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도식과 1주기 추모대회 및 시선집 출간기념회 사진 위는 작년 장례식 때이고 사진 아래는 어제 열린 1주기 추모대회 및 시선집 출간기념회를 알리는 펼침막이다. | |
ⓒ 김형효 |
시인은 1917년 11월 10일 출생하여 작년(2013년)6월 12일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께서는 1943년부터 '지하협동단사건'. '학병거부사건' 등으로 수차례 피검되고 1년여 복역하시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동신일보>, <중외신보>등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47년 <민주조선>에 최초로 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1947년 7월 정신적지도자로 모셔왔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자 창작 및 모든 사회활동을 중지하시고 칩거에 들어가셨다. 이후 1980년 3월에 절필하신지 33년만에 창작활동을 재개하였다.
▲ 이기형 선생님 약력 작년 민족시인 이기형 선생님의 장례식 때 보고된 약력보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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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을 통하여 읽어내는 이야기들은 마치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나 나올 법한 멀고 먼 옛이야기들이다.
이런 옛이야기에서나 볼 듯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기형 선생님과 나는 1997년 나의 첫 시집<사람의 사막에서>를 통하여 인연이 되었다. 나의 스승이신 김규동 선생님께서는 시집을 내도록 추천의 변을 주시고 나중에 책이 나오자 몇몇 어른들에게 꼭 책을 보내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다. 물론 초짜작가인 나는 김규동 선생님께서 꼭 책을 보내라는 그 모든 분들에게 책을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신 이기형 선생님께는 책을 보내드렸다. 당시 나는 생활의 방편으로 생명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자본주의 심장인 보험회사에서 일하면서도 도저히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거나 익숙하지 않아 마지못해 살아가는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아침 7시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나, 이기형이오!" 난 바로 알아듣지 못해서 재차 누구신지 여쭈었다. "아, 나, 이기형이오!" 순간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전화기를 든 채 차렷 자세로 섰다.
▲ 이기형 시인 추모 시선집 살아계셨다면 올해로 97세이신 이기형 선생님의 추모시선집이 발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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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이다. 선생님은 당시 79세의 큰 어르신이었다. 더구나 생명부지 멀리서 겨우 이름만 알고 책을 통해서만 대하던 시인께서 막 첫 시집을 낸 내게 전화를 걸어주신 것이다. 너무나 벅차고 반갑고 기쁘고 어렵고 아무튼 그렇게 마음이 여러 갈래로 즐거웠다.
이후로 수많은 문학행사장에서, 선생님의 집에서, 거리에서 만나고 또 만났다. 그리고 사적으로도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 듣고 자주가 무엇인지, 민족이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평화 그리고 통일이 왜 필요한지 사사師事 받듯이 배운 날들이 여러 날이다.
십년 전이다. 내가 고향을 찾아 문학에 터전을 만들려 몸부림치던 날 삶의 길을 내고 살기 위해 힘쓸 때 강연초청에 응하셔서 무안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그날 밤 나의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머무셨다.
그때 이른 아침 찻잔을 드시며 말씀하시기를 "세상사 모든 진실은 간단하고, 거짓은 복잡한 것이다." 내게 주신 한 문장의 아름다운 시라는 마음으로 난 지금껏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언제나 늙지 않는 청춘이셨던 선생님께서는 통일이 오지 않으면 죽을 수 없다고 항상 꼿꼿이 걸어 다니셨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시었다.
▲ 1주기 추모사를 하신 선생님들 사진 좌로붙 권오현 양심수 후원회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민영 시인께서 추모사를 하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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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12일 작고하시기 전 불과 두세 달 전까지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던 선생님의 부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남성모병원 영안실을 찾아가던 걸음도 무겁지 않았다.
설마하면서 문상 길을 걸으면서도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85세에 어느 여름날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 손녀를 업고 손빨래를 하시던 선생님께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기다렸다는 듯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형효야! 내가 건강해야 통일을 보고 죽지, 난 통일이 되지 않으면 죽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난 건강해야 돼. 그러니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잠시도 허튼 순간이 없던 아름다운 순수청년시인 이기형 선생님의 1주기 추모대회에는 평소 선생님과 수많은 사연을 함께했던 100여 명의 시인들이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채웠다.
▲ 이기형 시인의 시를 후배 시인이 낭송 사진 위는 광주에서 올라오신 나종영 시인이고 사진 아래는 김창규 시인이다. 작년 장례식에도 함께 참석한 시인들은 이기형 선생님의 작품을 낭송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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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배시인 시낭송 홍일선 시인(사진위 좌)과 고규태 시인(사진 아래)은 추모시를 직접 써서 낭송했고 문창길(사진위 우)시인은 이기형 시인의 시를 낭송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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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를 옹호하고 민족을 배반하는 총리후보자의 망언 앞에 선생님의 빈자리가 더없이 크다. 그러면서도 한편 저 꼴을 안 보셔서 천만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선생님의 영면을 기원하며 순수민족통일청년시인이셨던 이기형 선생님의 시 한편을 올린다.
조국 시 사랑
약관의 가슴속 깊은 곳
조국과 시의 큰 꿈을 안고
죽음의 고개를 넘고 넘어
일흔이 되어서야
대망의 민족시인이 되었다.
분단이 풀리지 않는 한
늙지도 죽지도 않겠다.
통일시만 쓴다.
쪼개진 산하는 뒤틀려 구렁텅이서 허덕이고
백발이 된 피세월 눈시울이 뜨겁다.
조국이여
시여
사랑이여
늙을 수 없는 벅찬 가슴
새벽 첫차는 기적을 울렸다.
주체 못하는 힘의 발산
짙은 황혼을 걷어찬다.
태산을 향해 회춘을 거듭하며
준마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평화촌 삼천리를 달린다.
1주기 추모대회 하루가 지났다. 어제 행사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 듯 수많은 시인들께서 이런 저런 인연이 많을 것이란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선생님은 오래도니 옛이야기를 말하듯 잔잔하게 역사와 민족의 진로에 대해 가르치셨다.
몸으로 몸의 움직임으로 그렇게 선생님은 사시는 이유가 언제나 맑은 신심으로 통일과 민족을 바라보시는 눈길이 선하고 맑았기에 더없이 그리운 날이다. 어서 통일이 와서 평안히 잠드시길 다시 또 다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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