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 각 신문사 신춘문예 시. 시조. 동시 당선작 모음 |
• 강원일보 : 거미줄 동네 / 박광희, <동시> 사과나무 심부름/하지혜 • 경남신문 : 흰꽃이 지다 / 오정애 <시조> 바람의 뼈 - 불일암/ 유선철 • 경상일보 : 노루귀 피는 곳 / 최인숙, <시조> 애기똥풀 자전거/ 박성규 <동시> 손 머리 위로/ 방희섭 • 경인일보 : 우물이 있던 자리 / 이승혁 • 제7회 경제신춘문예 : 시 당선작 우수상 구두/강지혜, 가작 정중한 각도/손효경 • 경향신문 : 그늘들의 초상 / 최호빈 • 광주일보 :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 정영희 • 국제신문 : 얼룩진 벽지 / 성명남, <시조> 떠도는 섬 - 어느 독거노인의 죽음/ 유헌 • 농민신문 : 은단풍 / 김남이, <시조> 호박(琥珀) 속의 모기/ 권영하 • 동아일보 : 나의 고아원 외/안미옥, <시조> 눈뜨는 화석-천마총에서/ 황외순 • 동양일보 : 조장 / 오기석 • 매일신문 : 물푸레 동면기/ 이여원. <시조>비브라토/ 김석이 <동시> 아버지의 지게/권우상 • 무등일보 ; 불고기, 물꼬기 / 유 빈, • 문화일보 : 풍경재봉사 / 김민철 • 부산일보 :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허영들 <시조>탯줄-가거대교에서/ 황외순 <동시> 모과나무/ 주미경 • 불교신문 : <시조>암자에 홀로 앉아 / 박상주 • 서울신문 : 저무는, 집/여성민, <시조>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김종두 • 세계일보 : 역을 놓치다/ 이해원 • 아시아일보 : 이별연습1 외 / 손상호, 찻잔/김을남, 삶, 아름답고 고달픈 것/ 심형민 <시조>우포 왕버들 / 민승희 • 영남일보 : 목련 꽃 / 조영민 • 영주신춘문예(제5회) : 우리들의 인사법法 / 김경순, <시조> 아바타 한 켤레/ 문제완 • 전남일보 : 위풍당당 분필氏 / 정경희 • 전북도민일보 : 철새를 만나다 / 홍철기 • 전북일보 : 노숙 / 이영종 • 조선일보 : 조련사K/한명원. <시조>외계인을 기다리며/ 양해열. <동시>철이네 우편함/ 김영두 • 창조문학신문 : 모니터 속엔 바다가 없다 / 김부회 • 한국일보 : 월면 채굴기 / 류성훈, <동시> 산새 / 조정일 • 한라일보 : 링거 속의 바다 / 김영란 |
▶▶ 2012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미줄동네
박광희
뿌리 같은, 오래된 골목이 줄에 걸려 바동거린다
나지막한 지붕들이 이마를 맞댄 좁다른 풍경
TV안테나선, 전깃줄, 빨랫줄들이 하늘을 묶은
제각각의 각도를 가진 도형들로 골목은 늘 무겁다
낡은 시간을 매단 전봇대, 습한 담벼락에 숨어있던
표적들이 나타날 때마다 한 뼘씩 몸집이 커지는
외등들, 거미는 가만히 자신의 넓적다리를 숨긴 채
낮고 좁은 골목길을 얼기설기 엮어 낚아챈다
돌돌 말아 고치로 엮어내는 솜씨는 놀랍다
어쩌면, 이 골목 사람들은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줄의 포박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지도 모른다
부글부글, 그깟 몸부림 쯤
진작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 그만인 것을
바람의 입질에 걸려든 젖은 골목들의 눈 속
허공이 공허할 수 없는 건 저 줄들이 만드는 유혹 탓
코르셋처럼 집들이 꽉 끼인 것은 줄의 팽팽한 긴장 탓
낡은 모서리처럼 표지가 뜯겨져 나가
내력조차 희미해진 이곳 사람들, 뻐꾸기시계처럼
때가 되면 문을 열고 뛰쳐나가 울음 울면 그뿐
참붕어 같은 골목은 언제 줄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나지막한 허공을 저인망 줄들이 집들을 묶고 있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젖은 도형들이
허우적거린다, 골목이 환하게 열린다
일제히 미끼를 무는 붕어들의 입질
흰 와이셔츠 폐타이어, 화분, 방수천막지를 물어뜯는다
장마전선의 북상에 바삐 방적돌기를 부풀리는 거미
걸려든 집집의 내력들이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다
동맥경화증에 걸린 골목, 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일상은 내게 호흡이었다. 시 또한 그랬다. 오래 덮고 살다가 언젠가부터 덮개를 열고 나온 그것은 차츰 내 일상을 점령해버렸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제자리를 만들고 있었던가 보다.
아직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보면서 어서 크기를 소망했다. 내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시에게 길을 활짝 열어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조금씩 성장 중이지만 이제 내게로 와 덥석 안긴 시를 끌어안아야겠다.
뒤늦은 출발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조금 착잡하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길, 이제 놓지 않을 셈이다. 절대 급할 일 없으나 결코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 본다. 늘 그래왔듯 새로 난 이 길을 오래 꼼꼼히 새기며 걸을 것이므로 스스로에게 그 책무를 지워본다. 아침부터 눈이 부슬부슬 내리더니… 이렇듯 좋은 소식을 안겨주려고 그랬나보다.
부족한 작품을 끝까지 인내하며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이 기쁨을 전하며, 주변 친지들과도 따끈한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박광희(55) : 카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졸업/ 독서논술지도 강사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 가운데 5편을 선정했다. 정정례의 `내력' 박명삼의 `빈센트 반 고흐의 귀' 강기순의 `미용실' 오영애의 `춘신 春信' 박광희의 `거미줄 동네'였다.
이 중 최종 세 편을 압축해 논의했다. `미용실에서'는 감각이 뛰어났고 일상적 삶을 노래한 것은 좋았으나 사유의 깊이가 미흡했다.
`춘신 春信'은 발상은 좋으나 주제의식이 명징하지 않았고 시적인 역동성이 약하여 평면성에 그치고 말았다. 박광희가 응모한 여섯편 모두의 수준이 고르고 특히 그중 단연 돋보인 작품은 `거미줄 동네'였다.
이 작품은 현실인식이 뛰어나고 상상력과 시를 구성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이 시의 후반에서 보여준 “소나기가 쏟아진 다음 골목이 환하게 열리는”이라는 이미지 묘사는 시의 전반을 지배하는 삶의 고달픔과 어두움과 공허를 반전시킨 점이 이 시를 더욱 빛냈다. 매우 우수한 작품이었다. - 심사위원 :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 이영춘 시인
<동시>
사과나무 심부름
하지혜(하경자)
과일농사 짓는 삼촌에게
사과나무가 일을 시킨다.
-봉지 씌워
-겉봉지 벗겨
-속봉지 벗겨
-이제 따서 담아
사과나무 심부름하느라
이 가을 삼촌 얼굴도
발갛게 익었다.
[당선소감] 별처럼 반짝이는 이 순간을 함께 나누고파 / 하지혜
그동안 지어온 동시 농사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2007년부터 해마다 강원일보에 응모, 본선에 두 번 오르고 떨어졌는데 4전 5기 끝에 수확을 거두었다. 마음이 가라앉자 캄캄한 터널 속에서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길러 주신 어머니가 떠오르며 가슴이 뜨거워진다. 어려움을 꿋꿋하게 이겨낸 형제들을 생각하면 다시 힘이 난다. 이제 즐거운 고통의 길에 들어섰다고 보다. 길을 떠날 때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어디서 출발했는지 잊어버리기 쉽지만, 출발할 때 마음을 끝까지 붙잡고 가겠다. 새들의 깃털이 아닌 비상하는 정신을 그리는 진정한 작가가 될 것이다. 골치 아픈 걸 왜 하냐고 타박하면서도 나보다 더 동시 걱정이 많은 남편, 가장 자연과 가까운 사람이 되어 나무 같은 동시를 써내라는 옥이 언니, 동시 짓는 맘이 고장날 때마다 서로 서로수리해 주는 선생님, 문우들과 별처럼 반짝이는 이 순간을 나누고 싶다. 내게 최고의 상을 주신 강원일보에도 감사드린다.
▶하지혜(하경자·47) : 지대 유아교육학과 졸업, 오늘의 동시문학 신인상 당선 / 미래 동시모임 회원
하지혜 씨의 `사과나무 심부름'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의 작품은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그만의 방법을 돋보이게 한다. 주변의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안(詩眼)을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어서다. 즉, 달리보기를 통해 사물을 새롭게 형상화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과나무 심부름'에는 `삼촌이 사과나무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가 삼촌에게 일을 시키는 것', `사과나무 심부름 하느라 이 가을 삼촌 얼굴도 발갛게 익었다' 와 같은 뛰어난 동심적 상상력으로 사물을 재미있고 따뜻 하게 묘사하고 했다.
신인으로서의 신선함이 이런 데 있다. 그리고 명령조로 사과나무가 삼촌에게 일을 시키는 의인화가 바탕에 유머를 깔리게 해 웃음도 함께 선물한다. 하지혜 씨의 다른 작품들도 수작이다. 단숨에 읽히면서도 여운이 남게 하는 시들이다. 이런 점이 그를 선뜻 당선의 자리게 올리게 하였다. 동시단의 새로운 별로 뜰 것이라는 기대감을 준다. -이화주·박두순 아동문학가
▶▶ 2012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흰꽃이 지다
오영애
흰꽃이 진다 한꺼번에 진다 비를 맞으며 서서 수십 톤씩 진다 무더기무더기 진다 바야흐로 진다 가슴이 하나 진다 통곡하듯 진다 둥둥 떠서 진다 꽃상여로 진다 절뚝절뚝 진다 맨땅위에 진다 색 없이 진다 화 없이 진다 자식 없이 진다 원수 없이 진다 수의(壽衣) 없이 진다 실로 꽃 곁에 가까이 울며 서 있는 장바구니 든 나도 진다
[당선 소감] 시는 삶의 구원이자 치유였다 / 오영애
뛸 듯이 기쁩니다. 무변창공을 훨훨 날아오를 것만도 같이 기쁩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이제야 벗어버리는 듯한 홀가분한 이 기분 생에 최곱니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줍니다. 무량으로 기쁩니다.
뼛속까지 다 비워버리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시조새의 날갯짓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좀체 떠날 수 없었던 슬픔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깨지고 부서지고 여과 없이 떠나갑니다. 화석으로 옹이 박혀 점점 더 깊이 화인 자국을 남기고 결집해 있던 시의 응어리들이 가차 없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십수 년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곪을 대로 곪은 상처투성이, 그야말로 구제불능인 신춘폐인으로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수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조차 없는 몸과 마음으로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며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힘을 주었던 것은 문학에 대한 열정, 즉 위대한 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같습니다. 제게 시는 삶의 구원이자 치유였으니까요.
이제 시의 꽃을 피우는 봄이 왔습니다. 마음껏 시의 밭을 누비며 황량했던 마음을 갈고닦으며 경작해 보이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전날 밤 꿈속에서 본 영롱한 빛깔의 시 무지개를 하늘에 걸겠습니다. 한림대 김은자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태환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식구들 감사합니다. k.k.k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끝으로 경남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 너무도 감사합니다. 지상으로 내려오는 첫눈을 두 손으로 받습니다. 공손히 받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오영애 : 1955년 강원 춘천 출생 /제7회 김유정문학공모 대상 /신사임당문예 수상 /강원일보 신춘문예 최종심 3회.
[심사평] 오롯한 말솜씨와 창조적 가락 / 박태일, 김언희
시처럼 짜맞춘 시, 시로 보이기 위해 안달하는 시, 쓰는 사람 스스로도 재미 없을 그런 시를 읽는 일은 피곤하다. 해묵은 사회적 낭비. 기성 양복을 입은 듯한 말씨만 번잡스럽다. 이즈음 평균 취향이 그렇다며 넘기고 말기에는 씁쓸할 따름. 신춘문예 당선을 겨냥한 신인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갖고자 고심한 흔적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을 두고 뽑는 이는 그 점을 먼저 살폈다.
김혜경의 ‘진화론’은 변기에 앉는 삶에서 거미의 생태를 유추한 시다. 자신도 “발 대신 다리”가 “돋아날 듯” 쓰리다는 마무리까지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거미 글감 시들과 나뉠 만한 확연한 울림은 얻지 못했다. 김혜강의 ‘비’는 제목 그대로 비에 대한 풍정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엮은 직조술이 참신했다. 그럼에도 비를 빌린 땅과 하늘의 교감을 “옥황상제와 몸 섞는 소리”라 한 데서 평범에 머물고 말았다.
오영애의 ‘흰꽃이 지다’는 앞선 둘에 견주어 신춘문예용 시에서 멀다. 단형에다 담긴 속살 또한 막연하다.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짜임도 ‘ㄱ이 진다’는 월의 엮음과 되풀이로 한결같다. 그것을 받치는 몸말은 명사형에 갇혀 감각적 표현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창조적이다. 자기 가락을 지녔다. 자신이 겪은 바를 자기 목소리로 뱉는 힘이 시인 되는 첫 조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게다가 말솜씨까지 오롯하다. 이 시는 삶의 막연한 속살로 길게 이어진 앞과 “장바구니 든 나”를 내세운 짧고 구체적인 마무리 월, 두 매듭으로 짜였다. 그런데 둘 사이 단층이 지닌 뜻은 크다. 앞 매듭에 넘치는 감상이 삶의 깊이로 뒤바뀌는 놀라운 비약을 뒤 매듭이 마련한다. 한 여자가 겪은 아픈 간난을 단형의 가락으로 울림 크게 살려 낸 절창 ‘흰꽃이 지다’. 오 오 시인, 멀고 멀 창작의 길에서 독야청청 피고 피기를. <심사위원 박태일·김언희>
2012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바람의 뼈
- 불일암
유선철
단순한 무대는 화려하고 장엄했다
오롯한 발자취, 죽음마저 연주였다
고요는 달빛을 풀어
그의 뜰 쓸고 갔다
모서리 동그마니 묵언에 든 나무 의자
그 아래 하얀 뼈가, 말씀이 묻혀 있다
망초꽃 흔들어놓은
바람이 거기 있다
[심사평] 자신의 시를 창작하는 힘 가져 / 하순희, 이달균
임진년 새해를 맞아 또 한 사람의 촉망되는 신인을 배출시키기 위해 우린 신중한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대부분의 응모작들은 치열한 습작과정을 통해 일정부분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정제되지 않은 자연서정과 영탄, 설익은 관조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아 군계일학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남는다. 결심에서 손자의 남은 작품은 송인재의 ‘그 동전, 은유의 무게’, 구애영의 ‘유빙(遊氷)을 바라보며’, 최승관의 ‘바다, 그 두려운 갈망’, 유선철의 ‘바람의 뼈’ 등 4편이었다.
‘그 동전, 은유의 무게’는 첫째 둘째 수에선 형식 속에서 담담히 서정을 풀어가는 솜씨에 눈길이 갔는데, 셋째, 넷째 수에 오면서 절제를 잃고 감정 과잉을 낳아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함께한 응모작들 역시 그런 약점을 드러내는데 이런 부분을 보완한다면 좋은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유빙(遊氷)을 바라보며’는 적절한 비유를 차용해 와 결빙의 퍼즐처럼 뻗어나가는 심상들에 근접시키려 했으나 시조 특유의 축약과 가락을 잃고 있어 이 또한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맴 마지막까지 거론된 작품으로는 ‘바다, 그 두려운 갈망’과 ‘바람의 뼈’였다. 앞의 작품은 보내온 작품들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보여주고 잇을 뿐만 아니라, 음보를 자유롭게 다룰 줄 아는 장점에 눈길이 갔다. 그러나 적확한 임지를 얻지 못함으로써 주제를 선명히 드러내는 데 실패하고 있어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이에 비해 ‘바람의 뼈’는 시조가 필연적으로 가져야 하는 함축과 가락을 안으로 잘 갈무리하고 있어 안정적으로 정형률을 다스리는 힘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신춘문예용 작품이 아닌 자신의 시를 창작하고 있어 신뢰를 갖게 한다. 이런 안정감을 반대로 날선 시대를 향한 시대정신을 담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런 당부를 빌면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민다. 한국 시조단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대성하기를 바라며 축하드린다.<심사위원 하순희, 이달균>
▶▶ 2012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루귀가 피는 곳
최인숙
그래 그래 여기야 여기
신기해하고 신통해하는 것은 뜸이다
안으로 스미는 연기의 수백 개 얼굴이
아픈 곳을 알아서 나긋나긋 더듬는다
그러고 보면 뜸은 어머니의 손을 숨기고 있다
뜸과 이웃인 침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침의 얼굴과 대적한 적 많아
보는 순간 심장부터 놀라 돌아서곤 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뜸이 다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도 부엌에서 또 뜸을 뜨고 계셨다
아침저녁 굴뚝으로 하늘 한켠을
할머니 무덤 여기저기에
노루귀가 피었다
겨울과 봄 사이
가려워 진물 흐르는 대지에
아니 너와 나의 그곳에
누가 아련히 뜸을 뜨고 계시다
어느 세상의 기혈이 뚫렸나 하루도 환하다
[당선소감-시]“많이 보고 듣고…
세상을 색다르게 읽어내는 시인 될 터 / 최인숙
안개가 짙은 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맑은 날인데도 내 안에 무시로 찾아드는 안개의 시간. 이럴 때면 사물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곤 했습니다. 그 말들에 귀 기울이고 견디다가 한없이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떤 날은 정말 간절하게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 간절함이 이렇게 쉽게 기쁨으로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당선 통보 전화를 받고 이게 사실인가 아닌 가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직까지 자신감 갖지 못한 제 시를 이렇게 훌쩍 건져 올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더불어 경상일보에도 한없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시인이 될 것임을 약속합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여러 분야를 천천히 보고, 듣고, 느끼며 세상을 색다르게 읽어내겠습니다.
문학의 길을 새롭게 열어주신 김영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저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준 문우들,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힘든 작업임에도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아 준 내 가족과 부모님,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최인숙 / 1966년 서울출생 / 가톨릭대 사회사업학과 졸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이질적 형상화로 작가의 시적 내공 고스란히 묻어나 / 이건청
응모작품들을 공들여 읽었다. 요즘의 한국시가 지나치게 난삽하면서 그 길이도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하는데, 이번 응모작들도 그런 경향들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시인이 지니는 표현 의도는 최적의 언어로 구조화되고 형태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표현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략과 함축으로 끌어안을 때 견고하게 정제된 시를 만날 것이다.
<노루귀가 피는 곳>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의 작자는 작은 풀꽃인 ‘노루귀’에서 환기되는 정서를 한방요법의 ‘뜸’으로 풀어내고 있다. ‘뜸’은 약쑥을 비벼서 인체의 혈 위에 놓고 불을 붙이는 치료행위이다.
연기를 내면서 쑥이 타들어가고 그 기운이 혈을 자극해서 막힌 기를 소통시킨다. ‘노루귀’의 식물이미지를 한방치료 요법인 ‘뜸’으로 병치시킨 시인의 착상도 새롭지만 아침저녁 굴뚝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어머니의 노고와 ‘뜸’이 피워 올리는 연기를 합일시킨 상상의 능력도 두드러진다.
상호 이질적인 이미저리(‘노루귀’ ‘뜸’)를 연관시킨 시인의 상상력은 이 시의 작자가 상당한 시적 내공을 쌓은 분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같은 시인의 투고 작품 <무지개>도 선연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이분의 역량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최종까지 남았던 작품들은 <우포의 달 외 2편>, <할머니의 기도 외 3편>, <다리가 잘린 소녀에게 외 2편> 등이었다.
이분들도 나름대로 시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들이다. 정제된 시에 이르는 노력들을 계속한다면 좋은 시에 이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훌륭한 시인으로 우뚝 서 주기를 바란다.
▶이건청 : 1942년 경기이천 출생 /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외 /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다수 수상.
2012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애기똥풀 자전거
박성규
색 바랜 무단폐기물 이름표 목에 걸고
벽돌담 모퉁이서 늙어가는 자전거 하나
끝 모를 노숙의 시간 발 묶인 채 졸고 있다
뒤틀리고 찢긴 등판 빗물이 들이치고
거리 누빈 이력만큼 체인에 감긴 아픔
이따금 바람이 와서 금간 생을 되돌린다
아무도 눈 주지 않는 길 아닌 길 위에서
금이 간 보도블록에 제 살을 밀어 넣을 때
산 번지 골목 어귀를 밝혀주는 애기똥풀
먼지만 쌓여가는 녹슨 어깨 다독이며
은륜의 바퀴살을 날개처럼 활짝 펼 듯
페달을 밟고 선 풀꽃, 직립의 깃을 턴다
[당선소감]“징소리처럼 울려나오는 한마디가
바로 ‘시’임을 깨달아”/ 박성규
찬바람 할퀴고 지나가는 골목길도 저에게는 따스한 봄의 계단입니다. 우연히 어느 골목 담벼락에 몸을 기댄 자전거를 보았습니다. 제 수명을 다한 듯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비스듬히 누워있어도 누구 하나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누군가가 힘차게 페달을 밟고 거리를 누볐을 것 같았습니다.
요즘 경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다들 어깨를 움츠리는 세상입니다. 애기똥풀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직립의 깃을 털 듯 살맛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황금물결 출렁이는 고향의 가을 들녘은 생각만 해도 늘 가슴이 뜁니다. 어릴 적부터 자연을 마주하고 자라서 그런지 항상 자연에 의탁하여 뭉클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시를 받아내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멋진 시가 탐나서 화려한 문장으로 펜 끝을 세워보지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징소리처럼 울려나오는 한마디가 바로 시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를 우리 민족시가의 대표적 정형시인 시조의 길로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를 신뢰하고 묵묵히 지켜봐준 가족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서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애처럼 서서히 시마(詩魔)에 다가서려 합니다. 아직 부족하고 설익은 졸작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들과 경상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박성규 / 1969년 충북 보은 출생 / 자영업 / 2009년 송강 정철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심사평] 참신한 시적 발상과 시상을 풀어내는 솜씨 자유로워 / 이근배
모국어의 높은 벽을 뛰어넘는 눈부신 도약을 신춘문예 시조에서 본다. 글감 찾기에서부터 말 고르기, 그리고 시조의 틀에 얹힌 가락을 뽑아내는 솜씨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새로움을 더해가고 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이미 일정한 수준의 기량을 갖추고 있어 그 우열을 가리기 위해 거듭 읽어야 했다.
올해는 경주에서 열리는 국제 펜 대회에서 시조가 주제로 채택되어 세계의 문학인들에게 우리 모국어의 정체성이며 한국시의 정체성인 시조의 참모습을 펼쳐보이게 된 만큼 이 땅의 시재가 있는 신인들이 시조쓰기에 골몰하고 있음을 크게 반기지 않을 수 없다.
당선작 <애기똥풀 자전거>는 시적 발상이 참신하면서도 시상을 풀어나가는 솜씨가 자재롭다.
수명을 다해 버려진 자전거를 한 생명체로 되살려 놓으면서 “애기똥풀”을 등장시켜 빛나는 비상을 이끌어내는 생각의 힘이 4수의 시조에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색 바랜 무단 폐기물 이름표 목에 걸고”로 운을 떼고서 “페달을 밟고 선 풀꽃, 직립의 깃을 턴다” 의 마무리까지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마지막 종장을 이 시인의 날개 펼 시조의 내일이 되리라 믿는다.
끝까지 겨뤘던 작품으로 ‘유배의 섬을 간다’ ‘바퀴의 질주’ ‘무당거미의 아침’ ‘먼지의 산란’ ‘늦은 장마’ 등도 각기 기성의 벽을 넘을 역량을 담고 있었으나 한 자리에 밀려났음이 못내 아쉽다.
2012 경상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손 머리 위로
방희섭
오늘은 내가 급식당번
반찬을 배식 받아서 교실까지 옮겨 나르는 중에
소시지 하나를 날름 집어먹다가
선생님께 딱 걸리고 말았지
불같이 화를 내시는 선생님 앞에서
나는 가만 생각에 잠기지
코를 막고 소시지를 먹으면
맛이 느껴지지가 않아
그래서 코가 입보다 높이 있는 거야
맛있는 냄새를 맡아도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궁금해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겠지
그래서 눈이 코보다 높이 달린 거고
눈으로 보더라도 맛이 있을지 없을지, 먹을지 말지
머리로 생각하지 않으면 소시지는 더 이상 음식도 아닌 거야
그러니까 눈 위에 머리가 있는 거겠지
제일 중요한 건 말이야,
먹고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 손으로 날름 집어먹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거야
그러니 내가 지금 이렇게 복도에 무릎 꿇고 앉아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있는 거겠지
아이고 배고파
[심사평] 따뜻한 이야기·활달한 상상력으로 감동 불어 넣어 / 이상교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올라온 동화 작품은 모두 23편이었다. 한편 한편 작가의 땀과 정열이 느껴지는 귀한 작품이므로 읽고 또 읽으며 고심했다.
작가 지망생들이 쓴 글이기에 미숙하고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장래에 얼마나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는가를 염두에 두었다. 글쓰기에 있어 몇 가지 언급하자면 책을 많이 읽고 습작을 많이 하라는 충고를 주고 싶다. 평범한 이야기지만 다독과 다작을 많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다. 거기에 사물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글쓴이로서 독특한 색채를 갖게 될 것이다.
<부엉이와 나비>는 그런 점에서 가장 돋보인 작품이었다.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 아저씨와 길고양이와의 따뜻한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한 가지 조심스러운 점은 동화에서 사투리를 사용하는 문제다. 앞으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끝까지 견주었던 <달리는 자전거>와 <금동이> 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동시 부문에 있어서는 보내온 여러 편 가운데에서 <호박>을 쓴 이의 동시 여러 편과 <손 머리 위로>를 쓴 이의 여러 편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호박> 을 쓴 이의 작품은 뛰어난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형상화하는 힘이 조금 모자란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차분히 손보았더라면 싶은 아쉬움이 들었다. <손 머리 위로>를 쓴 이의 동시의 장점은 활달한 상상력과 밋밋하지 않은 표현 등이 오랜 습작기를 거쳐온 듯 든든함과 신선함을 함께 주었다.
동화와 동시, 두 부문 가운데 어느 한쪽을 버릴 수 없이 탄탄한 이유도 있어서겠지만, 아동문학을 아껴 두 부문 모두 수상키로 결정해주신 경상일보 측에 깊고도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 동시 심사위원 : 이상교
- 서울에서 태어나 강화에서 성장. / - 1973년 소년 잡지에 동시 추천 완료, 197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부문 입선, 1977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부문 입선 및 당선. / - 한국동시문학회 4기 회장과 한국아동문학인협회 부회장 역임. / - 지은 책으로 동화집 <댕기 땡기>, <처음 받은 상장> 등이 있고, 동시집으로는 <좀이 수신다>, <먼지야, 자니?> 등이 있음. 그림책으로는 <도깨비와 범벅장수>, <난 떠돌이개야>, <방귀쟁이 며느리>등이 있음. / - 세종아동문학상과 한국출판문화상 등 수상
[당선소감] “청춘의 방황에 위로가 된 아동문학” / 방희섭
부족한 제게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과 기회를 준 경상일보에 먼저 감사를 드려야겠다. 힘들고 지칠 때 내게 위로가 되던 것이 아동문학이었다.
청춘의 방황과 모색 끝에 아동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깨달은 바가 있다면 아동문학이야 말로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인간의 본질을 건드리는 진중한 문학 장르라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독자로 맞아들임으로써 다른 무엇보다도 문장에, 이야기에 꾸밈이 없어야하고, 환상일지라도 그 조건 안에서의 사실적 정황을 여과 없이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 본질과 현상 사이의 기로에서 어린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무래도 본질로의 접근 같고, 그것이 우리의 인성을 좀 더 투명하게 만든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의 친구가 되고 싶고 때론 냉철하게 지켜보고도 싶다. 내 어린 영혼이 언제나 건재하게끔 세상을 투명하게 정면으로 바라보고도 싶다. 힘겨워 때로 궁지에 몰릴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내가 건강한 제안 하나 꺼내 보일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아동문학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이 독자들을 위로하는 작은 선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남몰래 희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아동문학에 첫발을 떼게 해주신 나의 스승 황선미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학창시절 못난 담임선생들을 대신하여 전인교육을 담당해주었던 짬이와 뚱이 부부에게도 감사하다. 그밖에 마되-진규쌤을 비롯한 많은 지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주신 사랑하는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감사의 절을 올린다.
▶방희섭 / 1985년 울산시 동구 방어진 출생 / 대송고등학교 졸업 / 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재학 중.
▶▶ 2012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우물이 있던 자리
이승혁
잠 못 이루는 잔별들이 풍덩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밤
할미의 쇠잔한 잔기침을 받아내는 밤안개가
처마 끝에서 너울지며 유영하고 있었지
빨랫줄에 걸린 물때의 온기가 자정을 적실 때면
어린 나의 입 속으로 곶감같은 어미의 숨결이 아득하게 쏟아졌었지
위태로운 유년을 닮은 초승달이
내 여린 이마를 가만히 보듬고 가곤 했지
바다의 능선을 타고 돌아오던 메아리가
어린 치어들을 깨워놓고 산 그림자 속으로 흘러가던 날
두레박을 혼자 끌어올리자 변성기의 새벽들이 사춘기처럼 찾아왔지
할머니, 내 울대의 잔별들이 사라졌는지
우물에선 맑은 목소리가 올라오지 않아요
누군가 머릿속에 방생한 악몽들만 짜디짠 입가를 헤엄치고 있어요
줄이 끊어진 두레박은 우물 속 깊이 가라앉았고
전설들 두레박을 기울여야 또다른 힘을 얻던 유년의 꿈들도
더는 담겨지지 않아요
얘야, 네 어미의 바다는 새벽시장 마른 비늘의 궤짝들 틈이란다
횟속 깊이 박힌 몇 개의 미늘과 목젖을 열 때마다
아아.. 말이 되지 못하는 실어증의 힘으로만 너를 낳았단다
그렇게 할머니의 유언이 몇줌 두레박 속의 전설로 담겨지는 사이
어머니의 바다 더 깊은 궤짝들 틈으로 실종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우물거림으로도 씹히지 않는 먼먼 날들의 그 바다
저물녘
늦가을의 핸들을 구부리며 깃드는 *신문리 451번지의 안마당 고요가
방금 전 그 파도에게라도 들켰는지
아주 오랜 옛날의 漁信처럼 기억의 지느러미 하나로 획 사라지고
있었다
* 강화읍의 마을주소
[당선소감] "고3친구들에게 제일 먼저 감사…
이젠 진짜 내 이야기 시작할 때" / 이상혁
지난 가을 내 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제가 우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저녁 습작의 분량으로 쓰여지게 된 시, 그게 당선작이라니.
우물, 아직은 내 기쁨의 표정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되비춰지지 않는다. 미정인 채로 남아있는 대학 진로와 거리의 크리스마스 캐럴, 그 겨울을 비집고 내가 어머니의 분노에 다급해질 때마다 숨어들던 어린 시절의 식탁 밑이 떠오른 건 또 왜일까. 지금은 어떠한 수사도 어떠한 문장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 파도소리 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이제부터는 내 본래의 이야기를 조금씩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먼 소년기 때 조립하다가 중단된 서랍속의 장난감들과 저녁이면 하늘의 별 대신 아버지의 퇴근길 호프집 풍경에 고정시켰던 내 망원경, 형을 데리고 나서던 초등학교 뒷길, 문구사 아저씨의 색소폰 연주, 모두 내 시의 전리품이었음을 이제서야 실토한다.
내 기쁨의 이면들을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옮겨본다. 입시에 눈이 빨개진 강화고등학교 3학년 1반 친구들,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어느 길이든 걸었던 방황의 맨 마지막 코스였던 반지하에서 노래로 허기를 때우던 일행들, 입시의 기로에서 낭패에 빠질 때마다 투신 제의를 해오던 도시의 친구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너희들이 있어 지난 한 해의 비극도 희극으로 뒤바뀔 수 있었다. 이튿날이면 교과서 대신 또 다른 종류의 천재를 부여해주시던 김영언 선생님, 묵묵히 걸음마 떼기를 기다려 준 가족들, 반항의 시간들을 지켜봐 주신 담임선생님, 내 10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멘토가 되어주신 김종연 선생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무엇보다 저를 뽑아주신 민용태 교수님, 김영철 교수님, 먼 길 가는 수사의 여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상혁 : 1993년 인천 강화 출생. / 강화고등학교 졸업 예정 / 만해축전 시부문 장원 / 현대시문학 청소년 문학상 금상
[심사평] "유년기 시적 감수성 한 데 묶어…
현실·꿈 오가는 상상력 돋보여"/ 민용태·김영철
본선에 올라온 35편의 작품들은 시적 완성도에서 일정 수준에 이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으로 관념의 덩어리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파편적 이미지 다발의 연쇄로 서술의 골격이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추상성과 관념성이 구체적 시적 진술로 체화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엘리어트의 말대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돼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통과 통섭이 이 시대의 가치론적 코드인 만큼 수용미학적 차원에서 시적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난 세 편의 작품에 주목했다. 먼저 최영랑의 '고동의 길'은 고동의 길에서 인생의 굴곡을 반추하여 삶의 본질을 천착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실현한 작품이다. 관념적 주제를 구체적 형상과 비유를 통하여 설득력있게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형상화의 초점이 다소 산만하게 흐트러져 시적 텐션이 조밀하게 형성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허영술의 '치즈의 눈물'은 원룸촌의 고달픈 삶과 슬픔의 내부를 의식의 소도구들을 동원하여 정치하게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다소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의 충돌로 진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혁의 '우물이 있던 자리'는 시적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한 작품이다. 유년기의 잡다한 체험과 소재, 의식들을 하나의 감수성으로 통합하여 내적 질서를 창조해 내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시적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유년기와 성년기의 상상체계에 '잔별, 초승달, 두레박, 바다' 등의 은유기제를 덧입힘으로써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하고 있다. 유년기의 기억을 인상의 연쇄로 묶어내어 튼튼한 회상구조의 내적 통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적 통로는 시적 화자의 내밀한 언술로 착색되어 설화적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다양한 의식과 체험들을 개성적 감성으로 흡인하여, 현상과 환몽의 의식세계를 넘나드는 환유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울러 이미지 다발의 유기적 짜임으로 의미생성을 이루는 생산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성취를 고려하여 '우물이 있던 자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2012 경제 신춘문예 시 우수작
구두
강지혜
고단 했던 시간
훌훌 털어 버리고
밤 내린 신발장
아버지의 구두도 잠이 들었다
바람 불어
흙먼지 일던 길을 걸었지
내일은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또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코 끝에 햇살 내려와
밝게 빛나게 될 날은
언제일까
멀어도
바람 속
꿈을 안고 걷는 이 시간
언젠가는 꼭
비단길이 펼쳐 지겠지
빛 바랜 구두
닳은 굽 모서리
먼 꿈을 꾸며
달빛 한 자락 끌어 덮는다
[수상소감] 경제신춘문예 우수상
온 세상이 은빛으로 물들어 있는 눈 내린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눈꽃이 가슴 가득 들어옵니다.
언젠가, 새해 첫날 신문 지면에 당선 소감과 내 사진이 실릴 멋진 날을 꿈꾸어 왔던 시간 속에 지금 놓여져 있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미리 소감문을 써보며 혼자 웃기도 했었고, 미리 사진을 찍어보며 가상의 극본을 쓰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술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칠 때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부축여 힘을 내었습니다.
우선 제게 힘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글쓰기에 더욱 정진하라는 채찍질로 좀 더 낮은 자세로 걸어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쓰는 진정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집안 일을 거들며 적극 격려해주는 남편과 항상 엄마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외쳐 봅니다.
제게 시의 문을 열어 주신 스승님, 문협 선생님들과 오늘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짧디 짧은 글 속에서나마 인사를 드리며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한 분들을 잊지 않고 더욱 박차를 가해 좋은 글 세상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때때로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오늘의 기쁨을 안기 위한 시간이었고, 더 튼튼하게 자라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아직도 설렘에 가슴이 벅찬 날, 자신에게 또 최면을 걸어 봅니다. 넌 언젠가 든든한 뿌리가 될 거야! 더 열심히 해야 해, 알았지? 라고.
2012 경제 신춘문예 시 우수작
정중한 각도
손호경
관솔 몇 점으로 술잔을 만든다
그 잔에 향기를 가득 채우면 그가 나를 차지할 것이다
먼저 톱을 켜서 곁가지를 자른 다음 용각무늬가 새겨진 몸을 열어놓는다
빗물로 몸을 닦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던 한 생이
압축된 곡선을 고담하게 품고 있다
끌 머리를 토닥이며 흑반점 하나를 도려내자 메아리가 퍼렇게 울려 퍼진다
그늘이 엷은 바람을 일으키자
그 몸에 우주를 그리듯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숨을 멈춘 채 굳은 살점을 파들어간다
날 선 끌을 튕겨내다가 제 무늬를 가무리며 끌을 물고 늘어진다
어느 누가 제 몸을 호락호락 내어줄까
정중한 각도로 손잡이를 고쳐 잡고 청정한 마음으로 살점을 들어낸다
구멍이 깊어질수록 관솔은 유순해지고
한 생애를 묵언으로 간직해온 감로정의 향기가 무늬의 간극마다 흘러나온다
두 손 위로 올라앉은 술잔
울창한 솔밭 한 채가 그 안에 담겨있다
[수상소감] 경제신춘문예 가작
응모 후, 마음을 텅 비운 채 차라리 눈이 내리길 기다렸다. 눈을 맞으며 ‘풀밭’에 가고 싶었다. 허름한 건물,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옥상이 있고 한쪽 옆에 낡은 옥탑방이 있다. 풀 향기 풍기는 그곳에서 나는 꿈을 키워나갔다. 늦은 밤까지 서로의 작품에게 매를 대는 날이면 허기보다 절망감이 먼저 찾아올 때가 많았다. 누가 걸어놓았을까, 창밖에 걸린 풍경소리에 조용히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언젠가 그 작은 풍경소리가 바람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울려나왔고 내 생각은 점점 깊어갔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정확한 각도로 대했을 때만이 일을 그르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풀 한포기를 뽑는다거나 작은 못 하나를 박는 일까지도 각도가 어긋나면 풀잎만 뜯기거나 못만 휘어지지 않았던가. 나는 그 각도를 정중한 각도라고 생각했다. 모든 삶에 있어서나 버림받은 시에게까지도 정중하고 싶었다. 막상 당선이 되고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정중했을지, 기쁨 뒤에서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고 부끄러워진다.
많이도 부족한 시를 놓고 고민하셨을 심사위원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다. 부족함이 덜어지도록 더욱 열심히 써야겠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주시는 선배님들과 열띤 합평 후에 늘 손잡아주시는 모든 풀밭 식구들이 고맙다. 그리고 용기를 주셨던 마경덕 시인님을 비롯하여 풀밭에서 스쳐간 모든 인연들도 고맙다. 유일한 독자가 되어주고 비평까지 아끼지 않았던 아들 동흔, 당선이란 한 마디를 듣고 병환 중에도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 그 웃음 속에서 오래도록 사랑하고 싶다.
[제7회 경제올림피아드] 경제신춘문예 심사평
산문 부분에서는 머니투데이가 실시하는 경제신춘문예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예전에는 맹목적인 절약을 강조하거나 경제용어와 현상을 설명하기에 바쁜 글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이야기 안에 여러 경제적 행위와 현상을 녹여내는 작품들이 늘었다.
←(왼쪽부터) 이희주 시인과 이순원 소설가, 채원배 머니투데이 금융부장이 종로구 소재 머니투데이 본사에서 경제신춘문예 수상작을 심사하고 있다ⓒ 사진=이동훈 기자
선택에서는 밀렸지만 <아보카드 으깨기>도 아주 잘 쓰여진 작품이다. 그러나 공모 부분이 경제신춘문예라는 점에서, 이야기의 소재로서 경제와의 연관성을 생각할 때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몇 편의 수필들도 실제 생활 속의 이야기보다는 무엇을 계도하고 주장하는 쪽에 더 초점이 맞춰진 듯한 아쉬움이 있었다.
시부문은 아직 수준에 미달하는 출품작들이 많았다. 산문의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렵게 4편을 최종심에 올렸다. <폐화분>과 <오리무중>그리고 수상작으로 결정된 <구두>와 <정중한 각도>가 그 작품들이다.
<페화분>은 골목에 버려진 화분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함께 출품한 작품들이 이에 따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다음으로 <오리무중>은 "세상은 수심이 너무 깊어/발이 닿지 않았다"는 표현에서 보듯 시적 상상력이 뛰어났다. 다만 작품 후반이 전반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작으로 뽑힌 <정중한 각도>는 함께 출품한 작품들이 골고루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 시적 훈련이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준다. 산문처럼 늘어지지 않는 시적 긴장도를 갖춘다면 더욱 좋은 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우수상에 뽑힌 <구두>는 슬프고 단아하고 아름답다. 강렬하지 않으면서도 울림이 있고 특히나 다른 분들의 작품과 달리 희망을 버리지 않아 좋았다. 시적 분발을 기대하게 되는 까닭이다.
▶▶ 2012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늘들의 초상
최호빈
외팔이 의사가 기타를 연주하는 하얀 레코드판 위로 한 아이가 돌면
걸음마다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오선지에 적힌 외팔이의 과거를
한 페이지씩 뒤로 넘기면 검게 변해버리는 장미,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날 때 멈추는 음악 검은 장미의 정원 줄이 끊어진 듯 문은 닫히고
검은 레코드판 위로 한 줌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는 잿빛 음악이
무책임한 허공을 읽는다
*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십시오,
안내방송이 끝나기 전 먼저 도착한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
태어나자마자 걸친 인간의 가죽이 낯설어서 울면,
목에서 흘러나오는 짐승의 잡음을 따라 다른 영아들도 울었다
우는 자에게 위안은 더 우는 자를 보는 것 전생과 후생 사이를
감지하는 나의 두개골은 밀봉되기를 거부했고 두,늦게 나타난 간호사가
기껏 흘린 피를 지워주었다 차지해야 할 자리를 잡지 못한
오감의 무중력 속 나는 갈라진 틈의 눈으로 울다가 낯선 요람에서
잠을 깨기도 했다
*
울음마저 피곤하게 느낄 때 내게 열리는 것
보일 듯 말 듯 소중해지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움직인다
기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책상과 옷장과 침대가 말없이 싸운다
젖은 옷을 입은 채 나를 말리기 위해
회의적인 귀를 바닥에 대면
잠든 나에게 속삭이는 누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소식들이
무언가에 부딪혀 움푹해진 순간으로 흘러든다
예전의 마른 상태로 돌아가는 소매
팔보다 긴 그림자를 흔드는 소매
나조차 없는 느낌의 눈 속엔 아무도 없는데
속삭임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내 귓속엔 하루를 순환하는 입이 살고 있다
▶▶ 2012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정영희
아무르 강 소인이 찍힌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우표 네 귀마다 고드름이 박혀있는 흑갈색 편지에는
온난화 현상도 이곳에선 세계대백과사전에서나 읽어보는 호사라며
한낮에도 발가락을 날개 안쪽 깊이 파묻고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순천만에서 담근 농게 장을 벽돌 빵에 치즈대신
발라먹고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며
새끼들로 인한 궁기窮氣때문에 늦은 저녁까지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온다는 행간에는 한숨이 진하게 배어났다
철새라고 부르는 비아냥 때문에 눈자위 진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대목에서는 먹빛 하늘을 갈기처럼 찢고 싶었다
허기로 눈밭에 시리도록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이젠 지쳐
순천만의 텃새로 귀화를 결심하고 있다는 추신에 이르러서는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갯가 짱뚱어의 눈알이 봉분처럼 튀어나온 이유를 알겠다
망둥어는 왜가리 공습을 기어코 막겠다며 전망대까지 벌써 올라와 있었고
칠게들은 뻘 구멍 속에 흑두루미의 식량을 비축하느라
열 발톱이 문드러질 정도였다
흑두루미의 귀환 아닌 귀화를 위해 탄탄한 움집이라도 예비해야 한다며
풍속을 온몸으로 가늠하고 있는 갈대의 심지도 깊었다
너울은 먼 바다에서 싱싱한 먹잇감을 데리고 오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그재그로 물길을 오르내렸다
냉기가 옷깃을 쓸며가자 사람들이 탐조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깃털 스쳐가듯 달이 구름을 밀어 올리자
쿠르르, 쿠르르, 카아오, 카아오!
회색 부리를 비틀며 북쪽 하늘에 까만 점들이 펄럭거렸다
이백 스물여덟마리 대가족의 귀환 아닌, 귀화였다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아궁이에 지핀 온기 나누고 싶어”/ 정영희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날, 서걱거리는 갈대밭에 앉아 철새들의 비밀을 문구멍으로 염탐한다.
첫눈을 기다리며, 철새들의 몸짓이 함박눈이라면 갈대들도 일어나 바람의 숨결에 맞춰 함박눈을 불러 모으겠지. 그러면 철새들은 구름의 모서리를 찢으며 묵정밭에 내려앉아 추위를 쪼아대거나 덧난 생채기를 검불로 덮어줄 게야. 냉기일지라도 달무리처럼 힘껏 돌려 쥐불로 윗목까지 데워놓는다면 올 혹한은 봄물처럼 흘러가겠지. 그러니까 어디 있던 친구야, 바쁘다만 하지 말고 순천만에 가보게나. 함박눈이 불꽃처럼 흩날리는 날에는.
설렘이 녹아 흐르는 첫눈 같은 시를 써야겠다. 밤새 뒤척거리다 날을 꼬박 새더라도 고비 사막에 첫눈만 내린다면 온 누리가 환하게 따뜻해지는 그런 시 말이다.
생의 춘곤증도 같이 깔끔하게 걷어내는, 그 땐 폭설이 서 너 달 쌓여 무등(無等)에 내가 고립되어도 좋으리. 그래도 줄 게 있다면 철새들의 간식거리나 골목길 연탄재로나 서 있고 싶은데, 얼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참, 또 한 번의 비상을 위해 발가락을 깊이 꺾는 흑두루미의 마법을 터득해야 하리.
아궁이에 지핀 온기를 두 심사위원님들과 함께 나눠가져야겠다.
기회를 놓친 분들께도 위로의 함박눈 한 잔 건네고 싶다. 가족, 교직원, 친구, 화요회원들에게 감사의 삼보일배를 올린다.
▶약력 : 1957년 순천 출생, 필명 정도전 ▲광주교육대, 한국교원대 대학원 ▲여천초교 교장
[신춘문예 시 심사평] “철학적인 시세계 한폭의 그림 같아 / 함민복. 곽재구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를 읽었다. 문단에서 시 분야가 침체되어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출품작의 수에 비해 시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실험정신이 살아 있는 시도, 삶을 치열하게 노래한 시도 드물었다. 이슈가 될 만한 시의 흐름도 눈에 띄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시의 완성도도 낮았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절창을 만나고 싶은 기대를 안타깝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의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과 권시은의 ‘프리다 칼로가 익어가는 팔월’을 놓고 고심한 끝에 정도전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권시은의 작품들이 완성도는 더 높았으나, 정도전의 시가 보여준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와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와 같은 수일한 이미지에 표를 던졌다. 정도전의 시는 다소 설명적 이여서, 행간에 이미지의 증폭이 없어 시의 맛이 반감되고 있다는 단점도 지적되었음을 밝힌다.
위의 두 명의 시 외에 선자들의 관심을 끓었던 작품에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황재운의 ‘운주사’와 치밀한 묘사가 돋보인 천선필의 ‘자화상’이 있었다.
당선자도 낙선자도 모두 분기하여 우리 문학사를 빛낼 시인이 되길 바란다.
* 곽재구 : 광주 출생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신동엽 창작기금과 동서 문학상 등을 수상 ▲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등
* 함민복 : ▲충북 중원군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제6회 윤동주문학대상 수상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등을 냈고, 시에세이 ‘절하고 싶다’ 등
▶▶ 2012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얼룩진 벽지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당선 소감] 상상 속에서 꿈 꾸던 일이 뜻밖에 현실로 / 성명남
낯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응모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하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꿈만 같아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 벅차오릅니다. 심장이 아직도 쾅쾅 뛰고 있습니다. 상상 속에서 꿈꾸던 일들이 현실로 이어져 기쁩니다.
시를 쓰는 일은 즐거운 고통이었습니다. 가족과 일과 시쓰기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맞추며 제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새로 사온 시집에서 좋은 시를 만나면 자꾸 꿈이 커갔습니다.
꿈은 꾸기만 해도 행복한데 이루면 더 행복하다는 걸 알려주신 '국제신문'과 부족한 제 시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문정희 시인님, 최영철 시인님, 박남준 시인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의 은유를 알게 해주신 존경하는 정일근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공부한 이팝시 동인 문우들, 삽량문학회 식구들, 오랫동안 묵묵히 지켜봐 준 사랑하는 남편과 든든한 아들 휘성이와 첫 번째 독자로 지목되어 기꺼이 작품평을 해준 딸 슬아. 그리고 공부방 꼬마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새해도 모든 분들이 시를 읽으며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약력 : 1962년 충남 연기 출생. 현재 양산시 삽량문학회 편집장. 이팝시 동인.
[심사소감] 절제의 미학과 따뜻한 응시로 잘 표현 / 문정희 최영철 박남준
늦게 담은 동치미는 익지 않았고 이곳저곳 지인들의 집에서 보내온 김장김치도 아직 맛이 들지 않았다. 먼저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밖에 내놓은 김치 역시 설익었다. 먹기에 마땅치 않다.
금방 담은 김치는 배추의 고소하고 싱싱한 맛과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그 싱그러움으로 먹을 수 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맛을 잃게 된다. 양념이 고루 배고 익어서 맛이 든 김치가 밥상에 오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몇 포기 남아있지 않은 묵은 김치를 꺼낸다. 역시 이 맛이야.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한껏 기교를 부리며 은유와 비유로 멋을 부린 시들이 막 버무린 김치와 같다면 오래 묵어 양념들이 고루 배고 맛이 든 김치, 그러나 배추의 처음 싱싱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아삭아삭거리는 김장김치는 온몸으로 밀어올린 울림이 있는 시,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종심으로 올라온 두 작품은 '얼룩진 벽지'와 '보도블록'이었다. 그러나 '보도블록'은 신선한 시선이 돋보였음에도 이를 받쳐줄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얼룩진 벽지'는 김치와 같았다. 푸른 배추의 싱싱함을 가진 잘 익은 김장김치와 같은 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절제의 미학과 '동거'와 같은 다른 시에서 보여준 깊고 따뜻한 응시를 가진 이 시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즐겁게 당선작에 올려놓았다.
처마 끝에 걸린 곶감들이 잘 마르고 있다. 곶감은 제 몸의 수분을 햇빛과 바람 앞에 알몸으로 온통 내놓고 말라갔을 때 그 속에 비로소 떫은맛이 변하여 달고 붉은 속살을 갖게 된다.
이제 파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인이 헤쳐 나갈 험난한 여정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시인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인정신으로 나는 그 표현을 읽었다. 적어도 시를 쓴다면 이 정도의 자세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어보는 정도 말이다.
<심사위원 문정희 최영철 박남준(이상 시인)>
2012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떠도는 섬
- 어느 독거노인의 죽음
유헌
엎어진 숟가락처럼 섬 하나 놓여 있다
막걸리 쉰내 나는 툇마루만 남아서
밤마다 갯바람소리 환청에 떨고 있다
느릿느릿 애 터지게 바람이 불어온다
둘이 같이 살아보자 옆구리 토닥이던
파도가 밀려왔던 자리, 절벽이 생겨났다
무연히 쓸어보는 방바닥엔 흰머리뿐
파도에 멍든 자리 동백꽃이 새살 돋고
창문을 더듬는 햇살, 하얗게 질려간다
칠 벗겨진 양철대문에 파도소리 출렁인다
그물코에 빠져나간 한숨들을 깁는가
오늘도 뱃고동소리 속절없이 지나간다
[심사평] 하나의 제재를 집요하게 이미지로 조형 / 정해송(왼쪽), 전일희
우리의 모국어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어갈 역량 있는 신인을 뽑는 신춘문예는 선자들의 가슴마저도 기대감으로 부풀게 한다. 금년도 국제신문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수준은 상당히 향상되어 있어서 매우 고무적이었다.
대다수의 작품들이 시조의 정형미학을 잘 체득하고 있어서 안도감을 가지고 심사에 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보내온 작품들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읽어나갔다. 엄격하게 걸러내는 작업 끝에 최종적으로 세 분의 작품 '길 너머' '귀성 길' '떠도는 섬'이 남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문예지에 그대로 실어놓아도 조금도 손색 없을 만큼 두드러진 작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길 너머'는 구도자적인 내면 탐색에 천착하고 있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으나 '생의 봇짐' '득음'과 같은 관념적인 투어가 아직 가셔지질 못했다. 이렇게 하여 '귀성 길'과 '떠도는 섬'이 남아 마지막으로 경합을 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충분히 당선권에 속하는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두 심사위원은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장시간 논의를 했다. '귀성 길'은 언어를 섬세하게 다듬는 기법이 탁월했으나 소재의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한 작품 속에 담고자하는 주제가 넘쳐 응축성이 미진한 감을 주었다.
'떠도는 섬'은 독거노인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제재를 집요하게 이미지로 조형하여 현실 문제를 부각시킨 점이 우리의 마음을 더 사로잡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리며 언어의 조탁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한다.<심사위원 정해송 전일희(이상 시조시인) >
[당선소감] 마음 깊은 곳에 긴 두레박을 내려 / 유헌
어제는 참 포근했습니다. 당선통보를 받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창밖에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목포항 앞바다는 출렁대는 물결로 허리가 아픕니다.
차가운 거리로 나섰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 갑니다. 그런데 그 강풍조차도 차갑지 않고, 가슴을 파고들며 흩날리는 눈송이도 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슴은 벅찬 설렘으로 뜨겁습니다.
신춘문예 마감일까지 고치고 또 고친 원고뭉치를 보내고 우체국을 나서던 순간도 그랬습니다. 상기된 얼굴을 스쳐가는 겨울바람은 산마루를 돌아나오는 건들마처럼 서늘했습니다. 먹물처럼 어두워진 깊은 하늘에서 빛나던 차가운 달빛은 차라리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었습니다.
그간 심하게 앓았던 시조를 향한 열병 때문이었을까요? 지난 며칠 동안은 추워도 춥지 않았습니다. 그 열정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뜨거운 가슴을 타고 내리는 가락들을 4음보로 길어 올리는데 결코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신춘이라는 분에 넘친 텃밭을 내어 주신 '국제신문'과 심사위원님들께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긴 두레박을 내려 낮은 자세로 더 비우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아내에게는 참 미안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깊은 밤에도 벌떡 벌떡 일어나 생각의 파편들을 글로 옮기곤 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아내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고 하니까, 그간 제가 참 무던히도 요란을 떨었나 봅니다.
늘 치열한 문학정신을 일깨워 주신 한국 문단의 거목 소설가 천승세 선생님, 시조의 깊이를 알게 해준 박성민 시조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말을 가장 우리말답게 담아낼 수 있는 정형의 그릇, 시조의 큰 바다에 돛을 올려 작은 배를 띄웁니다. 흔들림 없이 노를 젓겠습니다.
▶약력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광주대 언론홍보대학원 언론학 석사. 제26회 한국방송대상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 현재 목포MBC 국장.
▶▶ 2012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은단풍
김남이
사원식당 앞 은단풍나무,
어린아이 징검다리 건너듯 갸웃갸웃
자그마한 풍선이 포르르 날며 구르는 듯
조심스레 입 밖으로 걸어 나오는
그 소리 은은하고 맑아서
나중에 ‘은단풍’이라는 딸을 낳고 싶었던
그 나무 밑에서 점심시간마다 우리는 비스킷을 먹었지
기계 소리도 작업반장도 없는 그 나무 밑에서 깔깔거리며
스무 살 부근을 와작와작 부셔 먹었지만
몇몇은 그 나무에 기대어 늙은이처럼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사원식당 앞 은단풍
깨끗한 아침 햇살과
강해지려고 자꾸 다짐하는 한낮의 태양과
한쪽 뺨이 그늘진 노을도 골고루 먹고
큰 키로 수천의 반짝이는 잎들 흔들 때
내가 믿는 신처럼 올려다보게 하던
은단풍 은단풍 은단풍
그렇게 주문을 외면
내 안에서도 나무 한 그루 뚫고 나와 삐죽 솟던
그 나무에 무엇인가 자꾸 매달고 싶던…….
응모 작품을 부치고 우체국을 나올 때 몸도 마음도 텅 빈 듯했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달콤한 빵을 샀다. 까칠한 혀로 빵을 우물거리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내게 타일렀다. 그런데, 내 이름을 확인한 목소리가 당선 소식을 전했다. 나를 달래야 할 때 시를 찾았다. 때로 시가 평온한 나를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내가 필요할 때 찾아가 위로 받고 싶을 뿐 시에게 잡히고 싶지 않아 찾아오는 시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랬음에도 시와 나는 서로를 탐닉했다. 이젠 정말 시를 따로 두고 내 삶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엄마, 아버지, 저세상에서도 응원하고 기뻐하시겠지요. 묵묵히 바라봐 준 남편과 비싼 운동화 신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미안했는데, 내 애쓴 결과를 보여 줄 수 있어 기쁘고 고맙다. 시의 길로 안내해 준 해양 선배, 길의 초입에서 시 맛을 알게 해 준 서정윤·박윤배 선생님, 늘 채찍과 당근인 친구 기임이도 생각난다.
푸른방송 문화센터와 정화섭 시인을 비롯한 ‘시 만나러 가는 사람들’ 문우들과 언어를 타고 즐기며 한굽이 넘어가고 깊어지는 문학의 묘미를 일깨워 주신 문무학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어쩌면 쓰레기를 위한 시간인지도 모른다고 소침해지기도 하던 최근의 날들에 당당할 수 있게 큰 힘 주신 심사위원님께 열심히 쓰겠다고 약속드린다.
▶김남이 :1969년 경북 상주 출생/대구 달서구 도원동/ knla2006@naver.com
[심사평] 해맑은 느낌 자신의 체험과 잘 배합 / 이문재, 안도현
22명의 작품이 본심을 통과했다. 우리는 응모자의 이름을 가린 원고를 읽었다. 지난해에 비해 좋은 시들이 훨씬 많아 시를 읽는 일이 즐거웠다.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는 뜻이리라. 향상된 작품의 수준도 우리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탄탄한 시가 여럿이었다.
당선작 〈은단풍〉은 ‘은단풍’이라는 음성이 내장하고 있는 은은하고 맑은 느낌을 자신의 체험과 잘 배합하여 성공한 작품이다. 시인의 해맑은 세계관이 활달한 어조에 실려 더욱 매력적이다. 정작 알맹이로서의 삶은 들어내고 언어만 난무하는 시가 유행하는 때에 좋은 귀감이 되리라고 본다. 축하를 드린다.
이밖에 우리의 주목을 끈 시로〈하모니카 소리〉가 있었다. 당선작과 마찬가지로 발랄한 문체가 시에 생기를 더했다. 감각을 절제된 언어로 껴안을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를 ‘만드는’ 기술이 진정성을 압도하는 느낌을 주면 안 된다.
또 하나 〈징검다리〉는 삶에 대한 깨달음이 도드라져 보이는 시다. 하지만 시적 깨달음은 남이 건너가지 못한 강을 건너가려는 고집에서 나온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나무의 문〉〈끈〉〈붉은발농게〉〈마늘〉도 유심히 읽었음을 적어 둔다.
시라는 양식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 그것도 재능이라는 것을 당선자와 모든 응모자에게 말해 주고 싶다.◑
2012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호박(琥珀) 속의 모기
권영하<경북 문경시 점촌중학교>
호박 속에 날아든 지질시대 모기 한놈
목숨은 굳어졌고 비명도 갇혀 있다
박제된 시간에 갇혀 강울음도 딱딱하다
멈추는 게 비행보다 힘드는 모양이다
접지 못한 양날개, 부릅뜬 절규의 눈
온몸에 깁스한 관절 마디마디 욱신댄다
은밀히 펌프질로 흡혈할 때 달콤했다
빠알간 식욕과 힘, 그대로 몸에 박고
담황색 심연 속에서 몇 만년을 날았을까
전시관에 불을 끄면 허기가 생각나서
호박 속의 모기는 이륙할지 모르겠다
살문향(殺蚊香) 피어오르는 도심을 공격하러
[심사평] “상상력·소재의 확장 돋보여”/민병도, 백이운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오히려 지나치리만큼 감각적인 언어유희가 메시지를 놓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고개 숙인 농심을 일으키고 농업인의 입지를 개선하고자 하는 <농민신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농업인의 애환을 대변할 만한 작품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삼효문을 읽다> <하얀 종이 집> <호박 속의 모기> 세편이었다. <삼효문을 읽다>는 감각적인 표현에서 돋보였으나 전개의 상투성이 거슬렸고 <하얀 종이 집>은 시적 은유의 깊이가 두드러지면서도 주제 전달의 한계가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호박 속의 모기>를 당선작으로 합의하였다. 이 작품은 행간마다 상상력의 힘이 느껴지고 소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함께 보낸 작품에서의 다양한 시상과 시어의 건강성 또한 신뢰를 보탰다.
시를 쓰는 일은 관찰과 사색, 사유를 통한 세상 읽기에서 얻은 정신적 에너지를 문자의 힘을 빌려 독자에게 전달하는 수단의 하나다.
근년에 투고되는 신춘문예 작품들을 보면 표현에 치우쳐 그 정신의 깊이가 자꾸만 얕아짐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당선자는 이 점을 유념하여 시조의 숲을 건강하게 하는 나무로 자라나기 바란다. 심사위원=민병도<시조시인>, 백이운<시조시인>
▶▶ 2012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시조 당선작
나의 고아원 외 1편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식탁에서
안미옥
내게는 얼마간의 압정이 필요하다. 벽지는 항상 흘러내리고 싶어 하고
점성이 다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
냉장고를 믿어서는 안 된다. 문을 닫는 손으로.열리는 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옆집은 멀어질 수 없어서 옆집이 되었다. 벽을 밀고 들어가는 소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다리가 네 개여서 쉽게 흔들리는 식탁 위에서. 팔꿈치를 들고 밥을 먹는 얼굴들. 툭. 툭. 바둑을 놓듯
[당선소감] 시 앞에서 용기 있는 사람 되리라 / 안미옥
나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완강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사실은 나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도망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힘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내 언어의 시작이 되어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시를 쓰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의 오해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부모님을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다.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남편 정현 덕분이다. 내가 의지하는 단 한 명의 사람. 말로 다 할 수 없게 고맙고 미안하다. 힘껏 미워하고, 힘껏 사랑하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의 벗, 사랑과 버들에게, 나를 믿어주는 은정에게, 항상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정숙 언니에게, 곁을 지켜주는 슬기에게, 나보다 나의 잘됨을 더욱 기뻐하는 진희 언니에게, 부케처럼, 바통을 넘긴다. 나은아. 내 옆에 있어 준 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원 선생님.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마음이 나를 더욱 간절하게 했다. 깊고 단단하게, 오래도록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명지대 교수님들과 부족한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아 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시 앞에서 좀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무서운 손으로.
▶약력 : 1984년 경기 안성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심사평] 남다른 상상력 때묻지 않은 목소리 / 장석주, 장석남
두 심사자가 예심에서 넘어온 16명의 시 80여 편을 각각 읽고 난 뒤 정지우의 ‘납작한 모자’, 김복희의 ‘매일 벌어지는 놀랄 만한 일’, 윤종욱의 ‘서툰 사람’, 김양태의 ‘흐르는 돌’, 종정순의 ‘알람들’, 조선수의 ‘분홍손’, 안미옥의 ‘나의 고아원’ 등을 당선작으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를 “어떤 것의 존재를 지우면서도 그것을 읽기 쉽게 유지하는 몸짓의 이름”이라고 했다. 시 쓰는 것도 낡은 존재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존재를 세우려는 몸짓일 테다.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섞이고 스민다. 그렇게 상호 삼투하는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시적 현존을 세우는 데 상상력이라는 화학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까닭이다. 두 심사자는 안미옥을 당선자로 세우는 데 흔쾌하게 동의했다. 다만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 하는 데는 의견 조율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두 작품 ‘나의 고아원’과 ‘식탁에서’를 골랐다.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이 비범하고, 현존의 혼돈을 뚫고 그 눈길이 가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이 우글거렸다. 남다른 상상력과 때 묻지 않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춘문예라는 통과의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신뢰를 크게 더하게 한다. 험난한 시업(詩業)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린다. -장석주 (시인), 장석남 (시인)
2012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눈뜨는 화석
- 천마총에서
황외순
소나무에 등 기댄 채 몸 풀 날 기다리는
천마총 저린 발목에 수지침을 꽂는 봄비
맥 짚어 가던 바람이 불현듯 멈춰선다
벗어 둔 금빛 욕망 순하게 엎드리고
허기 쪼던 저 청설모 숨을 죽인 한 순간에
낡삭은 풍경을 열고 돋아나는 연둣빛 혀
고여 있는 시간이라도 물꼬 틀면 다시 흐르나
몇 겁 생을 건너와 말을 거는 화석 앞에
누긋한 갈기 일으켜 귀잠 걷는 말간 햇살
[약력] 1968년 경북 영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청소년교육과 졸업/경주문예대학 수료 / 문열공 매운당 이조년 추모 백일장 장원 △청풍명월 전국 시조백일장 장원/ 전국 가사·시조 창작공모전 우수
[심사평] 상상력 깊은 역사 읽기 돋보여 / 한분순, 민병도
해마다 신춘문예에 문단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신인들에 대한 기대치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내일을 이끌어나갈 뜨거운 열정과 새로운 생각과 올곧은 문학정신을 보고자 함에서다. 아직은 그들이 보여주는 사유의 깊이가 얕고 표현이 서툴더라도 남다른 발상과 용기와 도전이 장차 이 땅의 문학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예년에 비해 응모자 수나 작품의 수준이 풍요로운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의 숨은 보석을 가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새로운 재목을 찾는 기준으로 기성문단의 흉내 내기와 시적 동기가 취약하면서 언어 기교에 치중한 작품을 배제하고 시조단의 내일을 이끌어나갈 건강한 시정신에 주목하였다. 그런 기준에 의해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이 심순정의 ‘삼각김밥’, 송인영의 ‘물구나무, 멀구슬나무’, 조예서의 ‘어머니의 가을’, 황외순의 ‘눈뜨는 화석’ 등 네 편이었다. 먼저 ‘삼각김밥’은 비유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주제의식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물구나무, 멀구슬나무’는 가락의 유려함을 받쳐 주는 메시지 부재로 배제되었다. ‘어머니의 가을’은 어머니의 삶과 가을을 일체화시킨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소재의 진부성을 떨쳐내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눈뜨는 화석’은 감각적인 언어 구사와 상상력 깊은 역사 읽기를 보여줘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부장품과 화석을 일체화시키는 과감한 비약마저도 현장시의 한계를 보완하는 역량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색깔 있는 자기 목소리를 기대한다. <한분순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민병도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
▶▶ 2012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장
오기석
히말라야는 죽은 자의 무덤이다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그 무덤이 우뚝우뚝 선다
나는 오직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한다
치켜뜨고 고원을 배회하는 그 눈과 내 눈이 부딪칠 때
히말라야는 죽은 자가 산자를 배웅하는
묵직한 항구다
길은 벌써 하늘로 뚫어져 덩그렇게 허공에 매달렸는데
지금 막 망자의 검은 눈을 독수리가 정 조준한다
이곳의 주인은
고원을 만들었다 무너뜨리는 바람이다
그 바람을 타고 독수리는 날아들고 또 그렇게 떠난다
남은 것은 바람의 길을 따라 나는 망자의 영혼 뿐이다
여기서 독수리는 발톱 따윈 쓸모없다
그저 살점을 움켜쥐고 뜯을 수 있는 부리만 튼튼하면 된다
상주도 조문객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목숨은 이미 독수리가 움켜쥐고 있다
그 다음 순서는
모두 바람의 지시에 따라 시간이 알아 할 몫이다
장례의식이 끝나고 죽어서 다시 돌아 올 그 산을 내려간다
이제 남은 것은 망자의 시신과 천장사* 뿐이다
천장사가 도끼로 시신을 난도질한다
그러곤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에게 살점을 던진다
덥숙덥숙 받아먹는 독수리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
*히말라야 고원지대 장례에서 시체의 사지를 분해하여 새에게 던져주는 사람.
▶약력 : 1946년 보은 출생./ 전 음성우체국장./ 저서 ‘운율이 흐르는 수상록’
▶▶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시조. 동시 당선작
물푸레 동면기
이여원(李如苑)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 안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 쪽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당선소감] '힘든 세상, 환한 불빛 아래 서기 두렵지만…' / 이여원
세상은 이렇듯 힘든데, 환한 불빛 아래 당선소감문 쓰기가 두렵고 송구합니다. 시는 말씀의 집을 규모 있게 짓는 것이라는데, 집을 지을 재료는 풍성한지 있기는 한지 내심 불안하고 난감할 뿐입니다. 추운 겨울날 얼음의 뜰을 얼려두고 서 있던 그 물푸레나무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곧은 나무라 할지라도 겨울엔 햇살 쪽으로 그 몸이 조금 기울어진다고 합니다. 좋은 공부 진정성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마음가짐을 다짐해봅니다.
가장 추운 바람 속에서도 시적 영감을 나에게 준 물푸레나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때 바위 밑에서 들리던 졸졸 물소리를 씨앗으로 삼겠습니다.
희망이란 단어를 컴퓨터 위에 붙여두고 글을 쓰던 시간들이 행복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끝이 없음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깁니다. 덜 여문 시를 세상으로 밀어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그리고 맹문재 교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글쓰기의 고통을 함께하는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힘들 때 꽃을 보라시던 어머니가 많이 생각납니다. 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랑하는 남편 태규 씨와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 지혜로운 딸 수란과 곁에 있기만 해도 든든한 아들 준영이와 함께 기쁨을 나누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 이여원(필명) 1957년 진주 출생
[심사평] 치밀한 묘사력·견인주의적 시각 돋보여 / 도광의.박형준
대개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하여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전적으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은 꽃의 개화(開花)도 후에 관찰해보면 어떤 법칙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읽히지 않는 시라고 하여 다 난해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시가 난해하기는 해도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에서 상관관계를 보는 참신한 시각과 그에 따른 보편성의 획득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신춘문예는 참신성과 패기가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해나가는 신인들의 미래 문법이 각축을 벌이는 축제의 장이다.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서 논의된 것은 이재흔의 '크라이오닉스', 이해존의 '유목의 방', 이여원의 '물푸레 동면기'와 '난청' 등 4편이었다. '크라이오닉스'는 발상이 참신하지만 언어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실패한 은유들이 더러 눈에 띈다. '유목의 방'은 말미의 비약이 아쉽다. 이 시는 고시원이라는 막막한 삶의 공간을 대초원이라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러나 말미의 ‘고시원 휴게실’과 앞에서 펼쳐낸 ‘몽골 사내’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 좀 더 치밀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시는 성립할 수 없다지만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능력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결국 이여원의 두 작품에서 하나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이견 없이 합의했다. '물푸레 동면기'는 얼음물에 떠 있는 겨울의 물푸레나무를 치밀하게 묘사해가면서 서정시의 깊은 완성도를 보였다. 또한 '난청'은 사물을 포착하는 감성이 신선하다. 그만큼 두 작품 모두 각각 완성도와 참신성이라는 양측면에서 잘 빚어냈다. 그의 두 작품 중에서 '물푸레 동면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것은 아포리즘의 도움 없이 세밀하고 실제적인 묘사만으로 새롭게 열어 보이는 서정의 창출이 읽을수록 착착 감기는 감칠맛과 더불어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음물 속에서 동면하는 물푸레에서 견인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라는 성숙한 견자의 시각을 이끌어내는 점도 인상적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서정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한다.(도광의`박형준) -예심: 송종규`장하빈 본심: 도광의`박형준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비브라토
김석이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의 발밑으로
수없이 저어대는 물갈퀴의 움직임
점선이 모여서 긋는 밑줄이 떠받치는 힘
차선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들
꿈틀거리는 지면을 가속으로 쫙쫙 펴는
평평한 길 아래 있는 주름들의 안간힘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손가락들
소리의 맹점 찾아 이리저리 누를 때
닫혔던 물꼬를 틀며 길을 여는 강물소리
부딪쳐야 파문으로 밀려오는 그림자
짓눌려야 짓물러야 풀어지는 소리 가닥
발끝에 온힘을 모아 중심을 잡고 있다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아버지의 지게
권우상
아버지가 날마다 지시던
손때 가득 묻은 지게가
마당 한쪽 구석에
그림처럼 놓여 있습니다
자나 깨나 논두렁 밭두렁
분주히 오가며
삶을 퍼 담아 나르시던
아버지의 지게
지금은 먼 나라로 가신
아버지의 모습과 고단함이
지게에 담겨 있습니다
휘청거리는 두 다리를
작대기 하나에 기대시고
안개 자욱한 새벽길 나서시며
흙과 함께 살아오신 아버지
억척스럽게 산더미 같은
소먹이는 풀도 베어오시고
마늘과 풋고추, 생강도 담아
우리들을 길러내시던
아버지의 땀방울 맺힌 지게
고향의 따스한 정을 받으며
지난날들의 뒤에 서서
아버지의 지게는
오늘도 나를 반깁니다.
▶▶ 2012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불고기, 물꼬기
유빈
낱말들을 고르게 쓰다듬다 놓쳐버리는 혀
빈 밥상 위 문법책은 달아나는 발음을 따라잡지 못해요
귀퉁이 까매진 책갈피 사이로
나쨩 해변의 파도가 밀려와요
불고기는 불고기, 물고기는 왜 물꼬기일까요
언제나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생님 그러나
센터 문만 나서면 불고기도 불고기,
물고기도 물고기, 책에 빨갛게 그려넣은
물결무늬 밑줄들, 어려운 차이들이
행간 사이를 꼬불꼬불 헤엄치고 있어요
발화(發話)되지 않는 더듬이
언제쯤 머리로 말하지 않아도 될까요
계약서를 다 채우려면 얼마큼 부드러워야 하나요
듣기연습을 위해 놓치지 않는 9시 뉴스데스크
화면에 떴다 사라지는 얼굴
전송되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나가는 비명소리
면사포 속에서 하노이 강이 부풀어올라요
방향도 통로도 모른 채 꿈에 젖은 갈매기들
셀 수 없는 물이랑을 넘을 때
순서를 따라 늘어서는 인터뷰 행렬
해본 적 없는 질문들, 나는, 너는…
기름에 잠겨 지글거리는 계란 프라이 한가운데
섬처럼 똬리 튼 노른자 한 알
하얀 거울에 노란 얼굴이 밤낮없이 비춰지고
강변의 모래알들 잊으면 될까요
맘 편히 흘러들 수 있는 틈새는 어디 있을까요
[당선소감] 시는 펄떡거리며 살아있는 것 / 유 빈
외출에서 돌아와 얼굴에 폼 클렌징을 묻힌 채 통보를 받았다. 휴대폰을 미처 못 받았는데 곧바로 집 전화벨이 울려서 아, 꼭 받아야 할 전화구나 하는 직감으로 욕실에서 뛰어나왔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소식의 진상을 파악할 무렵, 손에서 뚝뚝 흐르던 물기가 다 말랐다. 이렇듯 대개의 소식은 일상의 아주 미세한 틈을 찢고 찾아온다. 시도 내게 익숙하고 평면적인 일상의 틈을 찢으며 불현듯 다가오는 ‘한 소식’일 터.
문턱을 넘다 발이 삐끗하며 새끼발가락이 뭔가에 찔린 듯 통증이 느껴질 때, 또는 몇 층 아래서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퉁퉁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시각화되며 아찔해질 때, 시는 온다. 시를 쓰면서도 그런 찰나와의 싸움에 매료당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시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펄떡거리며 살아 있는 것임을.
조급해 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의식이 다할 때까지 ‘그저’ 찰나와 싸우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충분히 호전적이다. 해도, 시라는 소식을 알아보는 눈이 많이 어둡다. 형상적 사유의 겸손과 깊이도 덜 갖추었다. 그래서 눈이 더 밝아지라고, 더 깊어지라고 초대해 주신 줄 안다. 과분하며, 감사하다.
그동안 시 쓰는 길에서 함께해 주신 스승님들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소리 내어 이름 부르지 않는다. 마음에 도장 찍듯 다시 한 분 한 분 얼굴 생각해 본다. 초면에 성큼 등 떠밀어 주시며 한 획 긋게 하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그리고 내가 시 쓰고 있을 때, 가만히 서재 문 닫아 주고 가는, 그래서 많은 시간 나의 바깥에 서 있어야 하는 남편 K씨에게도 정말 감사와 미안함을 동시에 전한다. 이 모든 분들께 최상의 보답은 좋은 시 쓰는 일일 것이다.
▶약력 : 부산 출생 /덕성여대 독문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 정체성 담는 노력 담담히 그려내 / 신덕룡(문학평론가·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2012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예비시인들이 몰려왔다. 효율과 결과만을 요구하는 시대에 시인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다. 보다 행복한 삶을 꿈꾸는 이들의 에너지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현재의 우리 삶이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시로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을까? 너나할 것 없이 물질적 욕망에 휩싸여 정신없이 살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시편들에서 시적화자가 과장되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징징거리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형상이 아닌 격정의 토로에 매달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적 대상과 화자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구체적 형상을 통해 의미를 구축해가는 시편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은 양은정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 안준혁의 '검은 강의 기록', 유빈의 '불고기,물꼬기' 였다. 우선,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삶의 내용과 요리를 결합시켜 시상을 전개했다. 시의 바탕에 깔린 삶의 쓸쓸함이 잘 묻어났지만, 이런 상상력은 신선하지 않다는 결점이 있었다. '검은 강의 기록'은 문명비판적인 시각으로 우리 삶의 음화를 잘 표현했지만 주제가 시적 형상을 압도하고 있었다. '불고기,물꼬기'는 이주여성의 삶을 ‘언어’를 통해 형상화했다. 언어로 동화되지 않는 현실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 틈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세 사람의 장단점을 비교한 결과, 시상을 전개시키는 솜씨나 발전 가능성의 측면에서 유빈씨의 작품에 믿음이 갔고,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성장하길 빈다. 아울러 양은정, 안준혁 두 분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2012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풍경 재봉사
김민철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당선소감] 몸속 깊숙한 곳 비어있는 詩의 공간 채워갈 것 / 김민철
유난히 올해는 제 글이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원고를 투고했습니다. 내년에 다시 시작하자, 라는 마음으로 연말을 보내던 때였습니다. 지방에 갔다가 북부간선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요일, 묵직한 소식을 받았습니다. 많은 인연들이 제 머릿속을 앞서 나가다가 멀어졌습니다. 붙잡지 못한 인연과 아직까지 손 놓지 못한 인연 사이에서 제가 달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지켜주신 분들이 있어 제가 한 줄기 빛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성실함의 아버지, 기원의 어머니, 의지의 형, 우리 가족에게 제가 받은 이 빛을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제가 시를 계속 쓸 수 있도록 언제나 힘을 실어주신 이사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열어주신 김미도 선생님, 항상 따뜻하게 저의 일을 챙겨주신 신연우 선생님, 시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신 최서림 선생님, 삶의 큰 틀을 보게 해주신 박정규 선생님, 제 고민을 많이 들어주셨던 박영준 선생님, 우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께 무한한 빚을 졌습니다. 이번 당선 소식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친구, 이병일에게 감사합니다. 그와 함께 꿈꿨던 일이 훗날 일어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첫 만남 이후, 핸드폰에 행운의 여신으로 저장되어 있는 그녀. 곁에 머물러 버거울 정도의 행운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황동규 선생님,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몸속에 깊숙하게 비어 있는 시의 공간과 시간을 채워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김민철이 되겠습니다.
▶약력 : 1981년 서울 출생/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중
[심사평] 유행·시류 벗어난 우아한 아름다움 돋보여 / 황동규. 정호승
예심을 거친 20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이해존의 '안락한 변화', 유정용의 'IN 1914 네루다', 안대근의 '샌드위치 인생', 김민철의 '풍경 재봉사' 등 4편이었다. '안락한 변화'와 'IN 1914 네루다'는 사실성이 두드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 전체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되었다. 정말 좋은 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나친 모호성이 해석의 다양한 물꼬를 막았다. '샌드위치 인생'은 '벽돌의 무게를 짊어지는 사람의 등은 벽돌보다 벌겋지'라는 첫 행에서부터 개성적 면모가 두드러졌으나 결국 희망이 상실된 어두운 심상으로 시가 종결되고 말았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제목을 정하는 능력이 약했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므로 시 전체를 관류할 수 있는 제목이 요구되나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같은 시를 제목만 바꾸어 중복 투고해 성실성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풍경 재봉사'는 신선하고 아름답다. 유행과 시류에서 벗어난 점이 무엇보다 장점이다. 호수에 떨어지는 장맛비를 풍경 재봉사로 인식하는 형상화 과정 하나하나가 자상하고 섬세하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점은 오늘의 한국시가 근래 들어 잃고 있는 부분이다. 바로 이 아름다움이 앞으로 이 시인의 큰 덕목이 될 것이다. <심사위원_ 황동규 · 정호승>
▶▶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시조 당선작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허영들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당선소감] "살아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 허영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내 글쓰기는 내 속의 우울을 하나씩 끄집어내 세상과 눈 맞추게 하는 행위다. 형체 없이 스며 있던 상처와 욕망이 육체를 얻어 활동하게 하는 작업, 나무속에 들어가 가지 따라 솟구치고 햇볕에 몸 비비며 잎으로 팔랑거리게 하는 일이다. 바람의 팔과 햇살의 눈으로 고루 세상과 마주하는 일. 오래 바라보면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세계는 평등하고 풀벌레 한 마리, 돌멩이 한 개의 삶도 눈물겹도록 진지하다
보송보송 마른 마음으로는 시가 오지 않는다. 무언가 아련하고 아릿한, 나는 그것이 오랜 세월 내가 떨쳐내고 싶었던 우울이라는 것을 안다.
눈부신 날개를 팔랑이며 나비가 돌아온 아침이었다. 당선통보의 벅찬 감동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던 내 시력(詩力)에 대한 절망감에도 환하게 해를 비췄다. 살아 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살 것이다. 언제나 최초의 시간을 쓰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신한 상상력으로 시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동진 회원님들, 유진 시인님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채우지 못한 한 줄을 붙들고 밤을 새울 때 따뜻한 차 한 잔 슬그머니 놓고 나가던, 내 시의 첫 독자이며 평자인 남편 이일상 씨, 시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해 준 동걸, 언젠가는 시인이 될 것 같은 다영이, 행운을 물고 우리 집으로 날아온 나현.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허영둘: 1956년 경남 고성 출생.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 "새로운 어법 통한 도전의식 돋봬"/ 김종해·천양희·김경복
본심에 오른 것은 총 6편이다. 최은묵의 '알', 권동지의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 권수진의 '과메기', 이주상의 '편두통',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허영둘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등이다. 이들은 수준에 올라 당선작으로 하여도 무방한 느낌이 들었다.
'알'은 발상이 참신해 눈이 갔으나 아직 관념이 형상화보다 앞선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감성의 풍부성이 주목되나 상상력의 허점과 문장의 완결성 부분에 문제가 제기됐다. '과메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바다에 비유해 전개한 참신성이 돋보이나 주제가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흠으로 지적됐다. '편두통'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복잡한 심리를 번득이는 표현으로 포착한 점은 놀라우나 관념이 너무 앞서고 설명적이라는 점이 문제로 언급됐다.
그리하여 '시미즈 터널'과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이 종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미즈 터널'은 쓸쓸한 삶의 내면을 더없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표현한 점이 장점으로 두드러졌지만, 이 점이 오히려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어 신춘문예로서 가지는 발전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비해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은 새로운 어법을 통한 도전의식이 엿보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깊이, 표현의 참신성도 갖춰 당선작으로 확정하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당선자가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중추가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 김종해·천양희·김경복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탯줄
- 거가대교에서
황외순
찰싸닥,
손때 매운 그 소리를 따라가면
갓 태어난 핏덩이 해 배밀이가 한창이다
어둠을 죄 밀어내며
수평선 기어오른다
비릿한 젖 냄새에 목젖이 내리는 아침
만나고픈 열망하나 닫힌 문을 열었는가
섬과 섬 힘주어 잇는
탯줄이 꿈틀댄다
당겨진 거리보다 한 발 앞선 조바심을
여짓대던 해조음이 다 전하지 못했어도
짠물 밴 시간을 걸러
마주 앉은 저 물길
[당선소감] "서툴지만 먼 길 우직하게 가고 싶어" / 황외순
얼마 전, 십 년 지기 가게를 정리했습니다. 그곳은 미용실을 시작하고 두 번째로 자리 잡은 곳이었습니다. 제게 미용실은 일터이자 문학의 산실입니다. 엄습해 오는 상실감과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 사이에서 힘들어할 즈음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뭔지 모를 묵직한 것이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아마도 그건 채찍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더 잘하라는 격려의 채찍,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압의 채찍이 제 머릿속을 후려쳤기 때문입니다.
시조와 눈이 맞은 지 오래, 시조의 틀이 주는 적당한 구속이 맘에 들어 감히 외도는 꿈꾸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변방에서 시와 수필의 독자로 기웃거리다 뜻하지 않게 만난 터라 홀연 짝사랑인 듯 외롭고, 이방인인 듯 겉돈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시조에 못 박아 둔 제 존재감을 재차 확인하곤 했습니다.
드디어 출발선에 섰습니다. 아직은 서툴지만 먼 길 우직하게 달려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달리고 싶은 제게 등 떠밀어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누구보다 기뻐해 주실 부모님과 병상에 계신 시어머님, 의기소침해 있을 때면 위로보다 칭찬을 더 많이 해 주시던 경주문예대학 선생님들과 문우들께도 감사드리며, 묵묵히 제 응석 다 받아 준 남편과 사랑하는 두 아들 현준이, 현제와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황외순/1968년 경북 영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청소년교육과 졸업. 제3회 이조년 추모백일장 장원
[심사평] "팽팽한 긴장감과 신선한 비유 빛나" / 이우걸
340여 편의 작품을 앞에 놓고 가슴 두근거렸다. 어느 가인이 태어나 3장 6구 민족의 가락에 걸어야 할 영혼의 노래를 숙명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또한 그 울림이 얼마나 깊고 클 것인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비상의 몸짓으로, 서투르다 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음성으로 노래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젊고 건강한 시인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침묵의 무늬' '봄, 우포' '땀나무' '춘향목의 전의' '세한도 앞에서' '그녀는 임신중' '탯줄' 등을 가려내었다. 그리고 다시 곰곰이 읽으면서 지나치게 정적이거나 어두운 작품, 새로운 발견의 눈을 보여주지 못하는 작품, 지나치게 산문적인 작품, 기성시인의 어투가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 등을 제외했다.
결국, 김종연의 '그녀는 임신 중', 김종두의 '세한도 앞에서', 황외순의 '탯줄'이 남게 되었다. 세 편은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현실을 시화해보려는 김종연의 몸부림은 가치 있는 시도이고, 세필로 그려나간 김종두의 세한도는 오랜 공정의 결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언어의 품격이나 소재의 진부함이 끝내 마지막 낙점을 가로막았다. 거론한 작품에 비해 당선작은 팽팽한 긴장감과 신선한 비유가 확연히 빛났다. 꿈과 희망을 내장(內藏)한 개안(開眼)의 풍경이야말로 새해 아침에 어울리는 가락이기도 했다. 더 많은 노력으로 대성하기를 빌 뿐이다. <심사위원 이우걸>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모과나무
주미경
휠체어 뒤에 책가방을 달고
재륜이가
학교에 갑니다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모과나무 아래에서
길게 숨을 내쉴 때
모과나무는
가만히
휠체어를 내려다봅니다
무릎에 머리가 닿도록
허리를 휘었다가 젖히면서
반 바퀴
또 반 바퀴
언덕을 오르는 동안
뿌리에서 먼 가지 끝까지
잔뜩 힘을 주는
모과나무
재륜이가
언덕을 넘어
허리를 쭉 펴는 순간
뚝
모과가 떨어집니다.
[당선소감] "꽃이 되든지 바람이 되든지…" / 주미경
'신춘문예 응모'라고 적은 봉투를 내밀자 우체국 여직원이 "아!" 그러면서 해맑게 웃었다. 이 설렘을 안고 오늘, 이 작은 시골 우체국을 찾은 사람이 또 있었나 보다. 그 여직원의 미소가 나에게 행운의 신호였을까. 그러나 행운도 실력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행운을 바라기엔 아직 모자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선 소식을 듣고 이제 비로소 희망을 품어 본다. 이 길에서 나를 찾아오는 누군가와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 말이다. 내 동시가 그 어린 독자에게 꽃이 되던지 바람이 되던지 무엇이든 되면 좋겠다. 88세의 양산 학춤의 명인 학산 김덕명 선생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단디 새겨라! 내는 지금도 하루 한 시간 반씩 추면서 다듬는다." 이제 시작(詩作)을 막 시작한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나를 다듬고 동시를 다듬어야 할까. 그 시간을 즐기면서 이 길로 성큼 나가보련다.
나태해질 때마다 김은영 선생님께서 정신 번쩍 들게 해주셨다. '또박또박' 시 동무들이 없었다면 응모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평생의 문함(文銜)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부산일보에 감사드린다. 햇살 드는 안방 한쪽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조용히 문을 닫아준 표정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주미경/ 1969년 경기도 여주 출생. /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시 모임 '또박또박' 회원.
[심사평] "생생한 묘사와 깊은 교감 '감동적'" / 공재동
주미경, 김자미, 김규학, 이 세 분의 작품 '모과나무'와 '김장하는 날' '시험지'가 최종심 대상작품이었다. 부산은 물론 경상남북도,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수많은 작품 중에는 떨어뜨리기에는 아까운 작품이 너무 많아 마지막 세 편을 남기기까지의 심정은 고통 그것이었다.
최종심에 오른 세 작품은 어디에 내놓아도 좋을 완성도 높은 작품이지만 이 중에서 단 한 편만을 골라내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기도 했다.
그러자니 먼저 '시험지'에서 흠을 찾아냈다. 번득이는 재치가 그것이다. 재치가 이 작품의 장점이기도 하고 허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재치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는 맞을지 몰라도 지나친 재치는 문학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김장하는 날'의 '곰실곰실/이야기가 익어간다/아삭아삭/김치가 맛들어간다'고 하는 마지막 연은 '김장하는 날'의 정취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흠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모과나무'는 흠잡을 데가 없을 뿐 아니라 휠체어를 타고 언덕길을 오르는 아이의 생생한 묘사와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모과나무와의 깊은 교감이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동시는 이래야 한다'고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심사위원 공재동
주미경, 김자미, 김규학, 이 세 분의 작품 '모과나무'와 '김장하는 날' '시험지'가 최종심 대상작품이었다. 부산은 물론 경상남북도,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수많은 작품 중에는 떨어뜨리기에는 아까운 작품이 너무 많아 마지막 세 편을 남기기까지의 심정은 고통 그것이었다.
최종심에 오른 세 작품은 어디에 내놓아도 좋을 완성도 높은 작품이지만 이 중에서 단 한 편만을 골라내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기도 했다.
그러자니 먼저 '시험지'에서 흠을 찾아냈다. 번득이는 재치가 그것이다. 재치가 이 작품의 장점이기도 하고 허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재치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는 맞을지 몰라도 지나친 재치는 문학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김장하는 날'의 '곰실곰실/이야기가 익어간다/아삭아삭/김치가 맛들어간다'고 하는 마지막 연은 '김장하는 날'의 정취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흠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모과나무'는 흠잡을 데가 없을 뿐 아니라 휠체어를 타고 언덕길을 오르는 아이의 생생한 묘사와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모과나무와의 깊은 교감이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동시는 이래야 한다'고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심사위원 공재동 >
▶▶ 2012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시조>
암자에 홀로 앉아
박 상 주
날 좀 때려주오
천년고찰 범종 치듯
안으로
다져놓은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
빈 골짜
다 쏟아 붓고
나비 되어 가련다
못다 한 말, 심장 속에 한 장 벽돌로 구워냈다아침에 비둘기 떼가 한바탕 원무(圓舞)를 추며 하늘을 쓸더니, 오후에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암자에 홀로 앉아’라는 작품이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기쁘나 슬프나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던 앞산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이미 처녀시집까지 펴낸 아내가 큰 눈을 반짝이며 축하의 손을 내민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찌 할 소리 다하고 흘릴 눈물 세상에 다 보일 수 있겠는가. 사람은 저마다 밤이 되면 못다한 말 덩이 덩이를 한숨으로 이겨서 뜨거운 심장 불 속에 넣어 한 장의 벽돌로 구워낸다.
그리고 그 벽돌을 차곡차곡 마음 한 기슭에 쌓아올려 전탑(塼塔)을 세우고 그 전탑 위로 혼자 흘린 눈물은 이끼로 피어나고 그 위로 날아든 풍경(風磬)소리는 푸름을 더해간다. 하루가 저물어 갈 때 들려오는 산사(山寺)의 범종(梵鐘)소리는 숙연한 기분을 자아낸다.
둥! 종이 울리고 한 동안 그 파동은 지속되다가 웅! 웅! 맥놀이를 거듭하다 서서히 종소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종소리가 울려온다. 마치 중생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억겁 생(億劫 生)을 거듭하며 쌓아온 모든 번뇌덩이를 모아 빈 골짝으로 쏟아버리듯. 곡마단 천막 안에서 무대가 보이지 않아 발뒤꿈치를 치켜들던 키 작은 소년같이, 아직 낮은 등고선에 머물고 있는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법화경> ‘화성유품’의 ‘변화성(變化城)’으로 잠시 자리를 마련해 주신 그 배려와 믿음이 헛되지 않도록 정상(頂上)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백양산 선암사 저녁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누가 날 때려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머리를 쳐본다. 어릴 적 심어둔 별 하나가 동지 밤을 치른 겨울 하늘에 돋고 있다.
[심사소감] 시·시조 심사평 : 청각·시각 대비 살려낸‘묘경’/ 고은
‘보시(1)-지렁이’의 담담한 고백체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눈물자국’도 덜 설명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제쳐두기 아까웠다. ‘회화나무’의 단단한 솜씨도 그랬다.
이런 작품들을 지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세 작품이 시부분 ‘세월에 告함’ ‘분원의 강덴 노을의 소각장이 있다’와 시조부문 ‘암자에 홀로 앉아’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각각 다른 몇편과 함께 보내온 것이어서 그것들을 읽는 동안 그 실력의 속내가 밝혀지는 경험을 했다.결국 시조부문 ‘암자에 홀로 앉아’를 당선작으로 삼았다.
당선작 시조는 종소리와 ‘청태눈물’이라는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을 이루었다. 다만 ‘때려라’라는 거센 표현이 산사 환경을 작위적이게 했다. 하지만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 아쉽게 된 시쪽은 중후한 음조 위에 참신한 언어구사를 한 작품이다. 그러나 한두군데의 휴지부가 거슬리는 현학취미를 자아내고 말았다.
편집국 벗들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면전에 사절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 심사를 맡았다. 바야흐로 흑룡의 새해 <불교신문> 창간시대의 인연을 떠올리며 낯선 선자가 되어 보았다. 낙선의 작자들은 더 연마하기 바라고 당선자는 이번의 수준을 뛰어넘는 내일을 지향하기 바란다. 산중이 진언 ‘향상일로(向上一路)’가 왜 있겠는가.
▶▶ 201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시조 당선작
<시>
저무는, 집
여성민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시 심사평] 詩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뤄 / 함성호, 송찬호
←심사위원 함성호(왼쪽·시인), 송찬호(시인).
물리학에서는 수학적 사건이 있고,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사건이 있고, 시에서는 말의 사건이 있다. 하나의 단어가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전체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일한 사건으로 만들 때 그것은 시에 의해서고, 그것은 시인의 일이다. 말이 사건이 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에 있어서 말의 풍경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대로 지평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서 받은 스물세 분의 시는 오랜만에 우리 시의 지형 깊은 계곡으로 우리를 놀게 하고,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며 드넓은 바다에서 서 있게도 하는 행복한 경험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그 울렁거리는 느낌을 타고 세 분의 시를 골랐다. 일일이 짧은 감상을 달고 토론을 거쳐 힘들게 또는 아쉽게 손에서 터는 작업을 거쳐 남은 세 편의 작품을 두고, 우리는 잠시 부러 딴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딴 얘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토론에 들어가 최호빈의 ‘고민의 탄생’, 김미영의 ‘상자’, 여성민의 ‘저무는 집’을 골랐다.
최호빈의 시는 시상을 치밀히 전개해 나가며 이미지를 구상화시키는 솜씨가 일단 돋보였다. 단어 하나의 선택에서 다년간 습작을 한 흔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김미영의 시는 우리 삶의 비루한 것들을 보듬어 소중한 꽃을 피워 내는, 애정이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따뜻함이 편편에서 맡아졌다.
아무리 시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시라 할지라도 자기의 바깥을 보는 이런 시선은 이 즈음에는 꽤나 귀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향기는 더 짙었다.
그러나 최호빈의 시는 숲이 울창한 만큼 베어 낼 나무들이 꽤 있었다는 점에서, 김미영의 시는 아직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여성민의 시는 반복되는 말과 말로 공간을 이루고 거기에 막연과 아연의 풍경들을 자리하게 해, 시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있었다. 좋았다. 축하한다. - 김소연 강정(예심)
[시 당선소감] 난 詩 소비자, 더 읽겠습니다 / 여성민
어느 저물녘엔 전화를 받습니다. 그 밤에 첫눈이 푹푹 내립니다. 조금씩 눈 속에 묻혀 가는 집과 산과 논과 창을 봅니다. 집이, 산이, 논이, 창문이 하나씩 저물고 있다는 느낌. 어머니의 둥근 무릎처럼 그 속에서 불빛들이 견디고 있다는 느낌. 그 밤에 그는 저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짓던 시를 마저 짓습니다…. 견딥니다….
배고플 때 밥 사주던 금호초등학교 동창들이 생각납니다. 부족한 글 뽑아 주신 서울신문과 심사위원님들을 생각합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페이지처럼 많은 밤들이 지나갑니다. 시를 읽으며 흐려지던 밤, 은혁이와 민혁이를 낳던 밤, 첫사랑이 있는 골목을 지나며 버스 안에서 아프던 밤, 창조주의 밤이 스르르 지나갑니다. 모든, 혼자였던 밤들. 그리고 나. 나는 아직도 소비하는 사람. 더 많이 소비하고 싶은 사람. 시를, 더 많이 읽겠습니다.
▶약력 : 1967년 충남 서천 출생. 안양대 신학과,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1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소설)
201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
김종두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
낯선 시간 마주보며 갓끈을 고치는 연암,
은어 떼 고운 등빛에 야윈 땅을 맡긴다.
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 무르팍,
벌레처럼 달라붙은 때아닌 눈발 앞에
싣고 온 꿈을 물리고 놓친 길을 묻는다.
내일로 가는 길은 갈수록 더 캄캄해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
[시조 심사평] 세련된 감각적 재단 돋보여 / 이근배. 한분순
←심사위원 한분순(왼쪽·시조시인), 이근배(시조시인)
다만 안전하게 당선작에 오르려 번뜩이는 시도 대신 부드러운 변주만을 구사한 작품들도 있어 그 솜씨의 잠재력에 아쉬움을 느낀다.
올해 시조 부문은 양적으로 늘어난 응모 편수만큼이나 질적인 진화 또한 돋보여 신진들의 필력에 대한 설렘을 갖게 한다. 고전적 원형과 현대적 미학을 동시에 이루어야 하는 시조에서 이처럼 적극적인 관심은 장르의 신선한 동력이 될 것이다.
당선작은 김종두의 ‘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이다.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으로 수려한 완성도를 확보했다. 주제로 정한 시점이 과거이나 박제된 이야기로 흐르지 않고 동시대와 교감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은 형상화가 뛰어났다.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직조하여 주시할 만한 정점에 이르렀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장윤정의 ‘물의 사원 짓다’, 박성규의 ‘별을 쓸다’, 강송화의 ‘교각이 된 금강송’, 방승길의 ‘서해 낙조’이다. 저마다의 솔깃함으로 매료시키는 수작들이었으나 전개에서 표출된 작법의 출중함에 비해 흐릿해진 종장이 안타깝다. 또한 전반적으로 서술에 몰입하여 서정이 다소 희석된 듯하다.
신춘문예를 위한 어떤 공식은 없다. 정답을 찾듯이 쓰기보다 압도적인 작법을 스스로 만들어 낼 퍼덕이는 창의성을 기대해 본다.
▶▶ 2012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역을 놓치다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기다리다 잠든 동생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미싱 앞에 앉은 엄마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당선소감] 지친 나에게 새로운 불꽃이 일어 / 이해원
이런 기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두 번의 수술로 몸과 마음이 지쳐 올해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귀를 의심했습니다. 너무 떨려서 전화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젊은 문학도의 길을 가로막은 건 아닌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게 출발해 시의 발아점까지 달리기엔 숨이 찼습니다. 햇빛도 보기 전에 멈춰버린 날들이 폐지처럼 수북이 쌓였습니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시를 놓고 있다가 느닷없는 당선 소식으로 마음에 불꽃이 일었습니다. 이 소중한 불꽃, 시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태우겠습니다. 옛날 호롱불 밑에서 밤늦도록 책을 보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의 가슴에 시의 씨앗 하나 묻어놓으신 분들,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납니다. 주저앉은 제 손을 잡아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길로 이끌어 주신 박주택 선생님, 항상 용기를 주시던 이문재 선생님께 큰절 올립니다. 힘들 때 힘이 되어 주시던 마경덕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시사랑 화요팀 선생님들과 문우들 고맙습니다. 묵묵히 지켜보는 남편과 딸 미라, 아들 명훈이와 창훈이, 친지들, 친구들,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약력 : 본명 이숙자 /1948년 경북 봉화 출생 /1999년 ‘수필춘추’ 신인상 수상
[심사평] 따듯하고 애달픈 시
… 서민가정의 풍경 잘 묘사 / 신경림. 유종호
지난해보다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지만,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지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행을 타는 것인지 응모작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창작교실 등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특히 정수박이, 설수인, 이해원의 작품들은 당선작으로 일단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정수박이의 ‘능선을 바라보며’는 무리 없이 읽히는 장점을 지녔으며 호소력도 상당하다. 한데 내용이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 한 번 들은 것같이 귀에 익다. ‘민달팽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껍데기조차 지니지 못하고 대학을 나온 아들의 취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아버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당선작으로는 무언가 1퍼센트 모자란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어느 한 구석 맺힌 데가 없어서일 것이다. 설수인의 시 가운데서는 ‘투석실의 하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인 체험 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이라는 점이 우선 호소력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고통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데 조금 장황하고, 내용 탓인지 읽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없지 않다. ‘줄 끊긴 바이올린’이나 ‘앉은뱅이 저울’에 대해서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원의 ‘역을 놓치다’는 참 따듯하고 애달픈 시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 ‘육교 밑 고고학자’나 ‘냉장고는 태교중’은 비유가 안이하고 서툴다. 이상의 후보작들을 놓고 숙의한 끝에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기로 하면서 ‘역을 놓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신경림(시인), 유종호(문학평론가)
▶▶ 2012 아시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별연습1 외
손상호
해를 껴안고 울다 울다 지친 달맞이꽃 주변을 물잠자리가 새까맣게 날고 있는 뚝방, 머리에 꽃을 꽂은 저 여자는 누구의 여자일까 배고픈 꽃이 툭하면 봄을 파는 가을에, 일부는 삭제하고 일부는 가림처리하고도 거짓말처럼 꽃의 속살이 보여, 가을이 아니더라도 이별해도 좋을 날이 올까 하늘 시퍼런 날에 꽃은 더 불행하다해서 야한 꽃이 되어 몰래 정을 통한 우리가 어떤 벌과 용서를 받게 될지, 바람이 불어도 떨지 못하는 꽃이나 바람이 멈춰도 떨고 있는 꽃에게, 돌틈이라도 좋을 어디 몸 맡길 곳은 없는지 사흘 내린 비에 젖지 않는 강이라 서울의 신호등이 좀처럼 켜지지 않아도 축협 앞 마른 버들에 물이 오르면 장바구니를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아내를 만날까 수줍은 듯 몸을 가리고 내 뒤에 숨어 있을까, 이별 오기 전에 내가 살린 꽃
이별연습2
내 배꼽에는 열쇠가게 스티커가 겹겹이 붙어 있고 배꼽아래에는 사우나탕 스티커가 더덕더덕 붙어 있지요 몸이 무거워진 나는 신호등이 짧은 축협 네거리를 건너가지 못합니다 힘들면 서울로 오라시는 김형, 5월인데도 동강(冬江)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갔다가 욕본 여자는 오늘도 소주를 병 채로 마십니다
여자의 등 뒤에서 붉은 해가 솟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안개를 껴안고 놔주지 않습니다 시든 물매화처럼 물때 짙은 강을 목 놓아 부르다가도 금세 안개를 쫒아 다닙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날, 마른 강에 빠진 여자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물비린내가 싫어 허리에 차고 있던 강을 내다버렸겠지요 서울행 비둘기호를 타고 붉은 나무들의 숲으로 떠났겠지요.
[당선소감] 좋은 세상이다. 우표를 부치지 않아도 돌아오지 않고 창밖에 주먹눈이 내려도 길이 막히지 않는다. 인터넷이라는 요술 우체부 아저씨가 부치자마자 전해주는 세상인데도 예나 지금이나 바뀐 주소로는 전할 수 없었던 그 편지, 그 편지를 누가 쓰고 있다. 누군가가 살면서 부르는 애닯은 노래가 시라고 하니 편지도 시가 될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써내려가는 게 시라면, 바람에 흔들리며 피는 꽃도 시가 되겠지. 바람 부는 날에는 떨어지는 것으로, 바람 멎은 날에는 서 있는 것으로 시가 되지. 시인들은 통증을 잊으려 악을 쓰며 시를 쓰지만 꽃은 서 있는 것만으로 시가 되지, 떨어지면서 더 멋진 시가 되지.
뒤늦게 보내는 편지라 생각하고 보낸 원고, 세상에 내보여도 되겠다는 연락을 받고 잠시 좋기도 했는데 몇 분이 흘렀다고 그새 통증으로 돌아온다. 좋은 세상이라고? 사는 게 고통이라 했고 꽃이 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통증을 수없이 겪어야하는데도? 힘이 되어준 가족과 격려해준 이웃이 고맙다. 내가 계속 시를 쓰게 하는 힘이다. 졸시를 선해주신 분들께는 오래 가는 시향으로 고마움을 갚고 싶다. 찔레꽃 진자리에 마른 갈꽃이 눈처럼 보인다.
찻잔
김을남
국화향기 그윽한 늦은 오후
공원 벤치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찌그러진 찻잔
빈 찻잔 속엔 무슨 사연이 있을까 !
그리움과 보고픔이
외로움과 슬픔이
분노와 복수심을 담아 마셨을까 !
해결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며
한없이 쥐어짠 손톱자국
원한의 무게에 못 이겨 주저앉은 모습에
석양은 흐느낀다.
[당선소감] 내 생애에 제일 기쁜 날이라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쓴 글을 눈여겨 보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뜻밖의 일이라 어리둥절 하늘의 별을 딴 기분입니다. 이 나이에 이런 큰 복을 받는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부족한 한 사람을 건져주신 아시아일보 작가 선생님 존경합니다. 남은 인생 글로서 채우고 싶습니다. 많은 조언과 충고를 바랍니다. 거듭
삶, 아름답고 고달픈 것
심형민
민들레 꽃씨 하나
팽그르르 내려 앉아
쭈뼛 거린다
힘겹게 틈을 비집어 보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때로는 파도타기처럼 스릴 있고
콘크리트담장만큼 경직되고
고달픈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눈부신 황금빛 꽃잎만큼이나
곱고 향기롭고
부딪고 핥이고 마모되고
바스러져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아름답고
한 송이 노란 민들레처럼
강인한 삶이고 싶다.
[당선소감] 시를 쓰려고 하면 할수록 시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고통스러웠습니다. 내 마음의 말들이 갈 곳을 잃고 제 멋대로 나뒹구는 시가 되고 말아 부끄러웠습니다. 시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한 제 졸렬한 말들을 기꺼이 끌어 안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제게 크나큰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신 아시아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먼저 타개한 사랑하는 ‘경민’언니에게 이 영광의 졸작을 바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 아시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우포 왕버들
민승희
살얼음 정수리에 꽃대하나 벌고 있다
서리 내린 가지마다 동안거 푸는 버들
이른 봄 풍경소리가 우포늪을 깨운다
적멸을 꿈꾸는가, 가시연 마른 대궁
깃을 턴 휘파람새 푸른 정적 깨트리면
하르르 이는 바람에 물비늘이 일어난다
감았던 눈을 뜨면 문빗장이 열리듯
희뿌연 이내 걷고 우뚝선 수마노탑
층층의 뼈대하나가 하늘을 받쳐 든다
버들가지 필 때마다 옥개석도 자라나고
금강경 피워 물듯 초록 장삼 두른 나무
그 앞을 도는 사람들 부처마냥 환하다
[당선소감] / 민 승 희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세밑 아침에 당선이라는 낭보를 받아 들었습니다. 맵짠 추위가 일시에 누그러들며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낍니다. 옷깃을 파고들던 바람소리가 구순 어머니를 위협하는 고향집 안방에서 모처럼 노모와 함께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었습니다. 청국장 띄우는 냄새가 오늘처럼 구수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이라는 벅찬 타이틀을 마당가 나무 위의 까치도 반기는 듯합니다. 유난히 푸르게 보이던 하늘의 의미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거미줄 같은 습작의 시간들은 살아온 날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살아갈 날들을 그려보는 나름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설렘과 기대로 오늘 저는 문단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출발선에 섰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살 떨리는 긴장감으로 펜을 잡으려 합니다. 한동안 풀려있던 들메끈을 힘차게 새로 조여 봅니다.
스스로의 모자람을 알기에 차근차근 채워 나가겠습니다. 토끼의 속도를 부러워하기보다 거북이 같은 한결같음을 지향하겠습니다. 길손에게 나뭇잎을 띄워주던 우물가 아낙의 마음으로 시를 짓겠습니다. 서푼어치의 손끝 재주를 경계하며 문자와 언어 앞에서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처음처럼’이라는 말을 잊지 않겠습니다.
살아생전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시 한 편을 올릴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으로 가슴까지 두 방망이 치는 오늘, 뒤늦게 시작한 글쓰기에도 조용히 지켜봐 준 남편의 소리 없는 박수에 고개를 숙입니다. 그간 지도해 주신 교수님과 같이 공부하던 문우들께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전합니다. 부족한 글인 줄 알면서도 선뜻 뽑아주신 심사위원과 아시아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시조 앞에서 더 맑은 시인의 목소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2012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련꽃
조영민
꽃이 문을 꽝 닫고 떠나 버린 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 보지 못할 풍경이, 빠금히 닫힌다
보고도 보지 못할 한 시절이 또 오는 것일까
닫히면서 열리는 게 너무 많을 때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다
바람이 몰려와 모서리마다 그늘의 알을 낳는다
온통 혈관이고 살인 축축한 짚벼늘이 느껴져
아주 오랫동안 지나간 것들의 무늬가 잡힐 듯한데…
꽃 진 그늘에는 누가 내 이름을 목쉬게 부르다가
지나간 것 같아
꿈이나 사경을 헤맬 때 정확히 들었을 법한 그 소리가
왜 전생처럼 떠오르는 것일까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
태양이 구슬처럼 구르는 정오. 꽃그늘에 앉으면
뒤돌아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부르다 부르지 못하면 냄새로 바뀐다는데
뒤돌아서 자꾸만 누가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나무를 꼭 껴안아 보는데
나무에선 언젠가 맡았던 냄새가 난다
[당선소감] “온갖 소재들, 詩로 화려하게 꽃피울 터”/ 조영민
날마다 출근하려면 정지용 시인의 생가 앞에서 차를 탑니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일 년 반이 넘어갑니다. 그동안, 나의 창으로 눈발이 날렸고 비도 내렸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꿀벌이 무수히 다녀갔습니다. 벚꽃의 환한 빛이 너무나 좋아, 나에게 유실된 것들을 찾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지용생가 곁에서의 삶은 행복했습니다. 옥천 구읍의 상점 간판들은 온통 지용의 시들이 적혀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면 그 시구에 감흥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작은 시(詩)의 대도시입니다. 지병 같은 나의 불행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에게 시를 쓰는 것은 꿀벌과 같습니다. 저 벚꽃의 환한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가만있으면 벚꽃도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어느 때는 갓 출판된 시리즈물 같은 꽃잎을, 한 장 한 장 번역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돌아보면 시의 소재들이 자신도 번역해 달라 아우성입니다.
계속해서 벚꽃의 환한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영남일보와 부족한 저에게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합니다. 아울러, 수원에 계시는 어머니, 그리고 봉화에 계시는 장모님, 나의 사랑 이길현, 금쪽같은 다녕 동하 이준이, 저를 아는 모든 이에게 감사합니다.
뒤늦게 배운 시인만큼,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화려하게 피워보고 싶습니다. 시의 쓴 맛, 단맛을 조금 겪어 보았으니 이제 길을 가는데 외롭지 않겠습니다. 길을 가다 꼭 한번 시 나라의 번화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심사평] “활기찬 이미지 직조·신선한 묘사 뛰어나” / 문인수, 이하석
예심을 거쳐 올라온 이가 8명이었다. 전반적으로 과도한 수사와 진정성이 얕은 말놀음에 빠져 있어서 심사위원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으나, 이를 압축해들어가 마지막까지 논의된 몇 편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그러한 의구심이 떨쳐지는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유진의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외 몇 편과 조영민의 ‘목련꽃’ 등 수편, 그리고 염민기의 ‘이식’ 등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그 결과 쉽게 ‘목련꽃’이 당선작으로 선택됐다. 다른 작품에 비해 아주 개성적이어서 단연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함께 보낸 다른 작품의 수준도 고르게 느껴졌다. ‘이식’ 등은 새로운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과도한 학대로 메시지가 애매하다는 점에서,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등 몇 편은 작품은 아주 개성적인 데다 일정 수준을 고르게 유지하고 있어 돋보였으나 주제를 부각하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목련꽃’은 제목의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아주 짜임새 있는 이미지의 구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와 같은 단연 돋보이는 구절들로 유장하게 짜나가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묘사도 정확하고 신선하다. 이미지의 직조 솜씨도 꾀죄죄하지 않고 상상력의 구사도 아주 활기에 차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꽃과 나무, 그늘과 밝음을 얽어 짜면서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 그 고요한 시선이 눈부시다. 다만 이 시와 함께 보내온 그의 작품들의 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겉멋과 자의적 이미지들이 걷어내졌으면 더 좋았으리라. 대성을 기대한다.
▶▶ 2012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우리들의 인사법法
김경순
1.
지문이 세면대 밸브에 쌓여간다
암묵적인 약속처럼
조심스럽게 잡고 올렸다 내리며 안녕,
밸브를 감싸 쥐고 그 위에 나의 지문을 포갠다, 새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머드를 화석으로 만나듯
비 젖은 발자국에 서로의 무게로 깊이를 더하듯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조우하게 되는 것일까.
만나지 않으려 이렇게 만나는 것일까.
안녕, 안녕,
헤어질 때와 같이.
2.
당신이 지나간 보도블록을 밟았을 때
내가 사려던 책을 당신이 집어 들었을 때
한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당신과 나도…
춥다는 핑계로 귀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입이 벌어져 있으면 자꾸만 우리는 말이 쏟아질 것 같아요,
아침마다 지우개로 입술을 지우던 나
당신과 나의 선들이 교차하던 순간
내가 웃었기에 당신은 울었다.
[당선소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경순
밥벌이를 핑계로 문학은 항상 제 생의 뒤안길에 자리했습니다. 말로는 사랑한다 하면서 순정하지 못한 행동들로 문학을 쓸쓸하게 만든 적 많았습니다. 아둔하고 졸렬하여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가 문학 때문이라고 타박하고 괴롭혔습니다. 이런 저에게 형이 떨어졌습니다. 앞으로는 문학에 희생하라는 뜻으로 여기고 이 벌 달게 받겠습니다. 제 시에 마음 한 자리 내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바다 비린내 화인처럼 섬기며 사시는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는 내 동생 하라와 찬섭. 우리 다섯 식구 조만간 따뜻한 밥 한 끼 먹어요.
낡지 않는 것은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일임을 알려주신 강형철 교수님, 항상 제 손 꼭 잡고 기운 북돋아 주시는 김양호 교수님, 따뜻한 숭의 소설세미나 선후배님들, 고맙습니다.
숭의시 세미나 마성의 여인 현경언니, 사랑스러운 윤지, 치명적인 매력의 여인 현정 선배, 닮고 싶은 상상력 효정, 너무 많은 것을 주기만 하는 재화 선배. 그대들과 머리 맞대고 골몰하는 시간 속에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 모두를 언어의 채찍질로 기르고 계신 이윤설 선생님. 의지박약에 무기력으로 점철된 저를 참고 여기까지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학을 귀히 여기고 시를 모시며 사는 일로 보답하겠습니다.
▶약력: 숭의여자대학 미디어문예창작과 졸업 서울디지털대학교 상담심리학부 휴학 중
[심사평] 첫 행의 매력에 끌려 / 유종인, 변종태
신인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과거의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 문학의 내일을 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보내온 한 단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어줄 각오를 하고 한 편 씩 페이지를 넘긴다. 문학이 죽었다고 개탄하는 시대, 돈이 안 되는 문학을 붙잡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문청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 숨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 또한 적지 않은 즐거움을 준다. 더구나 어느 순간 큰 나무로 자랄 만한 신인을 발견하면 이런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설렘과 기쁨보다는, 선배로서 떨림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번에 5회째를 맞는 영주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시편들은 800여 편에 이른다. 그 중에는 아직 응모의 기본이 안 된 사람들부터, 아직도 원고지에 자필로 정성껏 눌러쓴 글씨도 있고, 미국과 독일에서 국제우편으로 배달된 응모작품들도 섞여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일차적으로 시적 완성도, 새로운 감각, 습작의 수준 등을 고려해서 작품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작품이 한상림 씨의 ‘임플란트’ 외 3편, 김창호 씨의 ‘자동이체’ 외 3편, 정성수 씨의 ‘배롱나무’외 2편, 이미화 씨의 ‘햇빛이 좋은 날’ 외 3편, 김경순 씨의 ‘우리들의 인사법’ 외 2편 등이었다.
우선 한상림 씨의 경우는, 일상에서 시적 대상이나 상황을 발견하는 힘은 좋으나, 이것들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 현실적 리얼리티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좀 더 신인다운 상상력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김창호 씨의 경우는, 시상은 잘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적 이미지를 만들어냄에 있어서 너무 서술적이며 산문적이라는 지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자신의 진술로 설명을 하고 나면 독자들이 느껴야 할 것은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정성수씨의 경우도 앞의 김창호 씨와 비슷하게 서술적인 이미지가 지나치게 발견되어 산문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은 것은 이미화 씨와 김경순 씨의 작품들이다. 이미화 씨의 경우는 시적인 모티프를 형상화하고 시를 갈무리하는 품이 상당한 습작 이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자(誤字)들과 행과 연의 구분 등은 시를 읽어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곤 했다. 반면에 김경순 씨의 경우는 첫 작품, 첫 행부터 읽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앞에서 지적한 다른 분들의 단점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응모된 시들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당선자로 밀어 손색이 없다는 데 합의했다.
오직 한 사람만을 뽑아야 하는 신춘문예의 속성으로 인해 굳이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에서 단점을 지적하긴 했으나, 기성 시인들도 그러한 점들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탈락한 분들께도 용기를 가지시라고, 위로의 말씀 전하며, 당선자에게는 큰 박수로 축하를 드린다. 아무쪼록 우리 문단의 큰 나무가 되시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 유종인, 변종태(대표집필)
2012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아바타 한 켤레
문제완
잠이 깬 새벽녘에 물끄러미 바라보니
현관 쪽 신발들이 제 멋대로 잠들었다
고단한 입을 벌리고 코를 고는 시늉이다
늘 그렇게 아옹다옹 하루를 부대끼다
저들도 가족이라 저녁에 모여들어도
서로가 지나 온 길을 묻는 법 절대 없다
오고 가는 내 모든 길 묵묵히 따르느라
굽도 닳고 끈도 풀린 가여운 내 아바타여
부푸는 밤공기를 안고 나처럼 누웠구나
[심사평] 서정의 진경과 흥미로운 상상력 / 이승은, 강문신
여전히 시가 ‘금’이 되지 않는 오늘의 시대에도 신춘문예를 서성대는 영혼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물질이 해결하지 못하는 상당한 부분을 문학이 위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영주신춘문예 역시 예년에 비해 작품의 양과 질이 부쩍 늘었음을 밝힌다.
사유는 서정의 살이요, 서정은 사유의 힘줄이라서 우리 몸속에 거부감 없이 들어와 말의 개념을 정당화하고 언어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이번 심사도 주제의 밀도와 짙은 서정성에 바탕을 둔 작품을 눈여겨보며 인생의 애환을 통해 서정의 진경을 얼마만큼 담아냈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진주와 남강, 비봉산의 가을 정경을 팔검무로 묘사, 시조의 장과 장을 퉁소가락처럼 뽑아낸 김재길의 <새벼리 戀歌>, 하루 종일 우리의 정신과 몸을 고스란히 이끌고 다니는 신발이야기를 풀어낸 문제완의 <아바타 한 켤레>, 섬 島를 악보의 음표, 으뜸음자리와 높은음자리 ‘도’로 빗대어 다시 어머니의 무량한 사랑으로 거듭 앉힌 서상규의 <섬의 수의>, 폐지를 수거하여 생계를 꾸려가는 초로의 사내를 통해 연민과 암울한 현실 세태를 짚어낸 이우식의 <빙벽氷壁>, 낡았으나 비루치 않고 해졌으나 허술치 않은 섬마을의 풍경을 담담하게 관조의 자세로 엮어낸 천유철의 <섬마을 여행길>, 지병으로 병원을 오가는 환자의 투병기록 속에 혈육의 애틋함을 진솔하게 녹여낸 허은호의 <햇살 한때>가 최종으로 올랐다.(가나다 순)
작품들이 보여주는 각각의 개성과 고른 호흡으로 심사에 상당한 고심이 있었음을 밝힌다. 그 중, 끝까지 따라와 선자들의 심금心琴을 튕긴 문제완의 <아바타 한 켤레>를 맨 윗자리에 놓았다. 온종일 주인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지나온 길을 묻는 법 절대 없다’는 아바타의 단호한 내면세계를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사물의 실체를 바탕으로 하되 견고한 현실 감각과 자기심화과정에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아울러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일관성과 서정의 힘도 한 몫을 했다. 어딘가 불편함을 주는 시가 마침내 시의 영토를 확장한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다량의 조미료 맛이 아닌, 토속적인 맛을 낸 작품이 시조의 미래를 지켜 가리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다함없는 격려와 박수를 보내며 최종에 오른 다섯 분께도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자세로 용의 해를 열어가길 바란다. <- 심사위원 이승은(글). 강문신>
▶▶ 2012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위풍당당 분필氏
정경희
강의실에 상주하는 분필씨는요
평소엔 친절함 속에 뿔을 감추고 있지만
앉기 거부하거나 행동지침을 어기면
밑줄 좍좍 그어가며 날 길들이려 하죠
동강동강 제 몸 관절 부러뜨리며
어김없이 날카로운 뿔을 꺼내 위협해 와요
나는 뿔이 무서워 의자에 몸 구겨 넣고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분필씨 생각대로 답하고
분필씨 습관대로 따라 행동하죠
가끔 경직되고 고루한 생각에
내 뿔 꺼내 맞서볼까 생각도 하지만요
그의 뿔은 워낙 완고해
내 같은 여린 뿔로는 감히 어림 없다나요?
그래서 나만의 대항 법을 터득했는데요
강의 내용 자장가 삼아
잠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 있거나
창 밖 딴 세상 꿈꾸면서 그 뿔 숫제 무시해보죠
그러다가 뿔을 타고 밖으로 나가
강 건너고 구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발걸음 멈추고 비행기 접어 날리기도 해요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뿔을 먼저 달아준 건 나인지도 모르겠어요
지적이고 당당한 그 뿔이 멋스러워
스스로 닮아가려 애쓰는 건지도
쉿, 분필씨 다시 뿔을 꺼내고 있어요 세상이 갑자기 긴장하네요
[당선소감] 암흑 속에 반짝이는 별이었으면 / 정경희
오래도록 나무로 서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해는 져서 어둠은 짙건만 걸음을 뗄 수 없는 시간들이 두툼한 낙엽으로 쌓였습니다. 자꾸 목이 마르고 뿌리 내릴 수 없는 조바심으로 올려다 본 하늘에 아, 총총히 박힌 별이라니…. 인적이 끊긴 어느 밤,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개 짖는 소리로 길을 잡아 새벽녘에야 사립문에 다다랐을 때의 안도감 같은, 아, 눈망울 맑은 별들의 반짝거림이라니…. 나의 시도 그렇게 위안 받고 또 그렇게 위안이 되었으면 하고 기다리던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날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선물이었으면 하고 되뇌이던 주문이 기적처럼 하얗게 날아왔습니다. 여전히 길 위에서 서성거리지만 가지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과 이야기 나눌 수 있고 속삭이는 별을 머리 위로 올려다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에 입문하도록 등 떠밀어주고 늘 힘이 되어준 남편과 당선 소식에 놀란 눈으로 나를 끌어안던 두 아들에게 먼저 사랑을 전합니다.
은유와 시의 본질을 깨우쳐주신 김영남 선생님, 덕분에 이름 없는 것에게 이름 붙이고 말 거는 일이 한결 쉬웠음을 고백합니다. 시가 곧 삶인 삶을 살라하시던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살겠습니다.
오랜 시간 시의 발등에 쓴 잔을 들이부을 때도 늘 곁에서 힘이 되어준 이기홍, 최가예 시인님, 덕분에 칠전팔기 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도반이 있어 외롭지 않게 길 떠날 수 있었던 정동진회원과 문학아카데미 문우들, 먼 길 돌아가는 뒷모습 지켜봐준 어우름 회원과 제 이름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도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주저앉아 시의 끈을 놓아버릴 순간 손잡아주신 안도현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암흑 속에 반짝이는 별처럼 그렇게 정진하겠습니다.
▶약력 : 1962년 목포 출생 / 광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 2004년 중앙대 예술대학원 / 문학창작과 전문가 과정 수료 / 현 서울목원초등학교 교사 재직 중
[심사평] 안도현(우석대 교수)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구사하던 시들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에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시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아직도 시가 개인적인 고백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시들을 제외하고 나니 수준 높은 시들이 한 소쿠리나 되었다.
마지막까지 손에 들고 있던 시들은 6명의 작품인데 하나같이 읽을 만했다. 최영화 씨의 '갯고둥'은 시적 대상을 유심히 관찰해낸 뒤에 얻은 사유가 일품이었다.
하지만 이 시의 핵심어인 '길'이라는 단어를 이십여 차례 이상 등장시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양은정 씨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참신한 소재로 단번에 시선을 끌어당기는 시였다. 시의 중반부 이후 동어반복이 지루해서 좀 더 다른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주명숙 씨의 '꽃시계 좌담'도 의욕적인 출발에 비해 뒤가 약했다. 대비의 기법을 왠지 서투르게 구사하는 느낌이다. 김수예 씨의 '아토피'는 활기찬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뒤쪽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흠이었다. 나아름 씨의 '누가 냉장고를 열었을까?'와 정경희 씨의 '위풍당당 분필씨'를 놓고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두 작품 모두 독특한 발상, 거침없고 자유로운 표현 방식이 일품이었다.
앞의 작품은 상상의 보폭이 넓어 때로 엉뚱해 보이는 것도 매력이었다. 시는 이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다는 점, 적절한 대화의 삽입으로 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점도 좋게 보았다. 그런 장점들이 이 사람이 응모한 시편에 지나치게 많이 구사되고 있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선작으로 고른 '위풍당당 분필씨'는 기성세대의 권위를 '뿔'로 설정한 상징적 장치가 매우 기발하다.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자의 난감함을 이처럼 능숙하게 표현하는 일은 범상치 않다. 게다가 함께 응모한 시들이 모두 만만치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어 믿음직스럽기도 하다. 좋은 시를 당선작으로 뽑을 수 있어 즐거웠다. 부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빛나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 2012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철새를 만나다
홍철기
문득
뭇별들의 제자리걸음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게 하는 밤
안개 속 방파제는
육지로 난 길 인양
어서 나아가 보라며
건너가 보라며 나를 부르는데
엉겨 붙어 나를 말리는 바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울먹일 때
빈 껍질만 남아 뒹구는 희망
피난민처럼 몰려왔다
이젠 떠나고 싶은데
갈 곳이 없는지 멍자국 같은 사연
하나 둘 모여 불을 밝히고
마을을 이루고 그래서 한세상
어우러진 잡풀처럼 흔들릴 때
알고 있었다 저마다 소금에 저린
마음 한 다발씩 묶어 쌓아두고 있음을
맨 정신에 타오르지도 못했던
마음 불쏘시개 삼아
한 잔 두 잔 마신 술에
취하기는 바다가 취하고 끝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다 고꾸라지며
살 아 야 하 나
이어지지 못하고 부서져 되돌아가 버리는 말
담뱃재 떨듯 매일같이 칭얼대는
희망쯤이야 쉬이 떨어내면 그만이라고
말보다 먼저 떠난 파도가
다한 힘으로 와 쓰러질 때.
저기 저 봉두난발한 바닷바람
사이 위태위태하게 날아가는
철새 한 마리
[당선소감] “마음의 강 건너는 세상의 시 쓸 터” / 홍철기
강을 따라 걷는 사람은 결코 강을 건널 수 없다는 말. 언제나 마음은 강 건너에 있지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해 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합니다.
제겐 문학이 그랬고, 시를 쓴다는 것이 그랬습니다. 그런 제가 이제 강을 건너려 합니다. 세상에 시를 써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망이고, 사람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문학이 따뜻한 밥 한 공기임을, 시가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게 해주는 친구임을 알게 해주고 싶다면 과한 욕심일까요? 그래도 이제 시작했으니 반은 해놓았다고 등을 토닥여 주실거라 믿습니다. 부족한 제 시가 세상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전북도민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대학시절 시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해주신 원광대 정영길교수님, 백제예술대 김동수교수님, 살면서 언제나 문학과 함께 하라고 조언해주신 대진대 서범석교수님, 이병헌교수님 모두 감사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오늘은 맘껏 해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누나가족들, 그리고 당신이 북극이라면 난 북극에서만 살고 싶은 북극곰이 될테니 결혼해달라는 제 말에 웃으면서 결혼해준 내 아내 탁경화, 그리고 우리아들 홍연후, 뱃속의 다복이 모두 사랑합니다.
끝으로 언제나 바쁘지만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는 군산시 수송동주민센터 직원과 군산시 사회복지공무원 모두 2012년 행복했으면 합니다
[심사 소감]
시는 궁극적으로 삶 혹은 체험의 기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는 언어예술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 언어예술성을 담지한 체험의 진솔성이 기본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격을 갖춘 작품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작품에 비해 감동의 진폭이 남달라야 한다.
곡진한 정서가 튼실한 시적 형상화를 이루고 있어 선자의 손에 최종까지 남은 분들은 홍철기 ‘철새를 만나다’ 김은실 ‘겨울, 민원을 내다’, 임복금 ‘갈대숲에서’, 노원숙 ‘소라보 당신’ 이근영 ‘고추말리기’였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모두 생의 갈피에서 길어 올린 투명하고 절절한 정서를 언어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 하였다. 그러나 김은실과 임복금의 작품은 몇몇 군데에서 노출되는 불투명한 표현 때문에, 노원숙과 이근영의 작품은 안이하고 상식적인 표현 때문에 시적 긴장감이 이완되고 있다. 홍철기는 같이 응모한 ‘금일도’의 작품도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났다.
특히 철새를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철새를 만나다’ 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선명한 묘사력, 구조적 안정감과 더불어 유려한 리듬감을 확보한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리하여 ‘철새를 만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 양병호 시인 / 전북대 인문대학장
▶▶ 2012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숙
이영종
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치 않으므로
호남선 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
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
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얇게 저며 만든 것
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
동면에 들어간 나무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
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아랫배를 혀로 핥다가
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
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
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왔던 것일까
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
고속철도가 놓였을 것이고 밝은 귀 환해지도록 기적소리 들으며
멧돼지는 침목에 몸 비벼 승차 지점을 표시해 두었으리라
콧김으로 눈발 헤쳐 숲길을 철길까지 끌고 오느라
다리는 더욱 굵고 짧아졌으리라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네줄 새끼도 없고
돌아갈 숲도 없는 나는 오랜만에 새 신문지를 바꿔 덮으며
그때 그 역 근방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멧돼지 십여 마리의 발소리를 믿기로 했다
[당선소감] "재미와 비애 있는 詩 쓸 수 있도록 분투하겠다" / 이영종
2011년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마음의 모든 정물들을 설레게 했던 당선 통보를 받고, 나는 산양이 바위를 건너는 법을 생각했다.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거름에 전화해도 그냥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늘 거기 있을 것 같은 산양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산양이 아니라면 건너기 힘든 바위를 딛고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법을 알았다 했더니, 어느새 새로운 바위가 나를 기다리는 날이 지속되고 있다. 결국 바위를 건너는 법을 다 알지 못하고 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지속되어야 할 고통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내가 사는 곳은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우내 이 땅의 주인은 사실 눈이다. 내가 아끼는 나무를 부러뜨려 눈을 흘기면 "내 것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는 듯 처마에 고드름을 수십 개나 매달아 놓은 적도 있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있거나 엉금엉금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 원래 만나려 했던 친구를 나는 늘 만나지 못한다. 그가 이 땅에서 살았던 자취를 거두어 자기 땅으로 망명해 버린 지 몇 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13권 대하소설 '마적'을 마치고 삶 또한 마친 친구 서 권은 지금도 눈 내리는 감나무 가지에 와서 내 집 개를 밤새워 짖게 한다. 나가 담배를 피워 그와 소통을 하는 일이 뜸해졌다. 그도 이제 돌아갈 곳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심사위원들께서는 관계를 성찰하여 희열 가득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면허증을 내주셨습니다. 재미와 비애가 있는 시를 쓸 수 있도록 분투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시를 쓴다 하였지만 눈 뜨지 못한 나에게 점안을 해주신 안도현 교수님, 아낌없는 비판을 해주었던 우석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문우들께 금오도를 드립니다. 내가 살았던 날들을 빨래처럼 비틀면 흘러나올 물 색깔이 거의 똑같을 나의 친구들, 함께 젓가락 딸그락거리던 어머니와 아내, 식구들께는 무엇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이영종 : 1961년 정읍 출생 /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 / 호남제일고 교사
[심사평] "따뜻한 서정과 맑은 연민 보여주고 있어" / 송하선, 문태준
심사는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심사위원들은 한 편의 시가 유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보았다. 작품의 처음과 끝이 조직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난해한 시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난해한 시는 명상과 사색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유심하게 들여다보면 해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곤란하다고 본 시는 비록 그것의 파편적 언어와 기발한 상상력이 부분적으로 절창을 낳더라도 맥락의 구조화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였다. 시행의 전개가 연상에 의해 진행되더라도 산만하고 까다롭기만 한 경우는 제외시켰다.
고현도의 '까치의 독후감' 외 2편은 안정되고 사려 깊은 시편들이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장점이 돋보였고, 오래 다듬은 흔적도 역력했다. 그러나 정아(正雅)하기만 할 뿐 새롭고 기발한 해석이 부족했다. 규정하고 설명하는 진술이 많은 것도 시의 맛을 떨어지게 했다.
반면에 임해야의 '독도' 외 4편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사고가 기발하고 분명했다. 그런데 이 기발하고 분명함의 수준이 투고한 작품들 사이에서 편차가 컸다. '독도'나 '쿼드러츠學' 같은 작품들은 상상력이 뛰어났으나 그 착상 자체는 진부하고 평범했다. 그래서 연상이 과잉되게 사용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했다. 시적 질문이 보다 더 독특하고 다양한 곳에서 생겨났으면 좋을 듯하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들이었음을 밝혀둔다. 분발을 당부한다.
이도율의 '노숙' 외 3편은 진지한 작품들이었다. 순정이 있는 따뜻한 서정을 보여주었다. 옹동이라는 곳의 맵고도 신 삶의 풍경을 보여준 '항아리'도 좋았으나 심사위원들은 '노숙'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우화적 요소가 가미되었으나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맑은 연민에 이르고 있다는 점도 이 시의 장점이었다. 시단에 좀 늦게 나오는 만큼 정신을 곤두세워 부지런히 좋은 작품을 쓰길 바란다.
▶▶ 2012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시조. 동시 당선작
조련사K
한명원
그는 입안에 송곳니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어 혼자 있을 때 네 발로 걸어도 보았다. 야생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조련은 가늘고 긴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손으로 옮겨갈 때 가벼워진다. 눈치를 보는 것들의 눈빛은 언제나 심장을 겨냥하는 법. 다만 두려운 것은 손에 들려 있는 권력일 뿐이니까.
조련사 k.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 금빛 은행잎이 k의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 철조망에 갇힌 초원이 펼쳐져 있다. k는 손을 흔들거나 휘파람을 분다. 잠자던 맹수가 눈을 뜨더니 달려온다. 무릎을 꿇는다.
k는 맹수의 꼬리를 목에 두르고 맹수코트를 걸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k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몸에 털이 자라고 손톱은 길어졌다. 모든 모의謀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말 안 듣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맹수보다 더 맹수처럼 사나워져갔다.
얼마 전 야생의 모의謀議가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그 후 k의 통장으로 감봉된 월급이 들어왔다. k는 자기 목을 조르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털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
조련으로 청춘을 보낸 k는 결국, 야생을 놓치고 말았다.
새로운 조련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맹수들과 더 빨리 친해졌다. 동경하던 야생은 저 쪽에서 어슬렁거렸다. 이빨 빠진 맹수 한 마리가 다른 맹수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렸고 금빛 왕관은 가을 저 쪽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얼마간 퇴직금의 조련을 받는 힘없는 맹수가 되어 있었다
아,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 연말 캐럴 송을 들었지만 올해의 캐럴은 유난히 따뜻한 음절로 들립니다. 상처받으면 혼자 공상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좋아하던 제가 이렇게 보상을 받는군요. 세상의 모든 관계들과 사물들에게 감사합니다.
집 근처에 있는 동물원으로 아이와 손을 잡고 자주 갔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개최하는 동물교실을 수강 신청했습니다. 염소에게 풀도 주고 물개들에게 생선도 던져주며 동물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련사를 보면 동물들은 달려왔고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는 어느새 컸고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마다 나는 여전히 동물원을 찾았습니다. 새장 속 독수리, 철창 속 호랑이, 돌 위에서 앞만 멍하게 바라보는 곰 식구들. 그들은 나의 친구였고 나였기에 야생을 그리워하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동물원 입구에 서 있던 나뭇잎이 휘날리고 머리 위로 나뭇잎 왕관이 씌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동물원을 다 돌고 나올 때가 되면 어느새 마음이 편해져 겸손한 내가 오만했던 내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미흡한 제 글을 뽑아주신 조선일보와 조정권, 문정희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문학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용기를 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이승하 선생님께도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친구 미정, 옥련, 미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제자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신이 내린 축복 같은 딸 수연과 오랜 시간 묵묵히 견디어준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초심으로 세상에 소외된 것들을 노래하겠습니다.
▶약력 : 1965년 서울 출생/중앙대 예술대학교 문예창작전문가과정/학원 논술강사·여성회관 독서논술지도 강사
… 섬뜩한 시적 투시력 보여 / 문정희·조정권
본심에 올라온 8명 응모자들의 작품을 읽고 선자들은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 본연의 길을 추구하는 시로서 시의 고전적 규범이라 할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이 심화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3명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먼저 ‘창밖이 푸른곳’등 3편을 투고한 김은지의 경우 ‘뿔의 냄새’가 눈길을 끌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과거에 응모했던 동일 시를 계속 투고하고 있다는 점이 신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과 다른 두 편의 시적 사유도 평면적이란 점이 못내 아쉬웠다. '조련사k’ 등 3편의 작품을 투고한 한명원의 경우 산문적 진술을 꾀하며 그 안에 극적 구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거슬리지만 삶의 구체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이 새롭다기보다는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응모자 중에서 인간과 현실에서 삶의 남루함을 포착하는 섬뜩한 시적 투시력을 보여준 유일한 작품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불통을 어루만지다’외 3편을 투고한 정지우의 경우 시적 표현은 응모 시 중에서 가장 세련되어 보였지만 ‘뒷문의 형식’이나 ‘사춘기’와 같이 시를 거의 관념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두 선자는 당선작을 최종적으로 가리는 과정에서 유형화된 시적 틀에 갇힌 시라는 다소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관찰하는 한명원의 ‘조련사k’가 보여준 힘없는 맹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단단한 말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합의했다. 시라는 것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문정희·조정권 시인
2012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외계인을 기다리며
양해열
끽해야 20광년 저기 저, 천칭자리
한 방울 글썽이며 저 별이 나를 보네
공평한 저울에 앉은
글리제 581g*!
낮에 본 영화처럼 비행접시 잡아타고
마땅한 저곳으로 나는 꼭 날아가리
숨 쉬는 별빛에 홀려
길을 잃고 헤매리
녹색 피 심장이 부푼 꿈속의 ET 만나
새큼한 나무 그늘에서 달큼한 잠을 자고
정의의 아스트라에아,
손을 잡고 깨어나리
비정규직 딱지 떼고 휘파람 불어보리
낮꿈의 전송속도로 밧줄 늘어뜨리고
떠돌이
지구별 사람들
하나둘씩 부르리
*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또 다른 지구’가 골디락스존 (GoldilocksZone)에서 최근에 발견되었다.
2012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철이네 우편함
김영두
철이네 우편함은 강 이 편에 있습니다.
집배원 아저씨가 강 건너 오시는 게 미안해
이 편 강가 숲 속 소나무에 우편함을
달아 놓았답니다.
며칠에 한번씩 배를 타고 건너와
편지를 찾아가는 철이 아빠.
우편함 속에 할미새 부부가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하더니
알록달록 귀여운 새알을
낳았답니다.
철이 아빠는
옆 소나무에 바구니를 하나 달아놓고
글을 써 붙였습니다.
"집배원 아저씨, 편지는 여기에 넣어주셔요."
"우편함에는 산새가 새끼를 치고 있어요."
호기심에 살금 살금 다가가
우편함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솜털 보송한 새끼들이 어미가 온 줄 알고
노란 입을 짝짝 벌립니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얼른 뒷걸음쳐 도망쳤습니다.
어린 것들이 다 자라 날개가 돋치면
철이 아빠의 고마움을 부리에 물고
저 파란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습니다.
▶▶ 2012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니터 속엔 바다가 없다
김부회
파도가 눈에 밟혀 바다를 모니터에 욱여넣은 사내가 있다
바다의 푸른 치맛단을 들추던 저녁이면
사내의 뜨거운 귓바퀴 속에서
아프로디테의 은밀했던 이야기가 소용돌이쳤다
수평선 위로 태양이 붉게 달궈진 다리를 놓는다
주름진 자궁 속을 더듬던 사내의 두 눈
해변의 허리춤, 밀물에 떠밀려온 부품처럼
해안선을 그려 넣은 눈빛이 흔들거린다
간혹 먼 거리 거슬러온 운석들 마디마디
분절된 해변의 모래알을 깨우고
오래된 시간들 하나둘 쓰다듬으며 퇴적되어 갈 것이다
바다의 물빛을 구멍 난 가슴에 공그르며
잃어버린 기억을 제 뼈에 깊숙이 음각하는 사내
구름을 껴안고 산란하는 달, 달빛의 살점들과
별들의 가는 뼈가 바다의 내장으로 수장될 때
뮤 대륙* 사라진 도시 어디쯤 파헤치면
함께 수몰된 부장품들이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색 바랜 페인트를 벗겨낼수록 또렷하게 각인되는 기억들
바다를 이식한 모니터가 끝내 거품을 게워낸다
사내의 곁에서 안달루시아의 개**한 마리 컹컹 짖는다
* 기원전 70,000년 경 남태평양에 존재한 가상의 대륙
**살바도르 달리의 영화제목
[당선소감] 흑룡이 비상하는 한 해, 임진년의 여명이 붉다. / 김부회
얼핏 스쳐가는 지난 1년의 시간 속에서 지친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들을 시로 쓰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 본다. 가슴 설레게 다가온 당선 이라는 말, 앞으로 헤쳐 나갈 문학의 길이 두렵다는 생각이 앞선다.
할 수만 있다면 시린 밤하늘의 별자리들을 뚝뚝 떼어, 그 이름의 자음과 모음을 다시 조립한 낱말들에, 내가 알게 된 이 도시의 색을 채색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낡고 경직된 내 삶의 지난한 시간들에게 자성의 경각을 심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눌한 글에 생명을 불어주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 최정신 시인님, 마경덕 시인님, 박연휘님, 이종원님, 박영수님 등등 시마을 동인 문우 여러분 모든 분들의 격려와 부단한 조언, 그리고 끝없는 자기성찰에 의미를 부여하게 해 준, 가족과 시의 토양을 제공한 시마을 문우 여러분 모두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서툰 제게 당선의 영광을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박인과 선생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제 좀 더 치열한 공부를 하라는 격려에 부족하지 않게 최선을 다 하는 모습으로 보답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 할 뿐입니다.
▶▶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월면 채굴기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당선소감]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 같은 지금의 느낌을 기억할 것" / 류성훈
바다 건너에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라는 옛 검술이 있다. 그 창시자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다 한다.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오직, 다 버리고 초연하게 내던지는 무기로만 잡을 수 있다.”
아직 미숙한 내게 등단은 그런 식으로, 다소 비현실적으로 찾아왔다. 숨을 고르며 새삼 뒤돌아본다. 문학을 배우겠다고 덤빈 날이 어느덧 두 자리 햇수를 넘겼을 때, 내 앞의 시는 노력과 버림 사이에 있었고 초연함과 무덤덤함의 사이에 있었다. 그렇기에 희망이 없어도 캐어낼 순 있었고, 오랜 그늘 속에서도 사라지진 않았다.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로 내려앉은 것 같은 지금의 느낌을, 나는 늘 기억할 것이다. 또한 가깝고도 먼 그 간극을 ‘사이’가 아닌 ‘시’인 것이라고 뜨겁게 한 번 우겨보려 한다. 나의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만들어주신 분들, 부족한 내게서 재능보다 노력을 높이 보아주셨을 고마운 분들에게 언제 이 은혜를 다 갚을지 행복한 걱정이 앞선다.
문학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보살펴주신 김석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권혁웅 조연호 선생님을 비롯한 금요반 모든 시인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문우들에게 이 행복과 감사를 돌리고자 한다. 이젠 내가 이 따뜻한 빚을 갚아나갈 차례일 것이다. 그리고 늘 촌스럽지만 피해갈 수 없는 마음.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설치던 이 천덕꾸러기 아들에게 단 한 번의 반대도 불만도 없이 끝까지 믿음을 주셨던 부모님께, 차마 부끄러워 표현할 수 없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행복하게 전하고 싶다.
[심사평] "입체적인 상상력에 눈길,
수사의 과잉은 아쉬워" / 황지우. 정일근. 이광호.
시 부문 심사는 예심 없이 심사위원들이 투고작을 나누어 읽고 추천된 작품을 교환해서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춘문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보다는 서정적 화법으로 일상적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 된 작품은 '그늘말'(박하랑)과 '연애의 국경'(여성민), '월면채굴기'(류성훈)였다. '그늘말'은 투명한 감수성과 정갈한 언어들이 돋보이는 시였다. 생에 대한 따뜻한 태도와 언어에 대한 맑은 감각이 좋았지만, 함께 투고된 작품들을 고려할 때, 세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이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애의 국경'의 경우는 발랄하고 독특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연애'와 '국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언어와 형식상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된 '월면채굴기'는 우선 그 상상력이 입체적이고 화려하다. 아버지의 병과 생의 이야기를 아버지 몸속의 돌과 두개골과 달 뒤편 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매혹적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며 아버지의 병과 생애를 둘러싼 깊은 시선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다만 수사의 과잉이 있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극복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 쓰는 일이 외로움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에,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황지우(시인) 정일근(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산새
조정일
숨 멈추고
한 발
보고, 듣고,
숨쉬고
숨 멈추고
또
한 발
보고, 듣고,
숨쉬고
가랑잎 한 장
내려앉듯이
그 위로
빗방울 한 개
구르듯이
산새가 걸을 때
[당선소감] "선생님, 또 느껴도 돼요?" 한 아이의 말이 나를 깨워 / 조정일
있잖아요 사월에. 최순우 옛집 뒤뜰에서 볕 쬐는데, 어떤 선생님이 애들을 데리고 와요. 오 분 동안 봄 햇살 느끼고 시 쓰라고. "지금부터 말하는 사람은 시 하나 더 쓰기. 지난번에는 선생님 감동시킨 사람이 하나도 없어. 시작."
하니까 애들이 봄 햇살 느낀다고 요래조래 가만 앉아있어. 오 분 동안 말 안하고, 말 하면 시 하나 더 쓰니까. 나도 가만있었지. 부스럭거리면 방해될까봐 똑같이. 한 애는 해 보고, 한 애는 나무보고, 한 애는 담 쳐다보고, 오 분이 지났어.
이제 시를 쓰는데, 애들이 목소리 작게 묻는다. "선생님, 2연 4행으로 해요?", "바람은 아직 겨울바람이에요?", "화장실은 어디에요?" 다른 애들이 시 쓰고 있으니까 말을 소곤소곤 해. 애들은 시 쓰고, 난 계속 한쪽에 가만있고. 시는 더 오래 쓰잖아. 혼자 심심하고 궁금하지, 뭘 쓰는지. 그런데 성격이 내성적이라 못 물어보고 그냥 '아이들이 오 분 동안 봄 햇살을 느끼고 시를 쓴다.' 그렇게 수첩에 적었어.
그런데 애들 말 중에 진짜 웃기는 말이. "선생님, 시 쓰면서 또 느껴도 돼요?" 우리는 보통 그런 말 안 쓰잖아. 그런데 걔는 조금만 더 느끼면 좋겠는데 느끼는 시간은 끝났고, 자기 느낌은 안 끝나고. 어떡해. 일부러 안 느끼려고 참다가 안돼서 물었나봐. 된다 그랬지 선생님은. 그런데 나는, 느껴도 돼요 선생님 또 느껴도 돼요? 와 그 말이 정말.
봄이 새로 옵니다. 아버지, 어머니, 태선, 정호 그리고 지금 저를 떠올리는 분들 모두와 이 기쁨을 나눕니다.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총 55자 15행의 한 줌 언어로 생명과 자연의 심연을 보여줘/김용택,이상희
먼저,'무의식이 말을 할 때에는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는 J. H. 휠록의 말을 빌려 당선작 '산새'(조정일)를 세상에 내보이는 기쁨을 외치고자 한다. 총 190여명의 응모작을 읽어내면서, 예년과 다름없이 '동시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말의 잔치'라는 해묵은 오해에 거듭 시달리던 심사위원들은 응모 번호 172번에 이르러서야 수작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안도했다.
총 55자 15행의 한 줌 언어로 영성으로 가득 찬 자연과 우주의 심연을 보여준 이 시는, 산새와 함께 우리를 걷게 한다. '숨 멈추고/ 한 발// 보고, 듣고,/ 숨쉬고'의 긴장감 넘치는 리듬과 행과 행 사이의 무한 간극 또한 자연계의 질서를 그려낸 듯 거리낌이 없다.
맑은 시 정신을 보여준 '겨울 발자국' '노래' '이른 아침'(이상 김우섭), 재기 넘치지만 양감이 부족한 '투명한 말''등산'(김아삭)도 눈에 띄었다. 더욱 발전되고 완성되면 뛰어난 동시가 되리라 믿는다.
'산새'를 읽는다면 어떤 침략자도 황폐하고 남루한 삶의 주인공도 그 작고 가벼운 걸음과 그 걸음의 찰나를 숨 쉬면서 가랑잎과 빗방울의 낙하를 지켜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생명과 자연의 영성을 호흡하게 될 것이다. <심사위원 김용택(시인) 이상희(시인ㆍ그림책 작가)>
▶▶ 2012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링거 속의 바다
김영란
온 몸이 글썽거린다 아득한 바다냄새
어쩌면 이 신열은 오래 전의 길 하나 열어줄지도 몰라
세상은 바다가 낳은 미지근한 비망록일거라고
아니, 그 비망록이 낙서들의 끝에 부려놓은 삽화일거라고
네가 나른한 힘을 얘기했던 곳으로 지금 나는 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너의 힘을 빌려 나에게 이르지 못할 때마다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가 아닌
방금 전 내 몸의 한 모퉁이로 들어오던
링거액 같은 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잠깐의 외출로
조회할 수 있는 너를 믿지 않지
너의 웃음이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조난의 느낌 하나만으로
바람을 이끌고 오고 폭풍을 이끌고 와
끝내 범선 같은 고백을 숨겼던 것처럼
나 지금도 먼 옛날의 너를 믿지 않아
기억이란 몇 방울의 망각으로 걸어나갔던
오랜 신열의 발자국들
어디선가 때 이른 저뭄이 다가와
내 옆구리를 툭 친 것도
네가 나로부터 멀어지던 형식이었음을 기억하는 한 순간
내 통증의 한 쪽에서 고개를 드는 현실 하나
나는 잠시 링거액 건너편에 기대어 놓았던 목발을 챙겨
너의 바다가 보일 것 같은 창가로 절룩절룩 걸음을 옮긴다
[당선소감] 치열한 삶의 일부가 시로 흘러 / 김영란
기억의 모퉁이를 돌고 있는 쪽배하나, 포구로 튕겨져나간 조각들, 내 몸 속에서 떠다니며 글썽거리는 흔적들. 이 모두는 긴 겨울의 초입에서 거두지 못했던 시의 자리들이었다.
묵혀 놓았던 시들은 혼자 서러워했을까. 오랫동안 신열을 앓다가 만성이 된 구석진 자리의 염증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불혹을 넘긴 오후에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를 버려야 했다. 그리곤 병실에서 다시 바다를 꺼내야했다.
시대가 고통이었지만 어머니는 통증을 이겨내는 법을 터득하셨고, 아버지는 즐기는 법을 아셨다. 어쩌면 그 분들의 족적이 내게로 이어져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켠에 깃든 통증이 치열한 삶의 일부가 되어 시로 흐르고 있는지도. 가만히 더듬어보면 내 속에 흐르는 몇 겁에 걸친 흔적과 기억들이 내가 기억되는 나보다 훨씬 거대한 것 같다.
봄이 멀리 돌아 앉아 있었지만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창으로 들어온 달빛 때문이었다. 달빛은 우주였고 친구였고 가족이자 스승이었다.
나의 인생을 빚어준 이케다 선생님, 시의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해준 손택수 시인, 그리고 차령문학의 박경원 선생님, 온머리 송봉헌 선생님, 오래전 시의 길을 열어준 황금찬 선생님, 최두석 선생님, 문학세계와 영등포문인협회, 부족한 나의 곁에 있어준 현웅, 지원, 승민, 영미, 성남, 정한 모두에게 마음껏 감사하고 싶은 밤이다. 마지막으로 한라일보사에 감사드리며 심사위원님에게도 깊은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약력 : 1970년 부산 출생 동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형식적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 /
작품보다 작품 속의 영혼이 먼저 들여다보여서 감상이 순조롭지 못한 경우가 있다.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선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토록 다른 4인 4색의 영혼과 그 시력(詩歷)은. 고심하며 읽은 작품은 최재우의 '간이역', 김현의 '겨울의 안쪽', 황경철의 '공포의 기록',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였다.
'간이역'에서 최재우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노숙함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골대합실", "소달구지", "보따리"와 같은 소재를 통해 드러나듯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정겹다. 그러나 그는 그리 길지 않은 시력의 한계 또한 노정시키고 있다. '간이역'에서의 돌연한 장면 전환이나, 그의 다른 시 '포구'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분절 등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김현의 '겨울의 안쪽'은 세밑에 꼬옥 끌어안고 싶은 시이다. 서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능력은, 차고 낯설게 만연하는 시들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사적일수록 정제된 호흡과 리듬감을 견지해야 하는 법, 몇 군데 군더더기가 눈에 띈다. 따뜻하지만 너무 잔잔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황경철의 시들은 미숙하고 거칠지만 패기가 있다. 다만 추상적인 대상을 추상적으로 풀어내는 일이 그에게는 힘에 부친 듯하다. 자폐적으로 분산된 이미지들이 제어되지 못한 채 범람하고 있다. 시가 아물 수 있도록 그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깊어진 상처가 그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는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의 색채가 부족하고 소품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약점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의 시들은 작품들간의 격차가 드러나서 기우를 갖게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는 어려웠다. 모쪼록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나갔으면 한다. 숙련된 자의 출발점은 지금 다시 놓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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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신춘문예 시. 시조. 동시 당선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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