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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 별세

우또라 2008. 5. 6. 10:21

▲ 박경리
한국 문학에 큰 획 남긴 '文人들의 어머니'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박경리(朴景利) 소설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는 여인의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씨는 자신의 작품 속 여인들만큼이나 굴곡 많은 생애를 살았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박씨의 말처럼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문학을 단련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926년 10월28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통영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19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金幸道)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곧 이어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고 외동딸 영주를 홀로 키우며 녹록지 않은 20대를 보낸다.

셋방살이를 하며 은행에 다녔던 박씨는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두세 편의 습작 시를 보여주는데 이때 시인은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후 김동리는 박씨에게 “시보다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여 쓴 단편 소설 ’계산’이 김동리의 추천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8월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돼 본격적으로 등단한 후 한해 뒤인 1957년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주로 단편을 발표한 박씨는 1958년 첫 장편 ’연가’ 이후 ’표류도’, ’성녀와 마녀’,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굵직굵직한 소설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내성문학상, 한국여류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도 오르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한국 문학 최대 걸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하기 시작하는데 ’토지’ 1부를 집필할 무렵 그에게 시련이 잇따라 닥친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암과 사투를 벌여야했던 것. 1971년 9월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그는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병마를 이겨낸 후에는 사위 김지하 시인의 투옥으로 또 한번 마음 고생을 겪는다.

그러나 어떤 시련도 창작에 대한 열정은 막지 못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 원고를 썼던 것이다. (중략)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1973년 토지 1부 자서)

토지는 이후 ’문학사상’(2부), ’주부생활’, ’독서생활’, ’한국문학’(이상 3부), ’마당’, ’정경문화’, ’월간경향’(이상 4부) 등 여러 매체를 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 1994년 8월 문화일보를 통해 사반세기 만에 전 5부로 완간됐다.

3부를 마친 후 1980년부터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강원도 원주로 근거지를 옮겨 마지막 순간까지 원주에 머물렀고, 1991년부터는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도 시작했다.

토지 완간 이후에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는 작품 활동은 최소화한 채 토지문화관 건립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오랜 침묵 끝에 2003년 현대문학에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스스로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 이 소설은 건강 악화로 연재 세차례 만에 원고지 440여매 분량으로 중단돼 안타까움을 남겼다.

미완성 소설과 산문들을 묶어 지난해 13년 만에 새 작품집 ’가설을 위한 망상’을 내놓은 박씨는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하며 시 창작 의욕을 밝히기도 했으나 그 세 편의 시는 결국 박씨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됐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고인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예측했던게 아닐까.

“그 세월, 옛날의 그집 / 그랬지 그랬었지 /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 중)
연합뉴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는 타계하기 직전 신작시 〈옛날의 그 집〉(현대문학 4월호)을 발표하면서 생의 말년에 얻은 무욕(無欲)과 달관의 철학을 참으로 홀가분하게 노래했다. 시 〈옛날의 그 집〉은 1994년 8월 15일 박씨가 대하소설 《토지》를 탈고한 강원도 원주의 단구동 집(현재 토지문학공원)을 가리킨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시 〈옛날의 그 집〉 부분)

박씨는 1969년 월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를 시작해 무려 25년 동안 여러 매체로 연재 지면을 옮기면서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걸쳐 한국문학사의 큰 산맥으로 남을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했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도 하기 전에…'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경남 하동군 평사리에서 출발해 한반도와 만주 간도까지 펼쳐진 광활한 무대를 오가면서 8·15 광복을 맞기까지 격변기를 헤쳐나간 한민족의 생명력을 형상화했다. 여주인공 최서희가 광복을 맞는 순간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이 소설의 제5부 '끝'자는 공교롭게 1994년 8월 15일 새벽2시에 나왔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고 쓴 작가 역시 오랜 집필의 굴레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토지》 집필 초기에 작가는 유방암 판정을 받아 3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고 나서도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밤새워 원고지를 메웠다. 작가의 한 맺힌 삶이 그처럼 독하게 글을 쓰게 밀어붙였다.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데뷔 직후 밝혔던 박경리씨는 "아이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불행에서 탈출하려는 소망 때문에 글을 썼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여고를 졸업한 박씨는 1946년 김행도씨와 중매결혼해 1남1녀를 얻었지만,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남편은 6·25 나던 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던 중 행방불명됐다.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용공으로 몰려 사라졌어요"라고 생전에 박씨는 짧게 언급한 뒤 말을 아꼈다. 홀로 키운 딸(김영주)은 70년대 초 김지하 시인과 결혼했고, 박씨는 사위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는 동안 딸의 가족 뒷바라지를 하면서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1955년 김동리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박씨는 《김약국의 딸들》(1962년) 《시장과 전장》(1964) 등의 장편소설과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불신시대〉 등을 잇달아 발표했고, 마침내 박씨의 문학세계는 대하소설 《토지》라는 거대한 강물에 이른다. "토지는 강 같이 흐르는 모든 생명의 흐름이에요"라고 한 박씨는 "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600~700명이 등장하는 이 집단적 생명 자체가 뭉뚱그려진 숙명을 그리려고 했습니다"고 밝혔다. "땅, 대지, 흙 등의 단어를 놔두고 토지라고 명명한 것은 토지라는 말 속에 땅문서라는 인간의 사유재산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박씨는 "사유재산의 시작과 함께 인간은 자연의 순수한 존재와 결별하고 역사의 단계에 들어갔어요"라고 설명했다. 《토지》는 TV 드라마로 세 차례나 제작되었고, 때마다 높은 시청률을 올렸을 정도로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에 부합하는 서사의 힘을 발휘한 소설이기도 하다.
박씨는 생명 가치를 살리는 환경 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1993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맡았고, "우리는 자연의 이자로만 살아야지. 원금을 까먹으면 끝이야"라고 말해 왔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해 이사장이 됐고, 1999년 토지문화관을 개관한 뒤 청계천 복원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생명의 물길을 복원하자"는 논의에 물꼬를 텄다.

박경리씨는 조선일보와 가진 생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본지 4월1일자)에서도 "우리가 그동안 지하수를 다 빼먹어서 실개천이 전부 건천(乾川)이 됐어요. 물길을 살려야 생태계도 복원되고, 장차 '물전쟁' '곡물전쟁'에 대비할 수 있어요"라고 재차 강조했다.

"저도 한때 민족주의자였지만, 넓게 보면 민족주의는 지구촌에서 지역이기주의일 수 있다"고 한 박씨는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전 지구적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젊은 세대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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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경리(朴景利)씨는 명실상부한 한국 문단의 큰 나무였다.

작가로서의 이러한 명성은 한국 문학의 최대 수확이라고 일컬어지는 ’토지’ 한편으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대작 ’토지’의 육중한 무게에 다소 눌렸으나 토지를 전후해, 그리고 토지 사이사이 발표됐던 20여편의 장편 소설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도 문단에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는 “’토지’는 결코 평지돌출이 아니었다”며 “주제의식과 서술방법 그리고 작가적 역량의 면에서 ’표류도’나 ’김약국의 딸들’은 이미 ’토지’의 출현을 예고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초기 단편과 ’성녀와 마녀’ = 박씨는 등단 초기 단편을 주로 쓰다 장편으로 옮겨갔는데 초기 작품들은 비교적 작가의 개인적 삶과 밀착돼 있다.

최유찬 연세대 교수는 “’계산’, ’불신시대’ 등 초기 단편소설은 작가의 신변 문제나 생활 속의 부조리를 심리적 사실주의의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남매와 노모를 부양하는 여주인공 순영이 문학을 통해 상처를 달래는 내용의 초기 단편 ’암흑시대’를 비롯해 초기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들이 주로 등장했다.

작가가 쓴 첫 장편 연애소설로, 1960년 여성지 ’여원’에 연재될 당시 파격적 자유연애 스토리로 화제를 모았던 ’성녀와 마녀’ 역시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과 개인적인 삶,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했던 박경리 초기 문학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부유하고 유망한 작곡가 수영이 자존심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 형숙과 자신만을 바로보는 정숙한 여자 하란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의 이 소설은 연재 당시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사실상 묻혀있다가 43년 만인 2003년에 첫 출간됐다.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작가는 새로운 질서와 도덕의 도래를 알면서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성녀와 마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를 통해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 세대와 세대의 갈등, 옛 도덕과 새 도덕 사이에서 겪어내는 분열증과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약국의 딸들’ㆍ’시장과 전장’ = 박씨는 1960년대 많은 장편소설을 썼는데, 이중 연재가 아닌 전작 장편으로 출간됐던 ’김약국의 딸들’(1962년)과 ’시장과 전장’(1964년)은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은 1993년 재출간돼 다시 한번 인기를 끌었으며 2004년 TV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남 통영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약국의 딸들’은 김약국의 다섯 딸과 그의 아내 한실댁을 중심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성을 그린 작품이다.

김만수 군산대 교수는 “김약국의 어떤 딸도 내 딸들이기에 소중하다는 것,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이 지극한 모성의 원리야말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일 것”이라며 “작가가 몰두한 생명운동의 근원을 ’김약국의 딸들’에서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6ㆍ25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인 ’시장과 전장’은 중학교 교사인 남지영과 남로당 당원인 하기훈의 이야기를 나란히 서술하면서 전쟁 속 개인들의 삶을 보여준 소설이다.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에 충실한 지영과 이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훈을 통해 이념을 위한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의 비애를 그려냈다.

최유찬 교수는 “이 작품은 남북 어느 한쪽의 시선에 기울지 않고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성과 외에 작가의 생명 사상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며 “전쟁이란 집단의 횡포 앞에서 유린되는 개인의 존엄과 행복, 그리고 그 억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싹트고 있는 생명의 싹이 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완성 ’나비야 청산가자’와 시 = 토지 완간 이후 소설 창작을 중단했던 박씨는 2003년 9년 만에 신작 소설을 내놓았다.

현대문학 4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나비야 청산가자’는 토지가 끝난 시점인 1945년 이후 50년의 세월을 그린 작품으로 박씨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던 작품이다.

한 인터뷰에서 “지식인에게 전하는 나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표현하기도 한 이 작품은 건강 상의 이유 등으로 연재 세 차례만에 원고지 440여 매 분량으로 중단됐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해연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농장에서 일했던 마름의 아들 석호와 결혼해 남남보다 먼 사이로 지내는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농장일꾼 정서방이 자신의 딸과 석호의 간통 현장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담아내려던 박씨의 시도는 안타깝게 미완성으로 끝난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우뚝 선 박씨였지만 첫 습작은 시로 시작했고 소설을 내놓는 간간이 시집을 묶어내기도 했다.

’우리들의 시간’ 등의 시집에 실린 진솔한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박씨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또 생태와 환경에 대한 애착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박씨가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한 것이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 되면서, 공교롭게도 박씨의 문학 인생은 시로 시작해 시로 끝을 맺게 됐다.

출처 : 시와 함께 하는 여행
글쓴이 : 좋은시공연문학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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