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은 시인(86)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최영미 시인 폭로는 허위가 아니라고 법원이 판단했다. 최 시인은 판결 선고 직후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뻔뻔스레 고소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된다”고 고 시인을 비판했다. 다만 법원은 박진성 시인 폭로는 허위라고 보고 고 시인의 명예를 훼손한 책임을 물어 1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재판장 이상윤 부장판사)는 고 시인이 최 시인과 박 시인, 최 시인의 글을 게재한 언론사를 상대로 총 10억7000만원을 청구한 소송에서 최 시인과 언론사에 대한 청구는 기각하고 박 시인에 대한 청구는 받아들인다고 선고했다. 박 시인은 고 시인에게 1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
이 사건의 쟁점은 고 시인이 1992년 겨울에서 1994년 봄 사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근처 술집과 2008년 4월 인문학 강좌 뒤풀이에서 성추행 등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의혹이 허위인지 여부였다. 고 시인은 사실이 아닌 내용이 외부에 공표돼 명예훼손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최 시인이 제기한 1994년 성추행 의혹은 허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최 시인은 본인이 직접 목격했다는 진술, 당시 일기 등 정황사실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며 “최 시인이 언론사에 성추행 의혹을 제보하게 된 동기, 당시 상황 진술에 담긴 묘사, 고 시인측의 신문에 답변하는 태도 등을 검토한 결과 최 시인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돼있어 특별히 허위로 의심할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고 시인 측이 최 시인 주장에 반박하며 증거를 냈지만 의혹이 허위임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했다”고 했다.
고 시인의 성추행 의혹은 최 시인이 계간 문화지 <황해문화>에 실린 시 ‘괴물’로 고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했다는 사실이 지난해 2월 알려지면서부터 불거졌다. 시에서 최 시인은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 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이라고 썼다. 시에는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는 대목도 나온다.
최 시인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이라고 주장했지만 고 시인은 지난해 3월 영국 출판사를 통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계속 집필을 할 것”이라고 공식 입장을 밝히고 소송을 냈다. 당시 성폭력 가해자의 고소라는 점에서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최 시인은 이날 판결에 대해 “진실을 말한 대가로 소송에 휘말렸다”며 “다시는 저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이 땅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재판부에 감사드린다”며 “진실을 은폐하는데 앞장선 사람들은 반성하기 바란다”고 했다. 최 시인을 대리한 한국여성변호사회도 “성폭력 사건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여성이 그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부터 소 제기를 당해 2차피해를 겪어야만 했던 사건”이라며 “오늘의 판결은 가해자를 엄중히 꾸짖음과 동시에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음으로써 판결을 통해 정의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환영한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박 시인이 제기한 2008년 성추행 의혹은 허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박 시인의 진술인데 박 시인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법정에 나오지 않아 결과적으로 진술서 외에 박 시인이 얼마나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는지 검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박 시인이 피해자 여성을 특정하지 못하는 점 등을 종합해보면 이 의혹은 허위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