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

[스크랩] 이기형 시인 시집 절정의 노래 <오마이뉴스> 보도기사

우또라 2009. 1. 23. 15:50

 
입술과 손끝으로 시를 쓴다?
국내 최고령 시인 이기형 10번째 새 시집 <절정의 노래> 나와
이종찬 (lsr)
   
▲ 시인 이기형 이기형 새 시집 <절정의 노래>는 자주 민족통일을 훼방 놓는 모든 걸림돌을 단숨에 깨뜨리는 쇠망치이다
ⓒ 이종찬
이기형 시인

 

"삼팔선은 / 미국 발의 미.소 합의로 그어졌다 / 희대의 민족 비극선을 끊는데 / 미.소는 손을 놓고 있다 / 안 되겠다 / 우리 남북이 일떠서 / 오늘 첫새벽부터 밤늦게까지 / 앞뒤 물불을 가리지 말고 / 냅다 걷어차 일을 내고야 말자 / 끊어야 / 끊어야" -102쪽, '분단선' 모두

 

우리나라에서 살아 있는 시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시인은 누구일까. 우리 나이로 올해 아흔셋, '통일시인' '반 외세시인' '반 문화제국주의시인' '온 생명시인'으로 불리는 원로시인 이기형 선생이다. 그 다음이 시인보다 한 살 적은 나이로 지난해 36번째 시집 <고향의 소나무>(시학)를 펴낸 황금찬 시인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고은, 신경림, 정호승, 김용택, 안도현, 최영미 시인 등은 알아도 이기형 시인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른다. 왜 그럴까? 문단에 너무 늦게 첫 발을 내디뎠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인이 구순에 이르는 동안 여러 문예지와 시집 등에 발표한 시가 이들 시인들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다. 시인은 고은(1958년 <현대시>), 신경림(1955~56년 <문학예술>)보다 훨씬 빠른 1947년 <민주조선>에 시를 발표했다. 하지만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때부터 33년 동안 얼굴과 이름이 드러나는 모든 사회활동과 시 쓰기를 내던졌다.    

 

시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시인이 그동안 발표한 시는 이들 시인들이 발표한 시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인이 독자들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아마도 시인이 사회활동을 다시 시작한 1980년 무렵부터 뒤늦게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때 고은과 신경림은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시인이었다.

 

"입술이나 손끝으로 쓴 시는 참된 시가 아니다"

 

   
▲ 시인 이기형 원로시인 이기형 열 번째 시집 <절정의 노래>
ⓒ 이종찬
시인 이기형

"이 시집 원고를 정리하면서 가장 계념(繫念, 매달려 생각하다)한 것은 '전번 시집들보다 수준이 높아야 할텐데…'였다. 전번 것들보다 진전이 없다면 새 시집을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가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겨레와 역사에 대한 정확하고도 높은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자서' 몇 토막

 

원로시인 이기형(92) 선생이 열 번째 새 시집 <절정의 노래>(들꽃)를 펴냈다.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1980년부터 1990년대 허리춤께까지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몸을 내던졌다. 1989년에는 시집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대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확정 판결을 받기도 했다.

 

"입술이나 손끝으로 쓴 시는 참된 시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는 시인. 시인이 펴낸 이번 시집에는 60년을 훨씬 넘긴 세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통일한국을 이루지 못한 채 외세가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구순이 넘도록 외세와 분단을 내동댕이치지 못한 시인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자 검열 혹은 자화상이 물결치고 있다.

 

모두 4부에 실려 있는 '삶이 꽃 피어' '천재언론의 탄생을 갈망한다' '부끄러워 징그러워'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모를 심으며' '북쪽 아내에게' '미군은 고향으로 돌아갈진저' '반일독립투사' '건국동맹' '뺄갱이론' '통일 아리랑' '무지개꿈' '반쪽의 눈물' '해돋이를 가슴에 품고' 등 59편이 그것.

 

이기형 시인은 시에 대한 평가기준은 "인간적, 역사적, 지적 인식의 총체로 시가 씌어졌을 때 비로소 '시'라는 명칭에 걸맞는다" 말한다. 하지만 "아직 미흡함을 자인한다"라며 태작이라 빈축을 사지나 않을까, 망백의 나잇값을 치르지 못해 망신당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다"고, 스스로를 한껏 낮춘다.

 

젊은이보다 더 강한 가슴과 더 강한 열정을 품고 있는 구순 시인 이기형

 

"터벅터벅……. / 구십 노구를 이끌고 만감에 젖어 / 녹사평역 지하도를 간다 / 어디로 가는가? / 내 애인들이 / 슬픈 조국을 지키고자 절규하는 / 국방부 앞으로 간다"-28쪽, '생명의 밧줄' 모두

 

구순 원로시인이 시집 한 권을 펴내면서 왜 이렇게 조마조마 문단 사람들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 까닭은 따로 있다. 얼마 전 문인 몇몇이 술좌석에서 거의 1년 틈새를 두고 시집을 끊임없이 내는 시인이 부러워 "구순 나이에 시집을 너무 자주 낸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게 아니냐"라는 말을 은근슬쩍 내뱉은 것이 이 시인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시인은 가끔 글쓴이나 다른 시인들을 만날 때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스스로 쓴 시를 보여주며 "꼼꼼하게 읽고 평가 좀 해달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곤 했다. 하지만 글쓴이나 시인들은 원로시인 속살이나 다름없는 시를 꼼꼼히 읽어보기는 했지만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저 "선생님 연세에 새파란 젊은이들보다 더 강한 가슴과 더 강한 열정을 품고 이렇게 시를 자꾸 쓸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하늘이 내린 큰 복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인은 "시가 자꾸 나와"라는 말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선생님 앞에 서면 3~4년에 시집 한 권을 겨우 내는 저희들이 정말 부끄럽습니다"라는 말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도 머리에 하얀 눈을 덮어쓴 것 같은 구순 시인이 젊은이들보다 더 빨리 현장을 누비며 쓴 시다. 시인은 국방부 앞에서 한미합동 을지훈련을 막기 위해 집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애인으로 여긴다. 따라서 시인이 국방부 앞에서 "북쪽 형제를 잡는 군사훈련이라니! / 원흉은 누구냐?"라며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미군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애인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다.           

 

이순신 이후 가장 큰 인물은 몽양 여운형이다

 

"그 누가 있어 / 우리나라에서 이십세기를 뎅강 들었다 놓을 만한 대 인물이 있었는가? / 있었다면 그는 누구인가 라고 물어온다면 / 저는 내 나이 값과 지식의 총체를 짜내 / 여운형이라고 / 서슴없이 대답하겠습니다"-48쪽, '역사를 창조한 거성' 몇 토막

 

우리 민족이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길 간절하게 바랐던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1886~1947). 몽양은 중국 북부 만주 해삼위를 뛰어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여 3.1독립만세운동을 이끌어냈다. 해방 뒤에는 좌우 날선 힘겨루기 속에서도 좌우를 아우르며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여는 정치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흑백논리에 휘말린 우리나라 정계에서 몽양처럼 미·소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주를 부르짖는 정치인이 설 땅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몽양을 정신적 지도자로 삼고 있었던 시인은 지금도 몽양을 잊지 못한다. 시인은 몽양에 대해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왕재(王材)라는 감탄을 받을 만큼 / 용모가 비범 수려했다"고 되짚는다.

 

그도 그럴 것이 몽양은 어린 나이에 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민영환 절명사를 외우고 다니며 일본에게 진 빚 이천만 원을 갚는데 도움이 된다며 담배까지 끊었다. 몽양이 스물세 살 때에는 종 문서를 불살라 종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줬다. 그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에도 큰 몫을 맡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적지 일본 동경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일본 좌우인사들에게 '여운형 만세' 소리까지 들었다. 여기에 소련 지도자 레닌과 중국 지도자 손문을 만나 조선해방을 이야기했으며, 지하 비밀결사조직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만들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좌우합작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여운형 선생은 우이동 태봉에 누워계시는 것이 아니고 / 이 순간에도 저희들과 함께 호흡하고 계신다"며 "우리가 자신만만 국제무대에 내놓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인물 / 실로 이순신 이후 유일한 대인물"이라고 추켜세운다. 하긴, 시인이 몽양을 얼마나 깊이 믿고 따랐으면 <몽양 여운형>이라는 전기까지 썼겠는가. 

 

이명박 정부를 향해 던지는 시로 벼린 짱돌

 

"한국이여 / 올해도 남들과 얼려 / 북쪽 형제를 목조이려는가? / 1844년 하이네는 /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고 노래했다 / 164년 후 오늘 / 한국의 시인들이 / '한국이여 / 우리는 너의 조시를 쓴다'고 노래하지 않게 해 달라" -118쪽, '짙은 명상' 몇 토막

 

시인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지혜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시인은 이명박 정부가 막 들어서려는 2008년 1월 1일 아침에 이명박 정부에 충고하는 시를 쓴다. 제발 "북쪽 형제" 목을 조이는 일은 하지 말고, 외세를 등에 업지 말라고. "외세란 놈은 / 신자유주의, 세계화, 글로벌로, / 백두산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괴물이라고.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시인이 걱정했던 그대로 핵문제를 빌미로 북한 깎아내리기와 미국과 일본을 등에 업는 일부터 저지르기 시작한다. 햇볕정책이 '북한에 퍼주기였다', '북한도 변해야 한다'는 등,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북한을 싸잡아 깔아뭉갠다. 여기에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을 통해 미국에 잘 보이려 안간힘을 다한다.

 

새 정부에 실망한 시인은 다시 '님'을 부른다. 그 '님'에게 "아흔 둘 한 삶이 길고도 짧아 / 할 일이 많구나 / 차마 이대론 죽을 수 없어 / 백두산 장군봉에 큰절을 올리고" 올 수 있도록 "짙은 황혼이 꺼짐을 늦추도록 / 힘을 다오"라며 온 힘을 다해 매달린다. 여기서 '님'은 을지문덕이나 대조영처럼 당당했던 우리 조상 넋에 다름 아니다.   

 

이기형 새 시집 <절정의 노래>는 자주 민족통일을 훼방 놓는 모든 걸림돌을 단숨에 깨뜨리는 쇠망치이다. '영어'를 지배도구로 삼는 '문화제국주의'를 좋아라 받아들이며, 우리 문화 생태계를 치매 걸리게 만드는 이명박 정부를 향해 던지는 짱돌이다. 답답하다. 대체 언제까지 구순 시인이 시 속에서 쇠망치와 짱돌을 들어야 하는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맹문재는 이번 시집에 대해 "현대사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민족의 해방을 갈구해온 이기형 시인의 목소리를 큰 선생님의 말씀으로 삼고 귀담아 들어야 한다"라며, 우리는 "우리의 식민과 분단 상황을 극복해야만 민족의 비극을 치유할 수 있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글로벌 깃발'을 든 이명박 정부를 비꼬는 시를 다시 한번 또박또박 읽으며, 원로시인 이기형 선생이 외세를 물리치고 통일한국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언제나 '청년 이기형'으로 남기를 빈다. 더불어 '못난 이명박 정부가 잘난 듯이 사람을 다스리는' 그런 얼토당토 않는 날들도 어서 끝나길 함께 빈다.

 

"외세에 사시장철 줄절 한다 / 자주 도덕 따위 밥먹여 주느냐고 반문하며 / 신자유주의 세계화 글로벌 깃발을 들고 / 모걸음 뒷걸음친다 // 못난 세상이 잘난 듯이 / 사람을 다스린다" -120쪽, '무지개꿈' 몇 토막

 

 

이기형 시인은 누구?

 
   
▲ 이기형 시인 이기형 시인은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12세 때 야학을 통해 반일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 이종찬
시인 이기형

이기형 시인은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12세 때 야학을 통해 반일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1933년, 작가 한설야 이기영, 시인 임화 등을 만나 조선독립과 문학이 가야 할 길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1938년에는 몽양 여운형, 한용운, 이광수를 만나 독립문제를 토론하고, 1942년 일본 도쿄 대학 예술부 창작과에 2년 동안 다녔다.

 

그 뒤 1945년까지 '지하협동단사건' '학병거부사건' 등 지하항일투쟁 관련 혐의로 수차례에 걸쳐 피검돼 함흥경찰서, 경기도 경찰부, 용산헌병대 등지에서 1년여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어 <동신일보><중외신보> 정치부 및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과 이승만,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등을 만났다.

 

1947년에는 <민주조선>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해 7월 19일,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때부터 33년 동안 사회활동을 모두 접고 서울 뒷골목에 틀어박혀 지냈다. 1980년, 시인 신경림, 이시영, 문학평론가 백낙청 등을 만나 '분단조국 아래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망향> <설제> <지리산> <꽃섬> <삼천리통일공화국> <별꿈> <산하단심> <봄은 왜 오지 않는가> <해연이 날아온다>가 있다. 문학기행서로는 <시인의 고향>이 있으며, 통일명시 100선 감상집 <그 날의 아름다운 만남>, 전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등을 펴냈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2009.01.21 17:35 ⓒ 2009 OhmyNews
출처 : 창작21
글쓴이 : 민들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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