리는지 바파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콧방귀 섞인 한숨을 뱉었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내 콧잔등으로 튀었다. 도트가 바파르의 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녀석들이 서로 꼭 껴안거나 등을 맞대고 자는 걸 보면 특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어울릴 수 없는 종족인데도 늘 철망 안에 함께 있었다. 바파르가 도트의 철망 안으로 먼저 들어가긴 했지만, 도트도 그런 바파르를 밀어내지 않았다. 나는 마루 끝으로 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 배 한 척이 수면에 포말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사위가 온통 하얀빛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톡톡톡, 소리는 경쾌했다. 백 브러시, 힐, 토, 스탬프, 셔플. 나는 아내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반복해서 턴을 했다.
눈을 떠보니 안방의 천장이 보였다. 발목이 뻐근했다.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이른 아침부터 아내가 마루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꿈속에서 물방울 소리라고 생각했던 건 아내가 발을 구르는 소리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아내가 발그레한 얼굴로 자신의 작은 발을 내려다보았다. 슈즈 앞에 붙은 은색 징이 반짝거렸다.
"바파르가 물구나무서기를 해. 그러면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갑작스러운 아내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내는 바닥에 앉아 슈즈를 벗은 후에 바파르를 불렀다.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바파르를 안고 와 벽에 뒷발을 올려주었다. 바파르는 뒷발을 벽에 붙이고 물구나무를 선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잔뜩 귀찮은 표정이었다.
"잘했어. 다큐 바파르."
아내는 며칠 전 바파르에게도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바파르는 그릇에 밥을 담아주면 절대 먹지 않다가도 바닥에 흩트려주면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모습이 어찌나 처절한지 아내말대로 생존을 향한 야생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녀석이 물구나무를 섰다. 아내는 바파르를 안아 자신의 볼에 비볐다.
"춤은 다 배운 거야?"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이제 교본은 그만 보기로 했어. 기본 스텝을 다 배우진 않더라도 탭댄스를 출 수는 있거든. 나만의 방식으로."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입술이 푸른빛이었다. 나는 아내의 푸른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저러다가도 아주 가끔 얼굴에 핏기가 없어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매번 기조 씨, 기조 씨,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근래에 아내가 쓰러지거나 내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일은 없었다.
"우리 산책 가자."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아내가 말했다.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게 뭐 있어."
아내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다가온 병도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오히려 평온한 얼굴빛이었다. 나는 도통 아내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었다.
아내가 긴 플레어스커트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쳤다. 나는 청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으려다 아내가 눈을 흘기는 바람에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당신 이름, 자꾸 부르다 보면 기적 씨, 기적 씨 하는 거 같아."
아내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밥을 먹는 건지, 숨을 쉬고 있는 건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동안 아내는 기적이 아닌, 기조의 나를 만나 그런 것들을 느끼며 살아왔을까.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푸르게 파닥거렸다. 교각 옆에 천막이 들어서 있었다. 서커스 단체였다. 아내와 나는 만국기가 길게 걸린 진입로를 걸었다. 오전인데도 천막 안에는 수십 개의 조명이 켜져 있었다. 트럼펫과 북소리가 정신없이 귓속을 파고들어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축제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내가 내 팔에 매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조 씨, 기조 씨."
갑자기 아내가 가슴을 움켜쥐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아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꼭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찾아와야 하나 싶었다. 나는 가볍고 둥근 아내를 싸안았다. 서커스의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한순간에 작아졌다.
아내는 내 등에 업혀 팔을 늘어뜨리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아내를 업고도 가뿐한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자꾸 아내를 추어올렸다. 노래를 부르던 아내가 헉, 하고 딸꾹질 같은 소리를 냈다. 나는 아내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을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무슨 노래든 당신이 부르고 싶으면 부르는 거야. 당신만의 방식으로."
나는 다시 아내를 추어올리며 말했다.
"관사에 살 때 아빠가 에디슨인가, 하는 상표를 모방한 축음기를 하나 구해오셨어. 꼭 정전이 되면 촛불을 켜놓고 축음기 손잡이를 한참 동안 돌려서 음악을 틀었거든. 귀하거나 비싼 건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충분히 낭만적일 노래들과 밤 풍경을 선물해주었어. 당신, 축음기 소리 들어 봤어?"
아내가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햇살에 바다의 수면이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한 번도?"
아내가 다시 물었다.
"어, 한 번도. 참, 그 이발관에서 축음기 봤는데. 우리 내일 사러 갈래?"
"좋아."
아내가 대답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내 삶의 일부분인 유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잠시 멈춰 서서 아내를 추어올렸다. 아내가 헉, 딸꾹질하는 소리를 냈다.
오전 내내 비가 이어졌다. 가늘게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창문을 열자 제 빛을 찾은 풍경이 한층 선명하고 가까워져 있었다. 감기에 걸린 아내는 밤새 고열에 시달렸다. 편도선이 부었는지 아내의 날숨에 휘파람소리가 묻어났다.
"벽에 기대고 싶어."
아내를 반쯤 일으켜 벽에 기대게 해주었다. 아내가 자신의 머리맡에 놓여 있던 화분을 끌어당기자 만개한 붉은 꽃잎이 잠시 흔들렸다. 아내가 손으로 꽃잎을 쓰다듬었다. 허여멀건 아내의 손가락 때문에 꽃잎이 더 붉게 도드라졌다.
"당신 혼자서 다녀오는 게 좋겠어."
아내가 말했다.
"거긴 언제라도 갈 수 있어. 꼭 오늘이 아니어도."
"아냐, 오늘 다녀오는 게 좋겠어. 정말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왜?"
아내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힘없이 웃었다. 서른 살 아내의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머리카락이 이마로 자꾸 흘러내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 쓸어 넘겼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 사이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뽑혔다.
"부탁이야. 축음기를 사와서 음악을 들려줘."
아내는 힘들게 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나는 오직 도트와 다큐 바파르를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품에 안긴 도트와 바파르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도트의 초록빛 몸이 스스륵, 손아귀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녀석이 몸을 좌우로 틀며 맹렬하게 뒷걸음질 쳤다. 발톱이 바닥에 닿으며 아주 작게 타다닥 소리를 냈다.
"넌 언제쯤 제대로 된 이구아나로 진화를 할 거냐? 뒤로 걷고, 도토리만 먹는 게 정상이냐?"
나는 도트를 잡아 머리통을 살짝 한 대 때렸다. 그러자 더 심하게 몸을 뒤틀었다.
"그게 녀석이 택한 방식일 수도 있어."
"어?"
나는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꼭 변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나는 도트를 내려다보았다. 도트는 발톱으로 내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다른 팔에 안겨 있던 바파르가 하품을 하며 도트에게 얼굴을 비볐다. 나는 아내에게 도트와 바파르를 건넸다. 두 녀석을 가슴에 안은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내와 도트와 바파르를 뒤로 하고 마루로 나와 구두를 신었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어쩌면 온몸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 닿은 신발에서 톡, 톡, 톡, 소리가 났다. 나 자신도 모르게 리듬에 맞춰 걸음을 떼었다.
한 번 와봤던 곳인데도 이발관이 있던 동네로 가는 길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아득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같은 곳을 반복해서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멈춰 심호흡을 한 후 기억을 짚어나가듯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생수를 샀던 슈퍼마켓이 보였다. 나는 차를 세워놓고 슈퍼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고 문고리에 걸린 자물쇠는 녹이 슬어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슈퍼 앞에 자동차를 두고 이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기억 속의 풍경이 하나 둘 눈앞으로 다가왔다. 낮은 건물들, 벽면에 그려진 푸른 잎이 달린 나무와 함지박만 한 꽃들은 여전했다.
이발관에 다다라 출입문을 열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름모 모양으로 손차양을 만들어 유리창을 들여다보았다. 이발관 안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 뒹구는 물건들 사이로 전기 포트와 그릇들, 낡은 이발 의자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벽에 붙은 화석 그림, 아칸소스테가. 녀석을 두고 노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돌멩이로 유리창을 깬 후, 안으로 들어가 축음기를 찾았다. 관이 부러진 축음기는 예전에 보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관을 대충 이어 붙이고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손을 털며 바닥에서 일어서는데 물고기 같기도 하고 도마뱀 같기도 한 생물이 그림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눈이 먼 곳을 향해 있는 그것의 몸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화석 그림을 떼어내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발밑에서 물건들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집에서 너무 늦게 나온 탓인지 밖은 벌써 어둠이 깔려 있었다.
검은 하늘에 돋아난 달이 푸르스름한 빛을 냈다.
'기조 씨, 기조 씨, 미안해.'
아내의 목소리가 푸른 달빛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둠이 내린 길 위에에는 오직 푸른 달과 아칸소스테가 그림과 내가 있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아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스르르, 가슴을 움켜쥐고 옆으로 꼬꾸라지는 아내의 모습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내는 죽었다. 아니다. 아내는 죽었다. 아니다. 아내는 탭댄스를 추고 있을 것이다. 지금 아내는 어떤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굴렀다. 아마 이렇게 추고 있지 않을까. 나는 아내의 춤을 떠올렸다.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내 발바닥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때였다. 바닥에 내려놓은 그림 속에서 입체그림처럼 아칸소스테가의 몸뚱이가 쑤욱, 일어섰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새까만 눈을 굴렸다. 기역자로 꺾인 사지가 그림에서 떨어질 때마다 쩍, 하는 소리가 났다.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아칸소스테가는 바닥에 닿은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타다닥 소리를 냈다.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의 선조였다는 그가 좌우로 몸을 틀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 빠른 걸음도 느린 걸음도 아닌, 자신만의 적당한 보폭으로 걷는 녀석을 따라 나도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는 길은 계속될 것이다. 아내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받아들여 덤덤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도트와 바파르도 퇴행적 진화라는 또 다른 진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이제 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과 해와 달과 함께 기울어가는 시간을 바라보며 멈추지 않고 걸어갈 것이다. 푸른 달빛 아래서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아내가 가르쳐준 대로 스텝을 밟았다.
'꼭 변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자, 백 브러시, 힐, 토, 스탬프, 셔플.'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부드러운 바람으로 살랑거렸다.
<끝>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분 - 심사평] 수채화처럼 잔잔한 감동주는 서사 공간
윤후명(소설가)·권영민(문학평론가)
2009년도 신춘문예 소설부문에는 예년과는 달리 많은 응모작이 모였다. 그러나 예심을 통해 올라온 10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의욕에 비해 그 서사의 기법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당선작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패턴사를 위한 3종 세트'(김경수), '너와 나의 고요한, 정원'(최이음), 그리고 '아칸소스테가'(채현선)로 관심이 모아졌다. 세 작품이 각각 그 내용은 다르지만 서사의 긴장과 균형을 잘 지탱하고 있다.
'패턴사를 위한 3종 세트'는 서사의 진행이 매우 빠르고 격렬하다. 그러나 군데군데 부정확한 어휘들이 눈에 거슬린다. 다듬어지지 못한 부분이 많음을 의미한다. '너와 나의 고요한 정원'은 서술의 힘이 느껴진다. 주제에 접근하는 태도 역시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습니다'체의 어투가 전반적으로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평서체의 간략한 어투를 살렸다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분 - 당선소감] 내가 만든 음식이 설익지 않도록 뜸들일 것
아칸소스테가-채현선
'아칸소스테가'는 어둡고도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한부의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생명이 있는 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삶의 의미임을 이 소설은 새삼 일깨워준다. 냉정한 시선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는 내면의 세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소도구의 병치, 수채화처럼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는 서사 공간 등은 이 작품의 소설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좀더 힘 있는 변화를 기대한다.
당선 통보를 받은 날 밤, 함박눈이 내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내준 선물을 받으며 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한밤의 세계는 고요했다. 포근포근한 눈송이들이 생전의 아버지처럼 내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흐트러뜨리고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잘했다, 내 새끼. 그렇게.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아빠, 쌩유.
인도에는 '다바왈라'라는 도시락 배달꾼이 있다. 도시의 샐러리맨에게 도시락은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의 원천이며 사랑의 캡슐이다. 그 캡슐을 만든 건 그들의 아내나 어머니다. 그녀들은 집 음식을 최고의 만찬이라 여기는 남편이나 자식을 위해 닭고기를 충분히 고아 수프를 끓이고, 카레와 밥을 만든다. 최선을 다한 음식은 작고 소박한 위안과 감동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노크를 할 것이다. 스스로 부족함을 잘 알기에 더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내가 만든 음식이 설익지 않도록 충분히 뜸을 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그런 작가가 되겠다.
큰 힘이 되어주신 동국대 장영우 교수님, 황종연 교수님, 소설을 함께 공부한 '동대미문'과 '이야기 여인숙' 식구들, 독서모임 '로마의 테라스' 식구들, 정란 언니, 경애 언니, 친구들, 모두 감사하다. 아직도 소녀 같은 내 엄마, 동생들과 올케, 조카들, 사랑합니다. 소중한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조선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1972년 전남 진도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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