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

[스크랩] 유심 특별대담-원로 이기형 시인에게 듣는다

우또라 2015. 10. 3. 18:40
특별대담-원로 이기형 시인에게 듣는다
“만해 선생의 절개와 지조를 오늘의 젊은이들이 배워야”
[41호] 2009년 11월 10일 (화) 문창길 시인

편집자 주
이기형
1917년 함경남도 함주 출생 쪾1938년 함흥고보 졸업 쪾1942년 일본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 2년 수학 쪾1943~1945년 ‘지하 협동단 사건’, ‘학병거부사건’ 등 지하 항일투쟁 혐의로 1년간 복역 쪾1945~1947년 〈동신일보〉 〈중외일보〉 기자 역임 쪾2003년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쪾시집으로 《망향》(1982), 《설제》(1986), 《지리산》(1988), 《꽃섬》(1990), 《별꿈》(1996), 《봄은 왜 오지 않는가》(2003), 《해연이 날아온다》(2007), 절정의 노래(2009) 등이 있고 기행문 《시인의 고향》(1987), 전기 《도산 안창호》 등이 있음.

 


―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대담에 응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은 만해 선생을 생전에 만나 대화를 나눈 유일한 생존 문인으로서 당시의 생생한 기억과 육성을 듣기 위해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국내 최고령 시인으로서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온전히 안고 살아오신 분으로 많은 시인, 작가들에게 문학적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선생님의 귀중한 증언이 우리 한국 문학사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겨지기에 기억을 되살려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유년기 얘기부터 들려주시지요.
▼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두 살 되던 해 아버님께서는 열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님께서 외아들인 저를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어린 시절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 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학을 했어요. 그러다 어머니를 돕기 위해 2년간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다 다시 5학년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함흥고보에 1등으로 들어가서 졸업을 한 뒤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 2년간 다녔습니다.

― 열세 살 때 야학을 다니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야학 선생님들에게 반일독립 사상을 배웠다고 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들려주시겠습니까?
▼ 당시 야학 선생님들은 다들 독립투사였어요. 1929년 비구니들만 있는 환희사라는 절에서 공부를 했는데, 실제는 반일독립사상을 가르쳤어요. 저 스스로 찾아가서 책도 없이 어깨너머로 다른 친구의 책을 보면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연극도 하고, 웅변도 밤늦도록 배웠는데, 어느 날 야학 선생이 원고를 하나 써 주더군요. 당연히 반일독립사상을 주제로 한 내용이었는데, 그것을 학생들과 농민들이 모인 장소에서 대중연설을 하게 했어요.

― 선생님께서는 국내 생존한 문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만해 한용운 시인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교류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어떤 계기로 만해선생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 지조라던가 절개라던가 이런 고귀한 것들이 사라진 오늘날 만해 한용운 선생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뜻깊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용운 선생을 만나게 된 계기는 1938년 여름인데,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청년 학생들에게 가장 지도력이 강한 그러한 분을 찾았습니다. 그때 역사학자인 문석준 선생을 만나서 물어봤는데, 대번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곧바로 여운형 선생을 만나서 조선독립에 대해서 귀중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얘기를 하던 중 만해 선생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꼭 만나 뵈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몽양 선생한테 만해 선생의 연락처를 물어 찾아가 뵈었습니다.

― 당시 언제 어디서 만났으며, 만해 선생의 얼굴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건강이 안 좋아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라고 들었는데, 처음 만나서 주로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셨는지 궁금 합니다.
▼ 1938년 가을에 성북동 집에서 만났어요. 지금 생각하면 한 번밖에 못 만난 것이 많이 아쉬워요. 만해 선생이 돌아가신 때가 1945년 1월 해방되던 해이니까 시간이 좀 있었는데 말이죠. 당시 내가 만해 선생을 왜 만나려고 했느냐면, 이 분이 33인 중의 한 분이고 독립선언서를 쓰신 분이었어요. 그리고 《님의 침묵》이라는 애국시집을 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꼭 만나야겠다는 강한 소망을 가졌지요. 그래서 몽양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성북동에 찾아갔습니다. 지금은 심우장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안 불렀어요. 마침 상허 이태준 선생이 살던 집도 거기에 있었는데, 그 건너편 도랑 옆으로 올라가 지금 말하는 심우장이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까 만해 선생께서 감기 때문에 누워 계시다 약간 때 절은 이불을 제끼면서 곧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셨어요. 그래서 큰절로 인사를 드리고,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고 제가 온 이유를 말씀드렸지요. 처음에는 주로 문학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내가 《님의 침묵》을 읽은 얘기라던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흑풍》이라는 작품을 읽은 얘기를 하니까 만해 선생이 집필 과정 등을 들려주셨어요. 문학 얘기를 그렇게 한참 하다가 몽양 선생님을 만났다는 얘기와 이광수를 만나 내선일체론에 대해 따졌던 얘기를 했더니, 쭈욱 듣고는 하시는 말씀이 이 군의 충정은 잘 알겠다, 그래서 우리나라 청년 학생들은 무엇보다 우리나라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상당히 강조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그 역사를 알기에는 매우 어렵다, 책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어디서 배울 곳도 많지 않으니 이 군 스스로 책을 찾아서 읽고, 배워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사실 나로서는 부족하지만 최남선이 쓴 ‘조선역사’에 대한 책을 이미 읽고 있었고, 그리고 한설야 선생을 만나서 많은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조선이 독자적으로 독립국가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을 많이 인식하고 필요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죠. 그것을 보다 더 구체화시키고, 확인하기 위해서 만해 선생을 만났는데, 역시 잘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조선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고 힘 주어 강조하셨어요.

이기형 시인
― 만해 선생께서 그때 몸도 편찮으셨는데, 주변에서 누가 돌보는 사람이 있었는지요? 그리고 스님이지만 승복보다 한복을 즐겨 입으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만나실 때는 어떤 옷차림이었나요?
▼ 당시 한복을 입었어요. 오래된 옷이었지만 깔끔한 편이었죠. 혼자 계셨지만 아마 가까운 지인 한 분이 식사도 챙겨드리고, 빨래도 도와드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 당시 만해 선생께서 사회활동이나 창작활동은 활발한 편이었는지 들려주시죠. 그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지 모르지만 몸이 불편했고, 일본군들의 감시도 많이 받았을 때라서 여러 가지로 자유롭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1938년도에 내가 만났으니까 만해 선생이 50대 중반이 넘었을 것입니다. 당시 자유롭게 활동은 못하고, 그러니까 반 은거하다시피 한 거지요. 일본군의 감시도 있고, 자신의 건강도 안 좋고, 그래서 바깥 활동을 못하니까 나처럼 찾아가는 청년들이 있으면 만나서 대화를 나누거나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지요. 집회에 나간다거나 그런 건 전혀 못했어요. 《님의 침묵》이 1925년도인가 나왔었고, 〈불교유신론〉 등 불교에 대한 연구 활동도 한창일 때가 있었지만, 내가 찾아가 뵈었을 때는 신문에 《흑풍》이라는 소설을 연재하는 정도였어요. 그거 말고는 거의 작품을 못 봤거든요. 어쩌면 1930년대는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매우 미묘한 때에요. 그 시기에는 카프의 활동도 중단되긴 했지만, 그러나 1930년대 우리나라의 시나 소설의 수준은 매우 높았던 시기입니다. 예를 들어 시에는 정지용 선생을 비롯하여 임화 시인 등이 있고, 소설은 한설야라든가, 이기영의 《고향》 등이 발표되었거든요. 일본의 탄압이 극도로 심해질 때인데, 그 상황에서도 용케 수준 높은 작품들이 나왔어요. 그 시기를 우리 문학사에서는 매우 주목해야 해요. 문학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임화의 〈현해탄〉도 1939년도에 발표되었고, 구인회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활동도 있었고, 진보적인 작가들의 활발한 활동도 문학의 질을 높인 계기가 되었던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 만해 선생을 만날 때 선생님께서는 열혈청년의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만해 선생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얘기를 듣거나 일화를 들으신 적이 있었나요? 만해 선생께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를 방문하여 반일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특히 선생은 홀로 독립운동을 펼치거나 일본이나 만주 러시아 등도 단신으로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 아, 그때 내 나이가 스물둘인가 되었을 때입니다. 저는 당시 조선독립을 위해서 훌륭한 지도자들을 찾아서 정신없이 뛰어다닐 때였어요. 그래서 만해 선생에 대해서는 한설야 선생을 통해서 약간은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님의 침묵》이나 여러 책을 보고 느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만해 선생을 직접 찾아가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러시아 해삼위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만주를 방문했다고 해요. 당시 반일독립 운동가들은 대부분 만주나 해삼위를 들락날락했거든요. 그러니까 만해 선생도 그들과 같이 만주나 해삼위를 방문했던 거예요. 아마 혼자 다닌 것은 승려 신분이기도 했고, 반일활동 특성상 그렇게 하는 것이 수월해서였겠지요. 그런 걸 보면 문학뿐만 아니라 반일독립운동 그 자체에도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던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일제 치하에서 조선총독부를 반대하는 뜻에서 거처하던 집도 총독부를 등지어 짓고 살았다거나, 식사를 할 때도 꼿꼿하게 앉아서 했다는 등의 일화가 있습니다. 직접 보시거나 들은 적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 아주 중요한 얘기가 많은데, 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등지고 살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최남선이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집 앞에 가서 어이 어이 곡했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리고 어느 날 길에서 최남선을 만났는데, 만해 선생에게 다가와 내가 최남선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만해 선생이 “최남선이오?” 하고 모른척 반문하면서 그 사람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인데요? 하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또 일본 사람들에게 머리 숙이기 싫어서 세수도 서서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하여튼 머리 숙이기 싫으니까 그런 행동을 보이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절개, 지조를 나타내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을 후손들에게 많이 전해야지요. 오늘날에는 지조라든가 절개라던가 이런 말들을 청년들이 알지를 못해요. 그러나 우리 불행한 민족사에서 절개나 지조라는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변절해서는 안 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일제하에서 독립운동하다가 변절했잖아요. 그렇게 일본놈 밑에서 아첨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민주화운동하다가 그만두고 미국 사람 밑에서 아첨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우리가 이런 어두운 과거를 깊이 깨닫고, 모든 행동을 역사와 민족이 부르는 방향에서 잘해야 해요.

― 만해 선생께서 그때 독립운동과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어떤 전망을 갖고 계셨습니까? 해방을 맞이할 것이라는 신념이라던가 이런 표정을 읽을 수 있었나요?
▼ 그때는 누구나가 독립해서 우리나라가 외세에 속하지 말고 자주적 민족의 힘으로 살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기초는 바른 역사를 중심으로 해서 가야 한다고 만해 선생께서도 얘기했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걷고 있는 지금 상황을 바로 잡으면서 독립을 쟁취해서 독립국가를 잘 유지해 나가자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적이었고, 또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영원히 지배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일본은 망한다고 선생께서도 말했어요. 꼭 해방이 된다는 것을 믿으신 거죠.

― 당시 만해 선생을 만날 때 일본의 감시가 있거나 같은 조선인들끼리도 경계심이 없지 않았을 텐데 이에 대한 우려는 없었습니까?
▼ 만약 내가 만해 선생이나 독립운동가들을 만난다는 것을 일본 형사들이 알면, 나도 불리하고 만해 선생도 불리하거든요. 그러니까 만해 선생도 처음에는 혹시 이 청년이 일본 사람들의 밀정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났다거나 한설야 선생을 만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안심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거지요.

― 일제하 우리글로 된 신문이나 문학잡지가 흔치 않았을 때인데, 어떤 매체를 통해서 만해의 작품이나 글을 접했습니까? 만해 선생께서 〈불교유신론〉을 발표하기도 했고, 〈조선일보〉에 《흑풍》을 연재했다고 하셨는데 읽어보신 소감이 어땠는지요?
▼ 나는 그때 잡지에 실린 만해 선생의 이런저런 글을 많이 보았어요. 근데 애국지사의 움직임을 소상히 소개하거나 일상생활을 실을 수 있을 정도의 자유로운 언론이나 매체는 없었지요. 일절 있을 수도 없어요. 〈불교유신론〉은 내가 만해 선생을 만나기 직전에 쓴 것인데, 나도 읽어 봤어요. 그리고 〈조선일보〉에 실린 《흑풍》은 많은 사람들이 애독했습니다.

― 반일 감정이 한창 강했던 청년 시절 만해 선생을 만났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과 조선문학에 대한 다른 대화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그분의 민족사상과 문학정신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조선독립에 대해서 만해 선생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듣고 싶었고, 그리고 나로서는 이 어려운 시기를 돌파해서 우리의 희망인 독립을 쟁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문제에 대해 질문을 드리면 만해 선생께서는 차분하지만 강직한 어조로 답변해 주시곤 했습니다. 문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어요. 그러나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노골적으로 쓸 수는 없지만 조선독립을 위한 방향으로 써야 한다는 말씀은 하셨어요.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기영의 《고향》을 봐도 지주와 소작인 관계를 많이 얘기했는데, 거기엔 객주 문제가 많이 얘기되거든요. 내용 가운데 간간히 조선의 독립이 되어야 한다는 암시가 들어가 있지요. 심훈의 《상록수》도 직접 조선독립 문제를 거론한 게 아니고, 농촌 계몽운동을 통해서 주민들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역사를 배워야만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 거예요.

― 이번엔 만해 선생이 일본을 방문한 얘기를 했으면 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일본에서도 반일 목소리를 높이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내가 생각하기에는 1920년대 후반에 갔을 거예요. 〈불교유신론〉을 쓴 전후로 갔는데, 아마 표면적으로는 일본 불교도들과 교류라는 명목으로 갔지만 내면적으로는 독립운동 차원에서 일본의 정세를 탐색하고, 그곳에 있는 조선 불교신자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지켜보면서 뭔가 힘이 되기 위해 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돼요. 어쨌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상당히 미묘한 거니까 만사를 독립운동과 연계시켰다는 것은 틀림없어요. 일본 불교도들 중에는 진보적인 사람도 있고, 보수적인 사람도 있는데, 일부 진보적인 일본인들은 조선독립을 찬성했어요. 내가 만난 일본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여럿 있었어요. 불교도들 중에서도 진보적인 신도들은 조선은 꼭 독립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어요. 언제까지 일본의 식민지로 살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만해 선생이 일본에 있는 조선불교들뿐만 아니라 일본의 진보적인 불교도들도 만나 은근히 조선독립 문제를 교환했을 거라고 생각돼요.

― 만해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하고 직접 썼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어떤게 맞는지 궁금합니다. 이와 함께 최남선 등 33인들 가운데 변절한 사람이 있는 점에 대해서도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 대단한 일을 했지요. 최남선이 썼다는 얘기도 있지만 실제 쓴 분은 만해 선생이라고 들었어요. 문장도 만해 선생이 쓴 건데, 이름을 최남선으로 발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3인 중에 많은 사람이 변절했어요. 그 이유는 아마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 때문이겠지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영원히 즉 100년 이상 지배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도중에 정조를 버리고 지조를 버리고 일본 밑에서 살 수밖에 없다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변절을 꾀했지요. 창씨개명이라든가 조선말 말살 정책들이 나오니까 살아가기 힘들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만해 선생과 몽양 선생은 꼿꼿이 이런 일들에 반대하고 일본식 이름을 갖지 않았어요. 사실 그때는 창씨개명을 않고는 버티고 살아남기 힘들었던 시대거든요. 그런 점에서 만해 선생이 지조를 지킨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이광수는 자진해서 창씨개명을 했잖아요.

― 아까 이광수를 찾아가 만났다고 들었는데, 어떤 연유로 만났으며,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누셨나요? 내선일체론에 대해서도 반박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 1938년 함흥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집으로 찾아갔지요. 일제하 민족의 지도자를 갈망했던 문학청년 시절 우선 이광수를 만나 내선일체론을 따져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정》 《흙》 《단종애사》 등 작품에 대해 이틀 동안 대화를 나누다 3일째 되는 날 정면으로 따져 물었죠. 내선일체론과 창씨개명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니까 이광수가 하는 말이 “나도 세상 살아보니 그렇지가 않아!”라고 변명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집에 왔는데 화가 나서 《민족개조론》이니 뭐니 하는 그의 책들을 모조리 없애버렸어요. 일본이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을 시작했는데, 첫날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오(香山光郞)라고 호적계에 등록했어요. 사실 이광수를 1938년에 만나러 갔을 때 집 앞에 이미 한자로 쓴 일본 이름 문패가 달려 있는 것을 내가 직접 봤습니다. 우리나라 제1호 창씨개명자가 이광수인 셈이지요.

― 몽양 여운형 선생과 많은 교분을 나누면서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신적 스승이자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몽양과 특별한 관계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몽양과 만해 선생과의 교류 관계도 알고 있는지 얘기해 주시죠.
▼ 만해 선생과 몽양 선생의 교류도 많이 있었지요. 하지만 직접 만나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어요. 일본의 감시가 심하고, 그래서 우리 같은 청년들이 서로 찾아가 얘기를 듣고 소식도 전하고 했습니다. 몽양 선생은 제 인생의 참된 방향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또 북쪽에서 결혼했던 아내도 몽양의 육촌 여동생이었어요. 당시 결혼식에 몽양이 주례를 봤고, 축사는 임화 시인과 소설가 이태준 선생이 했어요.

―한설야, 임화, 이기영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교류하셨는데, 그때 활동했던 기억들을 들려주시죠. 당시 문학의 주된 화두는 무엇이었습니까?
▼ 한설야 선생은 같은 고향이니까 자주 찾아가 뵈었죠. 임화 시인과 이기영은 1941~42년 그 기간에 주로 많이 만났지요. 임화는 청량리 회기동에 집이 있었는데, 여러 번 찾아가서 만났어요. 거의 한 주일에 한번 정도 찾아가서 문학 얘기라든가, 독립 문제 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죠. 그때 부인이 지화련이라는 소설가였어요. 그분의 〈도정〉이라는 소설 원고도 직접 봤는데, 유명한 작품입니다. 8·15 직후 문학가동맹에서 상도 탔어요.

― 〈불교유신론〉을 보면 조선불교가 그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온 종교적 제도나 의식에 반해 상당히 개혁적인 논리를 펼친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불교도들의 세력 규합을 위해서 만해 선생으로서는 매우 효율적인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는 구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요.
▼ 내가 단편적으로 읽은 느낌 가운데에서는 〈불교유신론〉의 요지가 식민지 시대에 들어가면서 불교는 조선불교 자체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과 다른 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만해 선생은 중간 노선을 모색했을 것 같습니다. 불교의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양쪽 주장을 아우르는 방향에서 입장을 밝혔던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돼요. 당시 식민지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도 아니라는 거죠. 불교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선사람들의 독립정신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이 〈불교유신론〉의 요체가 아니었을까 해요. 아마 조선불교의 현실성을 강조하면서 부드럽게 표현한 측면도 있을 겁니다.

― 얘기를 돌려서 선생님께서는 유학을 떠나,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문학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신문기자 생활을 하셨습니다. 북쪽에서도 하고 나중에 한국전 전후로 남쪽에서도 하셨는데, 그 과정을 들려주시죠.
▼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서울에서 〈동신일보〉 기자를 했고, 1946년 1월부터 11월까지는 〈중외신보〉 기자로 일했는데, 몽양 선생이 만들던 신문입니다. 그러다 11월에 평양으로 가서 〈민주조선〉 기자를 했습니다. 그 뒤로 북쪽에서 나온 〈농민신문〉의 사회부장, 정치부장을 했고, 〈노동자신문〉 문화부장을 지내다 다 그만두고 자유롭게 글만 썼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50년 6·25가 터지고 6월 26일 전쟁의 격동 속에서 남쪽을 취재하기 위해 군인들 차에 올라 남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게 가족과 생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1980년대 문단 등단보다 훨씬 이른 1947년, 〈민주조선〉에 〈선거〉라는 시를 발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1947년 〈민주조선〉에 안회남이 문화부 차장으로 있을 때 그 신문에 처음 내 시 〈선거〉를 발표했습니다. 현재 생존한 시인 가운데 아마 제가 가장 빨리 등단한 사람일 겁니다. 1980년도에 데뷔했다는 것은 남쪽에 한해서 보면 그 시점부터 시를 발표하게 된 거라는 거지요. 그리고 평론은 북에서 나온 《문학예술》에 세 편 발표했습니다. 소설가 이태준론과 황건론, 시인 김상오론을 썼어요. 지금 그 원고를 찾고 싶어도 도저히 못 찾겠어요. 나한테도 그 원고가 없는 것이 아쉬워요.

―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된 이후와 한국전쟁이 끝나고 분단된 민족의 운명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시면서 끊임없이 민족시와 통일시를 쓰고 계십니다. 어떤 점이 그토록 이런 시를 쓰게 만드는지요?
▼ 나는 물론 어렸을 때부터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많이 읽었어요. 할머니나 어른들이 이런 책들을 읽고 있으니까 어린 것이 잘한다고 칭찬을 해서 자주 읽어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글쓰기나 책 읽기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좀 커서는 글을 쓰되 독립을 위해서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시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하겠다 그거였지요. 분단된 나라에서 시를 써서 통일운동을 해야겠다는 신념이 강하게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역시 분단을 해결하고, 통일된 조국을 세우기 위해서 내가 문학을 하는 겁니다. 물론 내가 문학을 좋아해서 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러나 큰 목적은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이 되는 그러한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글을 쓴다, 이것이 내 기본적인 태도예요.

― 1988년에 세 번째 시집 《지리산》으로 필화사건에 연루되셨습니다. 시집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불구속 기소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 시집 《지리산》 때문에 붙잡혀 가서 고생했지요. 한국전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내가 못 갔거든요. 거기서 1년 반 있었는데, 지리산에서 양쪽이 싸웠던 얘기예요. 그 사건으로 구속되지는 않고 불구속으로 대법원까지 올라갔는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어요. 그러다 나중에 무죄로 사면 받았어요.

― 최근 열 번째 시집 《절정의 노래》를 출간하셨습니다. 특별한 소회와 담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습니까?
▼ 첫 번째 시집 《망향》에서부터 아홉 번째 시집인 《해연이 날아온다》까지 내 시집의 내용이 일관되게 통일을 지향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절정의 노래》에 이르러서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조화가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전에는 내용에만 치우쳐 있었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통일에 대한 내용이긴 하지만 형식과 내용이 비교적 과거보다는 원숙한 면이 있다고 자부하고 이 후도 그 방향에서 시를 써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월의 〈초혼〉, 만해의 〈님의 침묵〉,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등 이런 좋은 시들처럼 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도 주고 재주도 번뜩이는구나, 이런 감탄을 자아내는 수준 높은 시 작품을 창조해 내고 싶다는 것이 내 욕망입니다.

― 선생님께서 만해 선생을 기리는 시 네 편을 1982년도에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쓰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문학잡지에 발표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시집에 들어갔나요?
▼ 예, 있습니다. 다른 데는 발표를 못하고 《봄은 왜 오지 않는가》라는 시집에 들어 있습니다. 특별히 발표할 지면도 없고 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해 선생이 33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게 대단하고, 《님의 침묵》을 썼다는 문학적인 위상도 좋았지만, 독립선언서를 집필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거든요.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선생이 백담사 가는 얘기로 끝냈는데, 나로서는 애착이 가는 작품이에요. 감개무량해요.

― 만해 선생을 배우고자 하는 본지 독자들과 젊은 작가들을 위해 덕담 한마디 덧붙여 부탁드립니다.
▼ 예, 알겠습니다. 사실 우리 문학의 현주소는 암울하다고 생각해요. 왜 암울한가? 극히 일부 작가를 제외하곤 대부분 젊은 작가들은 분단 종식에 상관없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작품들을 쓰면서 활동해 나가고 있어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청산하지 않고는 우리 문학이 살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소설에서 《태백산맥》 같은 몇몇 좋은 작품이 있는 게 사실이고, 시도 마찬가지로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같은 훌륭한 작품들이 있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의 작품 세계에서 혼돈하고 있어요. 방황하고 있고, 들뜨고 있어요. 이러지 말고 리얼리즘 문학을 하면서 리얼리즘적 소설, 리얼리즘적 시, 리얼리즘적 평론을 쓰면서 우리의 통일을 하루빨리 쟁취할 수 있는 방향에서 창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국내 최고령 시인으로 또 만해 선생과 유일하게 교류한 생존시인으로, 선생님의 문학적 여정은 우리 문학사의 산 증인으로 충분히 귀감이 될 것입니다. 93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통일운동을 열정적으로 하시며 젊은 후배 작가들을 다그치는 선생님의 활기찬 모습을 오래도록 뵙고 싶습니다. 그래서 꼭 염원하시는 통일을 보실 수 있기를 기원드리면서 내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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