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영(소설가, 미술칼럼리스트)
자유와 번영의 울타리를 만든 분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이다!” “한국인은 지금 건국대통령을 구박한 죄 값을 치르고 있다.” “4.19 때 끌어내렸던 이승만 동상을 광화문에 다시 세우자”고 일간지에 크게 광고를 하면서 모금운동과 함께 국민들을 선동했다.
이것은 피의 대가로 이룩한 4.19혁명의 숭고한 역사를 뒤엎는 망령된 행동이다‘’‘’‘하략
용인대 안승근객원교수(4.19 혁명회유공자)의 2008.10.2일자 경향신문 오피니언란 <이승만 동상 건립 망발>의 칼럼 도입부분이다.
KAIST김보정 이인호 석좌교수는 2008.9.8일자 동아일보 동아광장에 이상주의자 이승만은 일생을 독립투쟁에 바치고 대한민국을 세워 남한의 공산화를 방지한 탁월한 정치 지도자였지만... 이승만을 애도하며 <KBS의 ‘이승만 왜곡>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KBS가 방영한 이승만 역사 특집 프로그램을 맹비난했다. 내용 중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의 화신이요, 분단의 원흉으로 몰아붙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친북좌파의 역사 왜곡공작이 우리 교육에 스며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의 부분은 뉴 라이트의 본성을 노정한 유치하고 타성화한 과거 회귀적 악성 엇귀들이다. 그녀가 왜곡이라고 명시한 대목들을 짚어보자. 이승만이 아시아 담당 미국OSS(CIA전신)공무원이었음은 사실이 아닌가.
하지만 2차 대전 당시의 이승만의 역할은 조국해방투쟁의 일환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고국에 귀국하였으면 미국의 OSS신분을 폐기처분 했듯 한국 국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발탁한 굿 펠로는 퇴역 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고문역을 맡았다. 굿 펠로 대령은 맥아더 장군의 부하이다. 그들이 한국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들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Guardianship이었다. 미소영중 4개국이 5년간 후견이 되는 것이다. 5년 후에는 당연히 그들이 떠난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을 원치 않았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진의를 호도하기 위해 등장한 명칭이 ‘신탁통캄였다. 이승만은 친일지주세력의 세를 모아 연일 신탁통치 반대시위를 종용했고 서북청년들을 동원하여 미소 공동위원회를 방해테러를 가하게 하였다. 결국 영구분단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미국의 욕구대로였고 미국의 욕구는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저항하는 세력은 용공으로 때려 잡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녀는 마치 이승만이 억울하게 당하기만 했다는 듯이 “ 권력을 위해서는 동지를 배반하기를 서슴치 않은 것으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승만과 김구의 활동 공간은 이역만리였지만 독립쟁취를 위한 투쟁의 동지였다. 임시정부를 이끌며 젊은이들에게 광복의 결의를 다지게 하고 용기를 단련시킨 그 순수하고 투박한 애국지사 김구를 어찌 제거할 생각을 했을까. 이러고도 이승만은 김구의 암살을 몰랐다고 주장하겠는가.
죽산 조봉암은 또 어찌하였나
완강히 거절하는 죽산을 농림부장관으로 회유하면서 이승만은 죽산이 제시한 농정의 개혁(토지 등)정책을 다 수용하기로 했다.
대통령 궐석시의 국무회의주재는 내무장관의 몫이었다. 이승만은 관례를 깨고 죽산에게 그것을 맡겼었다. 이승만의 죽산에 대한 편애는 다른 부서의 장관들에게 민망할 정도였다. 죽산이 국회부의장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그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이북의 간첩 누명을 씌워 죽여버렸다.
평화통일 이슈가 간첩행위란 말인가.
칼럼에는 이승만이 테러식 투쟁방법에 공감하지 않는‘’‘이라는 대목이 있다. KBS가 방영한 이승만 역사 특집을 나는 보지를 못했다. 언젠가 무심코 누른 체널에서 마침 이승만의 테러(살해)를 피해 숨어살던 하와이 동포들의 생생한 증언장면이 방영되었다.
이승만이 독립자금 관계로 분열을 초래하였다는 불미스러운 이야기는 공공연히 흘러나왔지만 미국에서 있었던 동지간의 그런 암투까지 내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북진 통일, 휴전협정 반대 반민족 특위소속 특경에 대한 서북청년을 동원한 테러 행각은 미국 OSS요원의 DNA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가
어쨌던 눈만 뜨면 자유당 시절에는 살상테러였다.
이인호는 또 언급하고 있다.
독립운동에서 소외된 독불장군이었다면 왜 광복 후 건국운동 세력들이 앞 다퉈 그를 영입하려 했고 심지어는 공산당의 박헌영까지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했는가.
그 답을 월간대청 1991년 3월호에 쓴 "중앙박물관 철거가 일제잔재의 불식인가"의 내 글 첫머리에서 인용하겠다.
‘’‘8.15그 감격과 환희, 임시정부 요인이 돌아온단다. 오랜 망명생활에서 그들이 돌아온단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온 그들이 돌아온단다. 어떻게 그들을 맞이할까? 무슨 선물로 그들을 위로하고 우리의 뜨거운 흠앙의 정을 표시할까? 이화여고의 음악담당 박은용 선생과 지혜를 짜고 궁리를 한 끝에 박은용 선생은 그 분들에게 바치는 곡을 작곡했고 우리는 도포두루마기를 포함한 한복을 지었다. 1945년 10월이었을게다. 임시정부요인 환영예배를 마치고 이화잔디밭에서 우리는 선물 전달식을 가졌다. 현재 이화여고 동창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송상회는 이승만박사에게, 나는 김구선생에게,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자마자 결핵으로 사망한 방은애는 김규식박사에게 한복을 증정했다. 그 뿌듯한 감격은 오래오래 내 가슴에 충만했다.
그 분들의 옷이라는 사실만으로 한 올 한 뜸 피를 토하는 정성으로 방학기간 내내 바느질을 했는데‘’‘’ 더욱이 바느질 이라면 소가 도축장에 끌려가듯 뒷걸음질을 친 내가 소녀기에는 이승만의 옷을 혼신의 정성으로 꿔맺다. 건국 준비위원회도 박헌영도 나와 같은 이치였을 것이다. 나를 비롯 온 국민의 기대와 믿음 사랑을 저버린 것은 이승만이었다.
이인호는 “20대 후반에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이나 1941년에 발간한 영문 책 ‘일본의 내막’,6.25전쟁의 한문시를 읽지 않고 감히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이승만을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로 재 조립기에 열광이다. 부질없는 짓 하지말고 한국에 관한 미국의 기밀해지 문서도 살피고 이 교수야 말로 학자이고자 하면 균형있는 한국 현대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학구적 품위를 견지하라.
4.19혁명의 중심에서 고초를 겪었을 안승근교수는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겠다는 낮도깨비들의 난동에 혈압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을 입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Good idea 쌍수를 들어 대환영이다. 생각해보라
낭떨어지를 향해 질주하는 미국금융기차에 동승하지 않았음에 느긋이 관망하던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 100개의 허리케인보다 무섭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국이라고 무사하겠는가.
광화문에 이승만의 동상을 세우면 반공교육으로 의식이 화석화한 한국인 보다 분단한국의 실정에 더 밝은 세계인들이 학살자 이승만을 보러 모여들게 아닌가. 그 관심이 돈벌이로 이어질 것이다.
10년 전 쯤인가 한국을 방문한 불란서의 관광 책임자가 이벤트를 개발하라고 조언을 했었다. 한국을 둘러보고 관광자원이 빈곤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벤트 개발의 무궁무진한 소재이다. 마산, 거창, 제주4.3학살 등등 북진통일 휴전협정을 거슬으는 반공포로석방 국회 푸락치사건 등 종류도 다양하고 사건 내용 또한 다이나믹하다.
주제별로 작품을 만들어 일 년간의 공연내역을 세계에 홍보한다면 정치에 관심이 있거나 독일 한국 등 분단사를 논문으로 다루려는 학자들이 광화문 이승만 동상으로 몰려들 게 아닌가.
이승만은 관광수입으로 조국에 끼친 과오를 보상하게 되는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로 흠모하여 동상을 건립하겠다면 이안호 그대의 등작에 세워라. 지키는 놈 열명이 도적 한 놈 못 잡는다고 했다. 이승만에게 학살당한 유족의 수를 알고나 있는가. 매일 그들이 똥칠을 할 텐데 군대를 동원 동상을 지키겠다는건가. 세계의 톱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박정희의 기념관도 이승만의 동상과 같은 이치이다. 밑져도 한참 밑지는 한.일 굴욕 외교, 친조카처럼 아껴 주었던 황태성에 대한 사형 합법적으로 협의를 제의 하러온 사신을 면접할 의사가 없으면 그대로 돌려보내는 게 순리다. 미국이 그렇게 두려우면 왜 구데타를 했고 집권을 했나. 민족일보 조용수사장 사건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람 목숨을 파리채로 파리를 잡듯 죽여 버리는 게 박정희의 취미였나. 그 유족들의 원한과 아우성을 감지나 하나 친미로 돌아서서 일제 때 누리던 부를 물려받아 외국에 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대학에서 한자리하며 친북좌파 용공의 무기에 녹이 슬까바 사건을 벌리는 그대들 박정희 기념관도 사건의 진실을 공개 전시하려거든 건립하라. 그리하여 MB가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으니 관광수입으로 공약을 이행케하라.
내 맏이가 여섯 살 때였다. 서울에 왔다가 파고다공원엘 들렸다. 3.1독립만세와 파고다공원의 역사를 이야기 해주며 맏이의 손을 잡고 거닐고 있었다.
“엄마 여기는 왜 풀이 죽었지”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보니 공원 내 다른 곳의 풀과 잔디는 새파랗게 윤기마저 도는데 이승만 대통령 동상 둘레의 잔디만이 누렇게 죽어있었다. 참 이상하다했는데 몇 일 후 이승만의 하야 소식이 전해졌다. 4.19혁명이었다.
1979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무슨 볼일 때문이었는지 정신문화연구원에를 갔었다. 용무를 마친 뒤였다. 깔끔하고 넓게 가꾸어진 경내를 들러보다가 함께 간 친구가 “얘 참 이상하지 않니 지극정성을 다했을 텐데‘’‘’보렴 다른 나무들은 다 싱싱하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나무만이 죽었을까‘’‘”친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신문화연구원 개원을 축하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식수였다. 그곳을 다녀온 지 불과 한 달이 지나서였을까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박 대통령이 살해된 게’‘’이승만 동상 기단의 죽은 풀과 연계되어 고사했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겠어서 정신문화연구원에 전화를 했다. 관리팀장이라는 분과 연결이 되었다. ‘살리지를 못하고 같은 수종으로 다시 심었다며 서류에서 기념식수일과 다시 심은 날자를 확인해주었다.
그 경위를 설명하는 매너가 어찌나 겸손하고 친절한지 그리고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성함을 물어도 될까요”하자 “ 나무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고 실은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셔야 취재에 응하지만 연로하신 것 같아 ‘거절하기가 박절한 감이 있어서 전화를 끊지 못했습니다. 관리팀의 일 원으로 기억해주십쇼”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 기이한 현시(顯示)에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었다.
우주를 다스리는 그 어느 절대적인 존재에 의하여 모든 생명체의 으뜸인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가치와 본분을 저버렸을 때 취해진 응징의 제 1차적 경고의 계시가 아닐까?
파고다 공원 이승만 동상기단의 죽은 풀은 동상을 세운 자들에 대한 경각을,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에 박정희가 심은 나무를 죽게하였음은 부정타다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가.
내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승만 동상 건립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이들은 대체로 기독교계 신자들이 아닐까 싶다. 어째서 절대자의 노여움에 대한 영적 감지가 없었을까? 군사정부 때도 하지 않던 비이성적 행태를 보며 문득 재앙의 암묵적 현시(顯示)로 느껴졌던 숭례문의 화재가 상기되어 골수에 얼음이 스미는 듯하다.
교과서 개정이며 이승만 동상건립이며 추진하는 분들이 다 한국 최고의 지성인들 아닌가? 제자리로 돌아가라.
김제영 선생님(82)은 충남 조치원에 거주하는 원로 소설가이자 미술칼럼리스트이
다. 1946년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석려'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민국일보 문화부기자, 무용한국 편집고문, 월간음악 객원 편집인, 미술21 편집고문, 미술세계 객원편집인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현재는 아트코리아와 음악저널에서 고정필진으로 활약하고 있다. 소설작품집 '거지발싸개 같은 것'(1981), '라흐마니 노프의 피아노 협주곡'(1990)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