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비판: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고
반경환
고은은 1933년 생으로서 어느 덧 고희古稀를 넘긴 시인이며, 올해로써 그의 詩歷은 48년째가 된다. 그의 저서들은 백두산, 만인보를 비롯한 대 서사시와 피안 감성, 濟州歌集, 문의 마을에 가서, 네 눈동자, 독도, 뭐냐, 두고 온 시 등의 시집과 이중섭 평전과 이상 평전, 그리고 수많은 산문집들로 나타나 있고, 그의 저서들은 인류의 역사상 최초이며 최후일 만큼 130여 권에 가깝다고 한다.
비록, 그의 저서들은 고은 자신도 다 기억해 내지 못할 테지만, 아마도 그것은 세계문학사 속의 기념비적인 업적이 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괴테문학상’이나 ‘셰익스피어문학상’보다도 더 훌륭한 ‘만해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수상하고, ‘노벨문학상’의 후보로까지 선정되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세계 12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노무현 정권마저도 자랑을 하고 있듯이, 이 대한민국은 ‘양적 신화’에 걸신乞神들린 사회이며, 그 ‘질’ 따위는 아무런 상관 관계도 없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시장에서 ‘대한민국의 브랜드’는 거의 그 존재 가치가 없는 실정인데도, 세계12위권의 경제대국이라니, 어쩌면 지나가는 개들조차도 한국산 제품들의 그 조악함을 비웃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 ‘양적 신화’의 한 복판에 서서, 백낙청의 말을 빌리면, 미당 서정주보다도, 김수영보다도 더 뛰어난 고은이 대한민국의 민족시인으로서 우뚝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고은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하여 온갖 로비와 그 추태를 다 연출해 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기념비적인 업적은 호머와 셰익스피어를 능가하고, 보들레르와 랭보와, 그리고 칸트와 헤겔과 니체마저도, 그 양적 신화의 차원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들로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 고은의 문학관과 그의 사상을 파헤쳐 보고, 그의 역사 철학과 도덕 감각이 마비된 파렴치한 추태들을 만 천하에 폭로해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재벌들이 온갖 부정부패와 부실공사, 그리고 정경유착의 특혜속에서 그들의 ‘문어발식 기업확장’을 도모해 왔듯이, 고은의 기념비적인 업적들마저도 한국문학사의 추태와 그 음화에 지나지 않는다. 백낙청은 하버드대학교의 영문학 박사이며, 창작과비평의 편집인이며, 서울대학교 영문학 교수이다. 또한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실질적인 교주이며, 고은의 영원한 동지이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창작과 비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얼치기 삼류비평가에 불과하다. 나는 이 백낙청을 「한국문학의 이론적 정립을 위하여」(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라는 글에서 비판을 한 바가 있다. 이 얼치기 삼류비평가마저도 고은을 한국문학사 속에서 미당보다도, 김수영보다도 더 뛰어난 시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고은 시선집, 어느 바람, 「발문」, 창작과비평사, 2002), 그러나 고은을 호머보다도, 셰익스피어보다도 더 뛰어난 시인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있다. 백낙청마저도 자기 자신이 삼류비평가이고, 고은도 삼류 시인이고, 대한민국의 문학수준도 삼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고은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은 거의 없고, 온갖 찬양일색의 글들만이 있는 실정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도 비판을 받고, 예수와 부처마저도 비판을 받고 있는 데, 세계적인 삼류 시인 앞에서 비판의식을 무장해제당하다니, 오오, 이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그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지지리도 못난 인간망나니들이란 말인가?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는 대한민국의 암적인 종양이며, 바로 그 암적인 종양을 육성해 내고 있는 제일급의 인사들이 고은과 백낙청과도 같은 지식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고은이 그의 스승, 미당 서정주를 비판하는 글에서, “천도天道도 옳으냐 그르냐를 물어야 하거늘 지상의 한 시인이 남긴 것들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미당 담론」, 창작과비평, 2001, 여름호)고 말했듯이, 그에게 똑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수준높고, 더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자 한다.
고은은 「광장 이후」(어느 바람)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지금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광장의 이데올로기는 끝났다
흩어진 지 오래
그해 120만명의 사람 하나하나는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흩어진 지 오래
저마다 돌아가
혼자인 누에집에 들어가 있다
사랑하는 싸이버 속에 들어가버렸다
어느날 밤
누군가가 뛰쳐나와 소리쳤다
아 독재가 있어야겠다
쿠테타가 있어야겠다
그래야
우리 무덤 속 백골들
분노의 동정童貞으로 뛰쳐나오리라
하루 열두번의 잠 때려치우고 누에집 뛰쳐나오리라
그래야 텅 빈 광장에 밀물의 짐승들 차오르리라
지금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아무도 미쳐버리지 않는데
가랑비가 내리고 차들이 가다가 막혀 있다
그러나 옛 친구들이여 기억하라
이 광장이 우리들의 시작이었다 언제나
아마도 인간은 환경(구조)의 지배를 받고, 환경(구조)은 그의 사상과 이념, 혹은 그의 성격과 취향마저도 고착화시켜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란츠카프카의 소설의 세계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의 결과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준다. 「광장 이후」의 세계도 예외는 아닌 데, 왜냐하면 ‘광장의 이데올로기 시대’는 끝이 났지만, 그 이데올로기에 고착되어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정신분열증의 환자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은은 지난 날 ‘군사쿠테타’와 ‘군사독재정권’의 타도를 위해 그처럼 오랫동안 싸워왔으면서도, 이제는 오히려, 거꾸로, “아 독재가 있어야겠다/ 쿠테타가 있어야겠다/ 그래야/ 우리 무덤 속 백골들/ 분노의 동정으로 뛰쳐나오리라/ 하루 열두번의 잠 때려치우고 누에집 뛰쳐나오리라/ 그래야 텅 빈 광장에 밀물의 짐승들 차오리라”고, 그 군사쿠테타와 군사독재정권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정신분열증은 ‘밀실공포증’의 소산이며, 거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고은의 존재 이유는 그 독재자들과의 싸움 자체에 있었던 것이지, 오늘날의 만인평등과 민주주의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만인평등과 민주주의는 그 싸움의 장식일 뿐이었던 것이지, 고은이 진정으로 군사쿠테타와 군사독재정권의 타도를 위해서 투쟁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만인평등과 형식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는 오늘날, 그처럼 군사쿠테타와 군사독재정권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120만명의 사람들’, 즉 자유로운 개인들을 ‘사이버 공간’에 갇힌 한 마리의 누에들로 폄하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의 삶이 군사쿠테타와 군사독재정권시절보다도 더 추악하고, 또 우리 인간들의 자유는 더욱더 억압되어 있단 말인가? 밀실공포증에 시달리면서 ‘광장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고은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이 땅의 사람들은 지난 시절보다 더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보다 더 나은 질적인 삶을 향유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진정으로 개인의 꿈과 희망을 추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사상과 이념의 차원에서 세계정복운동을 꾀하고,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문화의 제국을 건설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처럼 중요하고 또 중요한 이 시기에, 지난 날의 민주화운동의 선구자이자 민족시인인 고은이 한 마리의 누에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고, 그 시대착오적인 ‘광장 이데올로기’는 그가 얼마만큼 기계적인 인간으로서 환경의 지배를 받아 왔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는 환경과 습관과 사상과 이념(‘광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정신분열증의 환자이며, 군사쿠테타와 군사독재자와의 ‘치정의 삶’을 살아온 더럽고 추악한 인간이다.
김대중 정권의 실정은 이미, 이처럼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제의 IMF와 정신의 IMF를 맞이하여 모든 인간들의 실존의 근거와 존개의 근거가 모조리 다 무너져 가고 있는데도, 자유로운 개인과 문화선진국의 삶보다는 ‘광장 타령’이나 하고 있는 냉전 시대의 인간들, 그리고 그 광장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던 자들이 연출해 냈던 군사독재정권시절보다도 더 추악하고 더 부패했던 김대중 정권, 고은은 김대중 정권의 ‘정신분열증 환자’로서 이처럼 역사 철학(사상)의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만일, 어느 신자가 그의 사제보다도 더 뛰어나다면, 그는 더 이상 그 사제를 거들떠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만일,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더 이상 사제계급들은 그 설 땅을 잃게 될 것이고, 따라서 모든 사제계급들은 그 신도들을 언제나 어린 아이의 상태로, 혹은 미성년의 상태로 묶어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러서 맨 처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신부는 파문을 당했다고 하는 데,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들이 사제의 특권을 침해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오늘날에도 이 사제계급들은 더욱더 어려운 학습과정과 자기고행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데, 왜냐하면 그의 신도들이 언제나 자비롭고 친절한 사제의 손길을 필요로 하게끔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반대방향에서, 대한민국의 민족시인이자 영원한 사제인 고은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더욱더 ‘역사 철학의 감각’이 마비되라고 그 매혹적인 타락의 손길을 펼쳐오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난한 역사이고 싶습니다/ 거룩한 것/ 그런 것 없는 역사이고 싶습니다/ 저녁 연기 나는 마을과/ 이웃마을들의 이야기이고 싶습니다/ 달밤 다듬이 소리면 아주 그만이겠습니다// 단군께서 계신 역사/ 왠지 무겁기만 합니다 납덩이이기만 합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고/ 널리 누리와 나라를 이롭게 하고/ 널리 억조창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야/ 어찌 바라는 바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큰 역사보다 심신 낮춰/ 가난한 역사이고 싶습니다/ 너무 강한 것/ 그런 것을 겨루는 역사 아니고 싶습니다”라는 「단군릉」(어느 바람)이라는 시가 그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열등함을 자각하고 있는 인간이며, 그는 그 열등함을 의식하고 있는 그만큼, 가장 교활하고 영악한 인간이 되고 만다. 고은이 단군 이래의 ‘홍익인간’과 ‘부국강병’의 염원을 거절한 채, ‘가난한 역사’와 ‘거룩한 것/ 그런 것이’ 없는 역사를 추구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은은 자기 자신이 이미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뼛 속 깊이 자각하고 있고, 또한 그의 두뇌로는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두뇌를 양성해낼 수 있는 천재 생산의 교수법----알렉산더와 나폴레옹과 호머와 셰익스피어와 괴테와도 같은 세계적인 대 영웅들을 양성해낼 수 있는 교수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가 홍익인간과 부국강병의 염원을 거절한 것은 이와 같은 열등의식의 소산이며, 따라서 이 땅의 민중들에 대한 선호는 언제나 자비롭고 친절한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그 신도들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과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고급문화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 철학의 감각이 마비된 자이며, 다른 한편, 자기 자신의 역사 철학의 감각이 마비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뼛 속 깊이 깨닫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세계적인 역사 철학의 감각을 따라잡을 수는 없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더없이 교활하고 영악한 인간이 되고 만다.
즉, 고은은 자기 자신을 대한민국의 안에서 만큼은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으로 인식(오인)시키기 위하여, 우리 한국인들 전체를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태로 묶어두려고만 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 이래의 홍익인간과 부국강병의 염원을 거절하고, 가난하고 거룩한 것이 없는 역사를 추구하는 저 정신분열증 환자의 속셈이 바로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가난하고 거룩한 것이 없는 역사를 추구하는 고은의 말을 좀 더 확대 해석해 본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언제나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가야 하고, 영원히 이민족들에게 짓밟혀 버린 노예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우리 한국인들의 지식 정도는 기껏해야 고은보다도 턱없이 미치지 못해야만 하고, 따라서 고은이 ‘광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자로서 군사독재정권과의 ‘치정의 삶’을 살아온 것마저도 영원히 알아차려서는 아니 된다. 고은은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스스로, 자발적으로,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철두철미하게 무장해제시키고 있는 자이며, 서정주의 친일행위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충성보다도 더욱더 교활하고 영악한 민족의 반역자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일정도로 수많은 저서들을 자랑하고, 남북정상회담의 자리에서 ‘축시’를 낭송할 정도로의 민족시인인 고은, ‘아버지 살해’가 문화를 움직여 가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듯이, 서정주에 대한 도덕적 칼날을 들이댔던 저 민주화운동의 대명사, 호머보다도, 셰익스피어보다도, 괴테보다도 더 뛰어난 업적을 지니고도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해서 안달이 났던 고은----. 아아, 이 대한민국의 자랑인 고은이 어떻게 지난 날의 군사독재정권을 그리워하고, 가난하고 거룩한 것이 없는 역사를 꿈꾸는 정신적 괴물이 되었단 말인가?
돈과 명예와 권력 등, 그 모든 것을 다 움켜쥐고 이 세상의 모든 지구촌을 제 멋대로 넘나들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족시인이 ‘가난하고 거룩한 것이 없는 역사’와 이 세상의 삶을 저주하고 헐뜯는 염세주의의 사상가라면, 과연 여러분들은 그 디룩 디룩 살찐 돼지의 말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을 꿈꾸고, 호머보다도, 셰익스피어보다도, 괴테보다도, 알렉산더와 나폴레옹보다도, 예수와 부처보다도 더 위대한 인간의 출현을 꿈꾼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사상의 신전을 꿈꾸고, 더없이 거대하고 화려한 영원의 제국을 꿈꾼다. 나는 저 교활하고 영악한 인간,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이기는 커녕 민족시인의 근처까지도 올라가지 못한 인간을, 역사 철학의 이름으로, 그리고 도덕 철학의 이름으로 이 대한민국에서 추방을 해버리려고 이 글을 쓴다. 그의 「미당 담론」은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는 目不忍見의 극치에 해당된다. 역사 철학의 감각이 마비되면 도덕감각이 마비되고, 도덕 감각이 마비되면 자기 반성과 성찰은 커녕, 모든 수치심을 잃어버리고 함부로 날뛰게 된다.
1, 그럼에도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는 사실이다. (......) ‘죄인’ ‘천치’는 시의 진정성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은유이지만 그것은 강렬한 수사修辭이지 깊은 자기 성찰이나 회개의 아픔 같은 것에는 이르지 않는 추상으로 된다.
2, 그러므로 미당 시의 자유는 정의나 현실설정에 대한 의무가 거의 필요없는 책임부재와 손잡은 이미지의 원초적 반복성으로 나아가는지 모른다.
3, 이런 시세계와 함께 순수문학의 행방인 권력의존적 생존이 다시 진행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일제든 해방 이후의 집권세력이든 권력의 편에 존재함으로써 시인의 특장인 음풍농월의 가락 속에서 일신의 안보安保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은, 「미당 담론」에서
고은의 「미당 담론」은, 이제 ‘리얼리즘 혹은 참여문학’의 역사에 순수문학의 백년의 성과를 덧붙이고, 그것을 한국문학사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지양해 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그의 「미당 담론」은 ‘천도天道도 옳고 그름을 따져봐야 한다’는 대 전제 아래, 미당의 ‘권력의존적 생존’을 비판하고 있는 글이며, 그것은 이 대한민국에서의 ‘삶과 문화의 정체성’을 담보해 내기 위한 더없이 날카롭고 예리한 도덕 감각의 칼날이기도 한 것이다. 미당은 체질적으로 수치심이 결여된 인간이며, 자기 성찰이나 회개의 아픔이 없는 책임 부재의 인간이며, 그 상대가 일제이든, 해방 이후의 집권세력이든 언제, 어느 때나 권력의존적인 인물이다. 제 아무리 미당의 문학적 성과가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적극적인 친일 행위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무조건의 충성은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고은의 도덕 감각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의 「미당 담론」은 결코 ‘아버지 살해’의 ‘명장면’이 될 수가 없다. ‘아버지 살해’란 쇼펜하우어가 그의 스승인 헤겔에게 ‘정신적 괴물’, ‘이류 철학자’, ‘찬미를 매음한 사기꾼’(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집문당, 1994)이라고 그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바가 있듯이, 모든 문화를 움직여 나가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헤겔 비판은 ‘아버지 살해’의 ‘명장면’이 될 수가 있지만, 고은의 미당 비판은 ‘아버지 살해’의 ‘명장면’이 될 수가 없다. 거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데,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는 그의 스승인 헤겔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것이지만, 고은의 미당 비판은 미당의 사후에, 그 미당의 시체에다가 그 더럽고 추악한 흉기의 칼날을 꽂았기 때문이다.
만일, 미당의 적극적인 친일 행위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무조건의 충성이 그렇게도 못마땅한 것이었다면, 미당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을 때 그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야 했던 것이지, “스승과 제자라는 조선 사림士林의 유습 그대로”(「미당 담론」) 묵묵히 수수방관하고 있다가 그의 사후에야,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그 더럽고 추악한 흉기의 칼날을 꽂아댔다는 것은 그의 도덕 감각의 마비만을 압도적으로 인식시켜주고 있을 뿐 것이다.
고은의 「미당 담론」은 이처럼, 아니 이밖에도 수많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첫 번째로, ‘미당 비판’의 옳고 그름의 문제는 미당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 또는 ‘49재가 지났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이닌데도, 고은은 그의 스승이 두 눈을 뜨고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즉 현행범일때는 그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 못함으로써 스승과 제자 간의 불꽃이 튀는 논쟁과 그 잘못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한 것이고, 또, 두 번째로, 그 ‘아버지 살해’의 ‘명장면’이 연출되지 못함으로써 미당의 반윤리적인 행태들이 그것을 혐오하고 있는 고은에게 고스란히 ‘부메랑 효과’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그 ‘아버지 살해’의 ‘명장면’이 연출되지 못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도덕 감각의 타락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일 것이다.
고은은 그의 스승인 미당보다도 더 선천적으로 수치심과 자기 절제력이 결여된 인간이며, 보다 더 강력한 권력의존적인 삶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이 말은 결코 우스개나 농담의 말이 아니다.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지적 민감성과 도덕 감각으로 고은에게 이렇게 묻고자 한다.
고은은 왜 미당을 비판하듯이, 이 땅의 글도둑질의 대가들, 즉, 백낙청, 유종호, 김현, 김치수, 김우창, 김윤식에게는 그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왜 그는 지난날의 군사독재정권시절보다도 더 더럽고 추악하게 타락한 김대중 정권에게는 그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글도둑질은 매우 파렴치한 범죄행위이며, 그 주체자와 그 모든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마저도 타락시킨다.
백낙청은 루카치를, 유종호는 엘리어트를, 김현은 프로이트와 르네 지라르와 바슐라르를, 김윤식은 루카치와 가라타니 고진을, 김우창은 발터 벤야민을, 그리고 그들은 그것 이외에도 수많은 서구의 사상과 이론들들 무자비하게 베껴먹고 또 베껴먹었다는 사실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김대중은 부정부패의 화신으로서 수많은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이외에도 그의 세 아들마저도 부정부패의 나락으로 끌어들이고, 끝끝내는 검은 돈의 댓가로 남북 정상회담을 사고, 또 그 검은 돈의 댓가로 ‘노벨평화상’을 매수했다는 영예롭지 못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장본인일 뿐이다.
전자는 고은의 영원한 동료들이기 때문에 모든 잘못들을 덮어주어야만 하는 것이고, 김대중은 고은의 영원한 동지이기 때문에, 또한 그 모든 잘못들을 덮어주어야만 한다는 것일까?
고은은 왜 그의 동료들의 파렴치한 글도둑질의 행위는 고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왜 그는 김대중 정권의 부정 부패의 행위에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로만 일관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 살해’의 ‘명장면’을 연출해 내지 못한 사회는 죽어버린 사회이며, 모든 인간들의 영혼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고은의 130여권이 넘는 저작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그는 왜 그의 대표작이나 대표작품집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나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쓰레기 더미 속의 ‘양적 신화’를 떠올려 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술가의 진정한 자부심의 하나인 절제력을 결여한 인간을 생각해 본다.
‘시여, 침을 뱉어라!’ 적어도 고은은 김수영의 이 ‘만고불변의 진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듯이, 미당 비판을 감행했다.
그의 미당 비판은 비판의 정수를 벗어난 비판이며, 어디까지나 ‘曲學阿世의 비판’이다. 나는 미당의 문학적 성과를 손톱만큼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고은은 미당 못지 않게, 아니 미당보다도 더 더럽고 추악하게 수치심과 절제력이 결여된 인간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권력의존적인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네 스스로 입법원리로서 행위하라’. 고은은 칸트의 윤리학에 비추어 볼 때에도 서정주를 비판할 자격이 없는 데, 왜냐하면 그는 동시대의 반항아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들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눈 앞에는 남북정상회담의 자리에서 ‘축시’를 낭송하던 민족시인의 모습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서정주의 적극적인 친일 행위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무조건의 충성은 시인으로서의 그의 존재의 근거를 무화시키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고은의 ‘김대중 정권’과의 유착관계 역시도 고은의 존재의 근거를 위태롭게 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대한민국의 독립을 우리 스스로가 쟁취해낸 것이라면 미당 서정주를 사형시키지 않았을 애국지사는 없었을 것이다.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던 프랑스나 오늘날까지도 나치의 잔당들을 찾아서 전 세계의 방방곳곳을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이 그것을 시사해 준다.
고은은 김대중 정권이 탄생을 했던 바로 그 순간, 그 김대중 정권의 탄생에 기여했던 만큼, 그 단절을 기도해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걸신 들린 괴물처럼, 김대중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전리품을 마구잡이로 뜯어먹기에 바빴던 것이다.
시인이란 동시대의 아들이고자 할 때 타락하게 되고, 그 시대에 온몸으로 항거할 때 그 영광의 월계관이 씌워지게 된다. 동시대를 비판함으로써 그 시대에 참여하고, 그럼으로써 미래의 희망을 이끌어낸다는 것, 이것이 모든 시인들의 사명인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고은의 130여권의 저서는 ‘문어발식 기업확장의 문화적 측면’이며, 그것은 그의 역사 철학과 도덕 감각의 마비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민족시인이자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으로서의 고은의 교육관과 그의 염세주의(허무주의) 철학의 전모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고은은 1999년도에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고, 그것은 김대중 정권이 그에게 특별히 배려했던 여러 시혜들 중의 하나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하버드대학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교이고, 또한 그 이름과 그 명성에 걸맞게 세계에서 공부의 양이 가장 많은 곳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버드대학교의 학생들은 모두가 공부벌레들로서 강의실 복도나 식당, 그리고 서점의 통로에서마저도 아무데나 주저앉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 대학의 교수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루에 열 시간씩, 열 두 시간씩, 학문 연구에 전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하버드대학교는 세계적인 대 석학들의 양성소가 되고, 그들의 사상과 이론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고은이, 비록, 대한민국에서는 민족시인의 칭호를 얻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도저히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 같다라는 절망감 속에서, 그 절망감을 은폐한 채, ‘무위자연’으로서의 ‘염세주의’(허무주의) 사상을 이렇게 역설해 놓고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사상의 노예로 살아온 사실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독일의 관념론이 말하는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집인가를 따져볼 일이고, 전후 실존주의와 오늘날의 들뢰즈가 세상 사람에게 얼마나 삶의 진정성에 이바지하는가에 대한 반성도 있어야 합니다.
요컨대 2천년 전의 플라톤의 2분법에 시대마다 각주를 다는 것으로서 신플라톤 학파였고 데카르트였던 것 아닌가요. 사상들은 사람에게 제법 공헌한 것도 많지만 사람에게 그 이상으로 헛수고를 하게 했고 그 이상으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사의 적당한 시기는 이런 사상이나 신념 체계가 가라앉은 무위가 간절히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여러 놀라운 경전이나 교과서들의 절대 전위, 그리고 그 무오류성들이 맥 못쓰는 생명의 주체적 허무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자유 말입니다. 교조나 교의가 없는 그런 하잘 나위 없는 샤먼의 낫놓고 기역자 모르는 영감靈感이 인류의 궁극적 지혜인지 모릅니다.
----고은, 「고은의 하버드 편지」(중앙일보, 1999, 9, 22)에서
그렇다면 고은은 왜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로 간 것이며, 그는 거기서 무엇을 강의했고, 또 무엇을 배우고 있었던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고은의 하버드대학교의 객원 교수라는 직함은 속빈 강정에 불과하고, 그가 그곳으로 간 것은 교양의 속물로서의 서구 숭배사상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민족시인이자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인 고은이 하버드대학교에서 세계 최고의 석학들과 그 천재들에게 서양 사상의 공허함을 비판하고 동양의 염세주의(무위자연의 철학)를 강의했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그 사실을 믿고 인정할 수가 있겠는가?
단 한 줄의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독일의 관념론도, 플라톤의 철학도, 실존주의도 모르는 고은이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로서 그 명예와 명성을 드높였다면, 과연 여러분들은 그 사실을 또한 믿고 인정할 수가 있겠는가?
만일 고은이 플라톤의 국가론을 제대로 읽었더라면 서양 철학의 기원에 플라톤의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서구의 사상은 ‘플라톤의 2분법에 각주’를 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부로 폄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고은이 칸트의 비판철학과 헤겔의 절대정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니체의 건강한 염세주의 등, 독일의 관념 철학과 그 문맥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감히 ‘독일 관념론의 아집’을 말하기 이전에, 그 관념 철학의 업적이 얼마나 기념비적인 것인가를 역설해야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이상적인 공화국에 우리 인간들의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플라톤, 그의 비판철학을 통하여 형이상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우리 인간들의 순수이성과 실천철학과 미학을 완성하고자 했던 칸트, 이 세계를 자기 속성으로 인지하여 전유하는 것만이 정신의 자기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던 헤겔, 공정한 부의 분배와 만인평등을 외치며 공산주의 사상을 부르짖었던 마르크스, 우리 인간들의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고 염세주의 철학을 역설했던 쇼펜하우어, 또, 그리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인간들의 삶에의 의지를 옹호하고 디오니소스적인 정신(비극의 정신)을 역설했던 니체----. 나는 나의 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이라는 책에서,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사상이란 최고의 목적이며 그 모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이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사상만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지식인들의 한결같은 꿈이다.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이다”라고, 역설한 바가 있다. 나는 「고은의 하버드 편지」는 서구 사상의 역사 철학의 문맥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채, 얼치기 앎의 무식함으로, 자기 자신의 염세주의(허무주의) 사상만을 도배해 놓은 아주 사악한 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밖에도 「고은의 하버드 편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점들을 던져주고 있다.
첫째는 그가 하버드대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그 목표가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가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들로부터 학문의 목표와 그 연구 자세를 배우려는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는 그 무의지, 무목표, 무책임의 결과로써 모든 사상이 다 허무하다는 식의 비판을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세계 최고의 석학들과 그 천재들이 학문 연구를 하고 있는 하버드대학교는, 서구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자들이 공공연히 세계정복운동을 꿈꾸는 사악한 곳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인들은 모두가 다같이 사상의 노예들이며, 그 사상의 노예를 벗어나는 길은 그들의 ‘놀라운 경전’과 ‘교과서들’을 버리고 동양의 염세주의 사상(무위사상)으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고은의 서구인들과 서양 사상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어떤 충격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제3세계의 지식인들의 원한 맺힌 저주 감정처럼, 너무나도 낡고 낡은 말에 불과하며, 그 따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비판을 하기 위하여 고은이 하버드대학교로 몸소 날아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고, 바로 그 지점에서 고은의 서구 숭배사상이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버드대학교에서의 그의 직함은 제3세계의 지식인으로서의 目不忍見의 그것에 불과하지만, 그 속사정을 전혀 알 길이 없는 이 대한민국의 어중이 떠중이들에게는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라는 직함 자체가 마법의 보물상자처럼, 그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졸 중퇴의 학력이 전부이고 단 한 줄의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고은이 하버드대학교의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동양의 ‘염세주의 사상’을 강의했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도 경외로운 기적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고은의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라는 직함은 서구의 지식인들에게는 실소와 조롱의 대상에 불과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불멸의 금자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은의 서양에 대한 혐오는 서양에 대한 숭배이고, 그의 반미는 교묘한 친미이다.
대한민국의 민족시인이자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으로서의 고은의 교육관이 모든 학교의 이성을 거절하고 무위자연의 염세주의 사상을 역설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바로 그의 교육관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 되고, 오직 이 세계의 종말과 우리 인간들의 종말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아, 돈과 명예와 그 모든 권력을 다 움켜쥐고 있는 고은이여,
만일, 그대가 염세주의자라면, 마치, 저 일본인들이 수없이 할복자살을 감행한 것처럼, 왜 그대는 무엇을 더 바라고 할복자살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김대중 정권의 실정----나는 이것만으로도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할복자살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은이여, 그대는 김대중 선생이 그토록 실정을 했는데도, 전혀 일말의 죄책감조차도 없단 말인가?----이나 그대의 도덕 감각의 마비는 순교의 기회로 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단 말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민족시인이자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으로서의 고은이, 적어도 하버드대학교에 간 이상, 우리 한국인들의 교육의 목표와 백만 두뇌의 양성의 교수법을 배워왔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교육은 백만 두뇌의 양성이며,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정복운동에 그 정점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니체, 마르크스, 칸트, 헤겔, 하이데거, 호머, 셰익스피어, 괴테, 보들레르, 랭보 등이 바로 그 교육의 성과이며, 그리고 그러한 위대한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건강해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문명과 문화가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엉덩이에 뿔난 소는 도축을 하고, 또 불량식품들은 소각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엉덩이에 뿔난 인간 망나니는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아아, 고은이여,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을 비웃듯이, 모든 기초생활질서가 다 무너지고 쓰레기 천국이 되어버린 이 대한민국을 생각해 보고, 또 그대가 살아가고 있는 안성과 대림동산은 얼마나 깨끗하고 과연 쓰레기가 하나도 없는가를 생각해 보아라!
내가 대한민국의 교육개혁과 백만 두뇌의 양성을 그토록 부르짖고 있는 것은 그릇된 교육을 받으면 역사 철학과 도덕 감각이 마비되고, 곧바로 ‘아버지 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일찍암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은의 ‘무위사상’, 혹은 염세주의 사상도 하나의 사상이며, 그 사상의 이름으로 서구의 사상을 비판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도 않는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고은은 염세주의의 창시자도 아니며, 다만, 염세주의 사상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리고, 서구의 사상에는 실레노스와 쇼펜하우어처럼 동양의 염세주의 사상이 뿌리 깊게 퍼져 있고, 그들이 고은을 통하여 그 사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거룩하고 고귀한 역사’를 꿈꿀 수가 없었던 인간이, ‘가난하고 거룩한 것이 없는 역사’ 속에다가 그 둥지를 마련했듯이, 염세주의는 서구의 사상을 따라잡을 수가 없는 인간이, 이 지구촌에서 최후로 마련한 도피처일는지도 모른다. 고은의 염세주의 사상은 ‘가난하고 거룩한 것이 없는 역사’와 그 문맥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한국인들에게 ‘가난하고 헐벗고 착하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한국인들이 가난하고 헐벗고 착하게 살아갈 때만이 서구인들은 고급문화인으로서 살아갈 수가 있고, 고은은 적당히 이 대한민국의 민족 시인----우리 한국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민족시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 때만이, 그는 교묘한 친미주의자들처럼, 돈과 명예와 모든 권력을 다 움켜쥐고 이 지구촌 방방곳곳을 떠돌아 다니면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아니 허무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수치심과 자기 절제력이 결여된 인간이며, 역사 철학과 도덕 감각이 마비된 인간이다.
교육자로서의 고은, 염세주의 사상가로서의 고은이 하버드대학교에서 우리한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를 나는 듣고, 또 듣는다. ‘무식하고 또 무식하게 살아라. 모든 학문과 모든 사상은 다 허무한 것이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샤먼이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최종적인 인간이란다’. 어쩌면 고은은 그렇게도 대한민국의 우리 학자들과 똑같은 목소리를 낼 수가 있는 것이며, 오직 자원빈국의 국가로서 하루바삐 교육개방을 서두르고 국제경쟁력을 기르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인 이 시기에, 왜 반 교육개혁주의자로서의 염세주의의 타령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고은은 왜 그의 말과는 정반대로, 그토록 부유하고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또한 왜 그토록 둔한 머리로 세계 방방곳곳을 찾아다니며 좀 더 배우지 못해서 안달이란 말인가?
아마도 고은의 염세주의는 차마, 그 부귀영화를 다 던져버리고 죽어갈 수가 없는 노인네의 안타까움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고은은 역시 미당 서정주의 제자답고, 가히 그의 지혜는 교활하다 못해 영악하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가 않다’라는 나의 말에는 낙천주의자로서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고, 삶은 죽음의 완성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죽음은 한계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언제나 열려 있다. 이 자연스러운 죽음을 행복한 삶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그 죽음 앞에서 한 움큼의 허무만을 움켜쥐고 있는 고은이, 과연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이 되어갈 수가 있는 것일까?
고은은 속물근성의 화신으로서 동물적인 행복에 푹 빠져 있고, 그의 육체적인 노쇠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죽음이 몹시 서럽고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고은에게서 역사 철학과 도덕 감각의 마비와 반 교육자로서의 면모와 염세주의의 망령들만을 되풀이 읽고 또 읽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아, 대한민국의 모든 시인과 지식인들이여,
고은의 모든 저작들을 무시하고 짓밟아버리고, 또, 그리고 무자비하게 불살러 버리며,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세계적인 대 서사시인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수천 년 동안 이역만리를 떠돌아 다녔으면서도, 언제, 어느 때나 좌절과 절망을 몰랐던 유태민족들처럼, 그 뜨거운 열정과 앎의 목표를 향하여, 오늘도 전진을 하고 또 전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경환, {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 제2권에서
자주 날아오르는 새가 화살을 맞는다고 했던가요!
이문열이는 정말 나쁜놈이지요, 작가의 기본양심과
영혼을 팔아버린 정말 몰상식한 자임이 분명합니다,
전교조여러분에게도 호소합니다!
자신들이 가르치는 교과서에 표절작품이 올라있다면
이건 우리의 미래를 속이는것에 다름아닙니다,
이문열의 글이 교과서에서 삭제되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요!
해당 교과서 집필진은 책임사퇴하라!
사실여부를 정확히 확인후
교과서 집필진은 총괄 책임사퇴하라!
교육부차관 또 단임되는 건 아닌지
우리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그 얼마나 규탄했던가?
잘못을 알면서 침묵하는 것은 동조하는 것과 같다.
작가가 글을 베끼는 것은 양심을 내던진 행위다.
버려진 양심이 어찌 아이들의 밥그릇 속에 들어가 있더냐?
교육계가 이리 만만하더냐
아이들이 그리 우습더냐
선생이 그리 어리숙해보이더냐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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