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이 날아온다'가 나온 지 1년9개월 만에 다시 나오는 시집인지라 태작이라 빈축을 하지 않을까, 망백의 나이 값을 치르지 못해 망신당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한다"고 시인은 자서(自序)를 썼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쓴 건 없고 이 나이에도 매순간 시가 터져 나온다. 죽는 순간까지 시를 쓸 것"이라고 한다.
요즘은 시를 읽지 않는 시대다. 출판사에서 시집 한권을 출간하면 500권 팔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고등학교에서 문예반이 자취를 감추고, 학교 축제 때 시화전이 사라진 지도 오래다. 각 신문사 신춘문예에서도 시 부문의 경우 20, 30대 젊은층의 응모작은 구경하기 힘든 지경이다. 속도와 실용이 능사인 세태에 여운과 추상이 생명인 시가 파고들 여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속된 표현으로 결국 '돈이 안 된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시인은 이런 넋두리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는 1917년 함경남도 함주 출생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 셋. 지난해 작품집 '공상일기'를 발간한 황금찬(1918~) 시인보다 한 살이 더 많아 국내 최고령 현역시인인 셈이다. 망백을 넘긴 나이에 '현역'이라는 사실도 희귀하지만 그의 일 욕심을 들어보면 더 놀랍다. 시인은 당장 올 봄에 그동안 여러 행사에 가서 낭송했던 기념시 80여 편을 모아 시집 한권을 더 발간할 예정이다. 또 우리 근대사를 경험한 몇 안 되는 생존자로서 증언과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회고록을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다른 일들이 많아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단다.
시인은 치열하게 살았다. 삶도 그렇고 역사인식도 그렇다. 함흥고보 졸업 후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수학한 그는 서른한 살 되던 1947년 '민주조선'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러나 그해 7월 자신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거하자 사회활동을 일절 중단하고 칩거에 들어간다. "조국이 분단되고 친일정권이 들어선 세상"을 외면한 세월이 무려 33년이었다.
이산가족인 그는 2003년 평양을 방문했다. 고향을 등질 때 핏덩이였던 딸이 백발이 돼 아버지를 맞았지만, 어머니와 아내는 그를 더 기다리지 못했다. 시인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먼저 간 아내에게 시 한편('북쪽아내에게')을 부친다. "…조국 해방 싸움에 생이별 36년만에/슬픈 사연 많은 삶을 접고/차마 감아지지 않는 눈을 감았다고/망백 나이 허망한 세상/그대 높은 혼령 앞에/구만리 장천을 바라 터지는 가슴/내 뭔 말 하리오"
그의 삶은 질곡의 분단사 그 자체였다. 또한 여전히 진행형이다. 시인은 1989년 자신의 시집 '지리산'이 필화사건에 얽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을 향한 열망과 저항의식은 무뎌지기는커녕 도리어 무쇠처럼 담금질됐다. 2007년 10월 4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 방북 때도,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 아침에도, 2008년 1월 15일 대통령직 인수위 출범일에도, 2008년 3월 6일 뉴욕필 평양 공연 날에도 그는 시로 역사를 썼다. 그리고 통일을 노래했다.
우리 통일의 노래가 잦아드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가 정수남은 이기형 시인을 두고 이렇게 전한다. '바람처럼, 번개처럼, 산자락을 타고 다니며 포효하는 그가 우리 곁에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