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

[스크랩] 문학상과 문인의 길들여짐

우또라 2017. 12. 12. 15:31

이규배, [12.12.17 15:27]
문학상과 문인의 길들여짐


우리가 물려받은 말의 그대로의 의미에서 보면
문학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다.
문학은 사회적 권력의 문제들에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 입문』, 김명환 외 공역, 창작과비평사, 1986, 34면
 


 위 이글턴 (문학이론 입문서)의 말이 우리에게는 이미 낡은 것이라는 수군거림은 그것이 결코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문인들에게는 이 말이 오래된 (입문서적)  ‘상식’으로서의 문학적 도덕률이거나 어떤 문인들에게는 이미 폐기되어 있으면서도 표면상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 (장식으로서의) 거추장스러운 도덕률이라는 의미로 수용될 것이다.
 “문학은 사회적 권력들의 문제들에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라는 전제가 참이라면 그 문학을 제도 / 관습으로서 사회화(상식화)하는 문학상은, 그 문학상이 담보하는 동시에 지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주체의 가장 깊은 무의식의 뿌리를 형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냉정한 해체deconstruction의 대상이 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문학은 이미 종교적 역할의 대안으로서 기능해 왔다. 근대 이후 서구에서는 제국주의 / 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근원을 형성케 하는 국민 / 민족문학의 이념으로 기능해 왔고, 우리와 같은 민족에게는 이것의 일부를 포함하는 한편 이것의 억압에 맞서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적 의미의 민족주의를 전제로 한 새로운 차원의 민족문학의 구축construction이었을 것이다. 물론 ‘민족nation’과 결부된 모든 문학은 인간구원의 보편과 영원을 배제해버린 채로는 존재적 가치가 즉각적으로 상실될 것이므로 (장식적으로나마) 인간구원의 아름다움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궁극적 구원을 내세우듯이 모든 문학도 인간의 궁극적 구원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엄밀한 의미의 차원에서는 성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특히나 그러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궁극적 구원이라 표방되는 목적은 현실과의 실질적 연관성 속에서 종종 얼마나 허황된 것으로서 작용되어 왔던 것인가.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서 모든 쥐들이 거리로 나와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이어서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시민들이 열병 속에서 죽어가기 시작할 때 정부가 한 일은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는 공문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20만 인구의 도시 오랑은 고립과 격리 속에 ‘지옥’으로 바뀌고, 속수무책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이것이 하느님이 내린 징벌임을 자각하고 죽음의 속죄로써 하느님에게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라는 신부 ‘파늘루’의 인간 구원의 궁극책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페스트라는 질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삶의 전부를 던져야 했던 오랑의 의사 ‘리유’에게 있어서 보다 악착같고 깊게 뿌리박힌 질병은 어쩌면 페스트가 아니라 현실과의 실질적 연관성을 상실한 ‘파늘루’의 ‘인간의 궁극적 구원’이라는 허학虛學으로서의 관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몹시도 음울했던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를 맞이하여 고양이와 쥐들이 거리에 다시 나타나고  페스트는 퇴치되었지만, 까뮈는 여전히 페스트는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것이 언제 어떻게 또 다시 우리를 엄습해올지 모른다고 쓰지 않았을까.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닙니다, 랑베르.”라고 의사 ‘리유’는 말한다.

 “파늘루 신부는 학자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리 운운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없는 시골 신부라도 자기 교구 사람들과 접촉이 잦고 임종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나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논증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할 겁니다.”
 (...)
 “어떤 여자가 죽는 순간에 ‘안 돼!’ 하고 외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나요? 나는 있어요. 그때 나는 절대로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 알베르 까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171면, 173면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1130~1200)가 천국과 지옥, 영생으로서의 신선 등 당대에 만연했던 ‘인간의 궁극적 구원’으로서의 종교를 허학虛學으로 규정하고 이를 퇴치해야 함이 실학實學 제일의 사명임을 천명한 것은 ‘문학’은 언제나 구체적 현실 연관성 속에서 인간구원의 문제에 천착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했던 의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예기禮記』의 한 장인 ‘大學’을 독립시켜서 『논어』‧『맹자』 등과 사서四書의 반열에 나란히 세우고 그 3강령 중 하나인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바꾸어 민중의 계몽을 강조했던 것이, 현실과의 실질적 연관성을 상실한 인간의 궁극적 구원이라는 ‘관념’은 현실의 지옥에 이미 발이 빠져 어느새 목까지 빠져들고 있음에도 그것을 결코 자각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종류의 ‘아편’일 뿐이라는 의미로 수용될 때 이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실을 추상화 하여 관념을 체계화함이 인간 고유의 본질인지라 절대로 이것들이 통째로 부정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이 현실과의 실질적 연관성을 상실하여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민중을 기만하고 억압하는 효율적 도구로서 작용하고 있다면 그렇게 구축construction된 문학은 냉정한 해체deconstruction의 대상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비록 그것이 고통을 잠시 위안할지라도 말이다.
 나랏님을 받들어 모시는 신민臣民의 나라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며 주체인 국민으로서 나라, 즉 국민/민족국가nation state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로 있다. 21세기 탈근대의 시기에 참된 의미의 근대성으로서의 내셔럴리티nationality는 아직 우리에게는 온전하게 확보되어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남과 북의 분단체제는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임이 실질로부터 극도로 추상화된 ‘낡은 상식의 관념’으로 탈바꿈되어 버리고, 우리의 근대성으로서의 내셔럴리티 확보가 어떤 ‘제국’의 내셔널리즘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이것에 저항하며 성장해 왔던 인류적 의미의 민족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탈근대주의로서 내셔널리즘-해체의 ‘서구적 풍조’를 우리 현실과의 실질적 연관성에 근원을 두고 주체화하지 못하고 다소간 성급하게 따라간 혐의가 짙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치사회적으로 식민주의를 극복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들 정신, 그 무의식의 뿌리에 서구 중심의 오리엔탈리즘이 깊게 내재화 되어 있다는 혐의 역시 깊이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의 내재화에 있어서, 참된 의미의 근대성으로서의 내셔럴리티를 온전하게 확보하지 못한 우리문학의 불완전성이 단단히 한몫 해 왔다는 것이 단지 견강부회에 불과한 것일까. 물론 이에 대한 반동형성의 작용으로서의 ‘반성’이 제기되어 지혜로운 조정 국면에 들어서 있다는 현실 역시 부인하지 못할 것이지만,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에게 불어닥친 탈-민족주의의 ‘유행’과 함께, 친일부역자이면서 우리 근현대문학의 내셔럴리티를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극도로 우상화하는 방향으로 기획 ‧ 왜곡해 왔을 뿐만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를 알제리의 도시 ‘오랑’처럼 폐쇄 ‧ 고립시킨 채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킴이 제일의 사명이어야 하는 군인들을 시켜서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깡패 전두환에게 찬송가를 써서 바친 서정주를 기념하는 문학상이 제정된 것이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진보적 / 민중적 민족주의 진영의 유력한 문인들이 친일부역자 서정주를 기리는 문학상의 심사위원이나 수상자로 참여함에 어떤 망설임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자신들의 유력함을 한 번 더 입증이라도 하듯 영광스러워하기까지 했던 점은 민족의 범주를 넘어서 인류적 의미에서 우리문학이 ‘젊음’을 급속도로 상실하고 ‘병’이 들어가고 있었다는 징후가 아닐까 회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 재화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금융자본이 스스로를 증식시켜나가는 권력의 ‘상금’에 문학의 젊음은 서서히 잠식되어 어느새 그 영혼까지 팔려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미당 서정주 문학상의 ‘권위’의

이규배, [12.12.17 15:27]
인정은, 아직도 온전한 의미에서의 내셔럴리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우리문학에 전염되고 있는 일종의 ‘페스트’에 비견해 봄이, ‘문학적으로’ 너무 가혹한 판정에 불과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록 유자儒者의 가정이라 해도, 재래 많이 별 비판 없이 끼리고 오던 불교적 인연설의 흔적이 뵈거니와, 이런 이치나 깊이 캐물어 차라리 한용운 선사나 같이 중이나 되었더라면, 소월의 이 한은 씻어졌을 듯하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서양류의 심미주의적인 맛을 어느 만큼 가했을 뿐인 한 사람의 한 많은 유교류의 휴머니스트였다.
- 서정주, 「소월 시에 있어서의 정한의 처리」, <현대문학> 1959년 6월, (김동욱 편, 『김소월』, 문학과지성사, 1980, 72면)

 소월이 개척한 근대시의 미학에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기보다 ‘저만치’ 뒤로 물러서서 과거로 돌아가서는 그 폭을 불과 몇 뼘만치 확장시켜 놓고는 스스로에게 최고의 ‘민족/국민시인’의 권위를 부여한 서정주의 소월에 대한 (거기에다가 슬쩍 만해 한용운까지 끼워 넣은) 위 평가는 얼마나 치졸하며 교활하기까지 한가. “문학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다. 문학은 사회적 권력의 문제들에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곰곰 되새겨
보지 않고서도, 근현대시문학사에서의 미당의 ‘권위’는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져 왔던 권력의 권위를 정당화 하던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해 왔음이 쉽사리 추론될 것이다. 당대 소월이 창조해 놓은 근현대시 미학으로서의 ‘전통’은 미당으로 이어져 혁신되었다기보다 백석, 정지용, 임화 등등으로 이어져 혁신되면서 그 폭이 확장되어 나아갔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낡아서 묵은 ‘지식’이어야 하지만, 21세기 미당문학상의 제정과 그 운영에 가담한 유력한 문인들은 탈-민족주의의 풍조와 더불어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면서 우리문학에서 급속도로 제거되었던 ‘진보에 반하는 불온한 민족 관념의 프레임’과 함께  ‘삶과 문학작품의 분리’라는 궤변을 논거로 하여 미당을 근현대 시문학사의 ‘국민시인’으로 부활시키는 데 일정 부문 성공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로 부활하면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논의가 머리를 들어 쳐나오고,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이룬 공을 그 과실에 반하여 평가하자며 기념관과 동상이 건립되고, 하물며 전두환의 경제성장까지 높이 평가하자는 논의가 제기되면서 지구적 차원에서 가장 이해가 불가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다가 탄핵되어 현재 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시키는 데 있어서 이른바 진보적 민족주의 진영의 문인들이 작품과 행동으로써 그 선봉에 서 왔으니, 비록 너무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친일부역문인의 그 ‘심미적 작품들’을 찬송해왔던 미당문학상 등등에 대한 한국작가회의(前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다음과 같은 입장 표명은 우리문학의 젊음과 그 정당성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반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과 관련한 문제는 작가회의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 정관> 제1장 총칙 제2조는 작가회의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본 법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 문학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독재권력 및 분단 체제의 모순과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성장해왔고, 투쟁을 야기하는 현실이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로부터 배태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찍이 작가회의는 미당의 친일ㆍ친독재 이력을 비판하며 미당문학상 제정을 반대했던 바 있다. 2001년 9월 11일 작가회의 지회들에서 연명으로 발표한 성명 「오도된 역사를 거부하며」는 그러한 내용을 집약하여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2002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공개하였던 친일문학인 명단은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해내는 계기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작가회의의 정신과 전통이 여전히 살아 약동하고 있음을 차제에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
 이러한 두 가지 원칙에 근거하여 내린 작가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작가회의는 회원들이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을 심사하거나 수상하는 데 대하여 특별한 조항을 만들어 강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 제정 및 운영과 관련되는 모든 사안이 작가회의의 전통 및 지향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은 웅숭깊게 성찰해야 한다. 따라서 작가회의는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과 관련된 심사, 수상 등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모든 회원들에게 권고한다.
 - 한국작가회의,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에 대한 한국작가회의 입장」, 2017. 10. 21

 그러나 한국작가회의는 여기에서 멈춰서 있을 것이 아니라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던 그 중심 분과였던 ‘민족문학연구소’를, 김동리 ‧ 서정주가 기획 ‧ 왜곡하여 왔고 그 후예들에 의해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도록 한 우리 근현대문학사의 ‘오도된 구축’을 해체deconstruction하고 그 실상에 맞는 근현대문학사를 학문적으로 재구축/복원reconstruction하는 활발한 행동으로 나설 수 있도록 부활 ‧ 가동시켜야 할 것이다. 인간이 ‘관념’이 아닌 것처럼 인간구원으로서 문학이 현실과의 실질적 연관성을 상실한 채로 그 문학적 순기능을 발휘하는 ‘가치로서의 미학’이 될 수 있음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우리문학의 ‘젊음’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던져졌다. 문학원론의 차원에서 좋은 시로 평가되는 미당의 시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호불호 평가가 가능하며 보장되어야 하는 한편 이것을 어느 일방의 힘으로 눌러 재단해 버릴 수 없음이 지극히 명백하지만 이제부터는, 문학성의 심연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고 미당문학상을 심사하거나 그 상을 수상함이 우리 현실의 뿌리 깊은 부조리를 양산하며 식민지적 정신 상태로서의 권력들, 그를 받쳐주는 이데올로기의  비겁한, 그리하여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왜소한 옹호자로 남게 될 것이다. 문학상, 그리고 그 상금에 길들여지는 무기력한 젊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현실의 구체적 문제들로부터 연동되는 문학본연의 인간 구원으로 나서는 건강한 젊음이 될 것인가는 우리문학의 ‘젊음’에게 선택의 문제로 던져졌다.       

 
2017년 12월 12일 문학과행동 편집위원회

출처 : 창작21
글쓴이 : 편집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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